1. 줄거리 。。。。。。。        

 

     미래의 어느 세상.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하나가 의사 앞에 앉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네모 노바디(Nobody)라고 소개하는 그는, 이름 그대로 자신이 ‘아무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상한 것은 노인이 자신을 서른네 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기술로 인해 누구도 죽지 않게 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던 그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한 명이 병원으로 잠입을 하게 되고, 네모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영화가 좀 어렵다. 노바디가 풀어 놓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가 내뱉은 말처럼,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모순되고 말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다시 저 사람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네모들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만난 애나, 앨리스, 진이라는 세 명의 친구들과 결혼을 하고 그에 맞는 삶들을 살아간다. 공교롭게도 각각의 이야기 속 네모들은 모두 삼십 대 중반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노인 네모는 누구인가?

 

 

 

     영화의 키워드는 역시 ‘선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결과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 어느 것이 과연 최선일까? 이럴 때 그 옛날 일밤에서 이휘재가 열연했던 ‘인생극장’처럼 두 선택지의 삶을 다 살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고 편할까.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랬다. 그는 각각의 삶을 다 살아보았다(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비유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약간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속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본 뒤에야 비로소 여기까지 왔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걸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모든 삶들의 결론은 삼십 대를 채 다 살지도 못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영화 속에는 초끈이론이며 평행우주, 빅크런치 같은 물리학 이론들이 잔뜩 등장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현대물리학 속에서 찾으려고 시도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다른 평행 우주, 혹은 다른 선택 속의 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때문에 영화의 결론부에 가서 각각의 선택에 따른 결과들은 나름대로 가장 최선의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선문답 같은 대답이 주어지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선택들의 결과로 있는 지금의 나일뿐이다. 모든 삶을 다 살아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길이 완전하고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좌우되지 말고(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장면 중 하나인, 이혼하려는 부모 사이에서 누구를 따라갈까 고민하는 장면은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좀 더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게 최선일 뿐이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간만에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괜찮은 영화를 봤다.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고민(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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