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단칸셋방에서 우리의 신혼살림이 시작되었다.

‘상이용사와 사랑에 빠진 간호장교 출신 여인’을 격려하는 전국 각지의 성금과 물품들이 답지하기를 보름여, 더 이상 답지할 게 없는 즈음이 되자 경자는 물품들을 모두 반값에 내다팔았다. 성금에다가, 병원을 퇴직할 때 받은 자기 퇴직금은 물론 내게 지급되는 상이군인 연금까지 자기 통장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경자는 큰 가방 두 개로 짐을 꾸렸다. 무슨 짐이냐고 묻자 경자가 답했다.

“당신은 그저 따라오기만 해요. 시골로 가는 거니까.”

어리둥절한 내게 그녀는 그곳에 직장과 살 집도 얻어 놨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나는 더욱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가다 낯선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포장이 안 된 도로 탓에 심히 덜컹대는 버스로 가길 두어 시간. 마침내 버스에서 내렸다. 허허벌판에 우리 둘만 서 있었다.

큰 가방 두 개를 양손으로 나누어 든 경자와 목발을 짚은 내 그림자가 흙먼지 이는 벌판에 드리워졌다.

경자는 앞장을 서서 벌판 끝 산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쩔룩쩔룩 뒤따라가다가 힘겨워 멈춰 섰고 그러면 경자는 그걸 모르고 얼마만큼 가다가 멈추어 서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늦봄의 햇살은 비스듬한 각도로 들이쳐서 나는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하고 풀풀 날리는 경자의 발걸음 흙먼지를 주시하며 뒤따라야 했다.

조금도 지치는 기색 없이 손에 쥔 두 가방을 앞뒤로 엇갈려 흔들며 앞장서가는 경자.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 길로 들어섰다. 옆으로 다가서는 산들로 점점 좁아지는 하늘, 십 리쯤에 한 채씩 보이는 민가, 요란해지는 계곡의 물소리.

저녁나절에 어느 낡은 너와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내 목발이 부러져나가, 긴 나뭇가지를 대신 짚어야 했다.

너와집은 화전민이 사는 집이었다. 머리 한 번 감은 적이 없어 보이는 봉두난발 화전민 내외가 우리를 맞았다. 비어 있는 옆방이 우리가 며칠 묵을 방이라 했다. 빛바랜 신문지들로 도배된 벽, 가마니 두 장이 장판 대신 깔려 있는 방바닥. 보리밥 저녁을 얻어먹자마자 나는 물먹은 솜처럼 쓰러져 잤다.

사흘 후.

경자가 어디서 구해온 목발 하나. 나는 다시 경자 뒤를 따라 나서야 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또 다시 산길. 긴 뱀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로지르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기한 새 울음소리. 웬 사마귀가 경자의 머리카락에 붙었다가 날아가기도 했다.

쩔룩쩔룩, 경자를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갔다.

산 위의 태양은 엄청난 소리로 맴돌며 땀에 젖은 내 몸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나는 앞으로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목발을 짚었다.

한나절 걸려 도착한 곳은 조그만 학교였다. 교문도 없는 운동장 저 편에 자리한 교실 한 칸짜리 분교.

돌투성이 운동장은 잡초들까지 무성했다. 나는 목발을 내던지고 운동장 어귀의 포플러나무 등걸을 부여잡고 섰다. 겨드랑이 살갗이 벗겨지고 문드러져서 피가 웃옷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어지럽기까지.

빈혈 증세.

분교의 빛바랜 유리창들마다 한 개씩의 태양이 담겨져 운동장을 내다보는 한낮. 나는 가쁜 숨을 가누면서 어질어질한 채로 서 있었다.

경자는 건물 한쪽 끝으로 달려가더니 종을 치기 시작했다.

“땡 땡 땡 땡……”

종소리들이 유리창의 널린 태양들과 함께 내 지친 신경을 후려치고 있었다. 나는 옷 속의 훈장을 만지며, 그 차가운 촉감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빈혈증세와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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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청주 녀석에 대한 대책에 골몰하다가 맞이한 그 날 밤이다.

45년이나 흘렀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건을 저지른 그날 밤’이다.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었다. 동네 애들이 어김없이 외갓집 마당에 들어와 그를 불렀다.

“봉, 길, 아!”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고 둘러댈까’ 궁리하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이!’ 응답하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틀에 하루 꼴로 애들이 찾아와 ‘봉, 길, 아’ 부르고, 그러면 ‘어이’ 대답하고 나가는 변함없는 반복이 조건반사 같은 결과를 빚은 게 아닐까? 아니면 ‘될 대로 되겠지’하는 체념이었을까?

어쨌든 그는 별나게 보름달까지 환하게 뜬 그날 밤, 동네 애들과 유행가들을 부르며 신작로를 걸어갔다. 그저께 밤에 마시다 남긴 소주 댓병을 찾아, 두어 모금씩 돌아가며 마셨으므로 유행가가 안 나올 수 없다.

“사아나이 가슴에도오 눈물으은 이있다아 이이렇게 정을 두우고 떠어나아 가알 바에……”

면소재지 동네로 가는 신작로의 중간쯤 왔을 때다. 멀리, 거뭇한 움직임이 있더니 서서히 사람들 무리로 드러났고, 거리가 좁혀지자 무리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면소재지 애들로 보이는 대여섯 명 가운데에 학생모를 쓴, 키가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이가 있었다.

‘청주에서 온 녀석이구나.’

이런 순간을 예상하며 지낸 때문일까? 뜻밖에 그는 마음이 가라앉듯, 차분해져 스스로 놀랐다.

약속이라도 한 듯 양 쪽이 약 3미터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무심한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존재하는 침묵을, 그 쪽 무리에서 키 작은 아이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깨뜨렸다.

“그래, 춘천에서 왔다는 그 대단한 봉길이가, 여기 있냐?”

그 아이는 청주에서 온 녀석 옆에 서 있다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빈정거리는 어조인 게 ‘춘천 당수와 청주 당수의 대련’ 을 이 자리에서 이끌어내려고 시비 거는 역이다.

“그래, 난데?”

하면서 그도 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아이가 ‘헤헤’ 웃음을 흘리며 한층 빈정거리는 어조로 “그래, 당수 실력이” 하는 순간 그는 얼굴 정면을 주먹으로 냅다 갈겼다. 있는 힘을 다한 단 한 번의 가격에 아이는 ‘어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정확히는,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신작로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잠시 후 엉거주춤 간신히 일어난 아이. 한 손으로 코 부분을 막고 섰지만 신작로 바닥으로 무슨 액체가 툭, 툭, 툭 떨어지는 게 아무래도 코피가 터진 듯싶었다. 급히 지혈을 돕느라 면소재지 동네 애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그는 기세 높여 씨부렁거렸다.

“이런 씨팔 놈의 새끼가 얻따 대고 까불어! 에이 썅, 죽여 버릴까 보다.”

그러면서 아이 쪽으로 나아가려 하자, 희망리 애들이 ‘다행히도’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그만 참아, 봉길아.”

순식간에 벌어진 눈앞의 참사에 놀란 청주 당수 녀석. 못 이기는 체 양팔이 붙잡혀 있는 그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게, 그러나 애써 품위를 잃지 않으려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씨. 반갑습니다. 저는 청주에서 왔거든요.”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도 양팔을 애들한테서 뗀 뒤 손을 내밀어 악수했는데 정말, 남은 힘 모두를 모아 내민 손이며 악수였다. 방금 전 아이를 가격한 순간 그의 주먹도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귀가해서 그 손을 살펴봤더니 온통 시커멓게 멍 든 데다가 새끼손가락은 뼈까지 휘어있었다. 만일 청주에서 온 녀석이 맞은 아이의 복수를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당수 대련을 청했더라면 그는 꼼짝 못하고 자기 제삿날을 만들 뻔했다.

악수한 채로 청주 녀석이 말을 이었다.

“저도 당수를 배웠거든요. 2단입니다.”

“나도 당수를 배우긴 했는데, 뭐, 그깟 당수 백 날 배워 봤자, 구찌로 찌르면 말짱 꽝 아닌가? 아니, 역도산이 당수를 못해서 죽었나? 안 그래, 형씨?”

구찌란 깡패들이 쓰는 은어로 칼을 뜻한다. 몇 년 전, ‘역도산’이라는 재일교포 출신의 유명한 프로레슬러가 일본 조무래기 깡패의 칼에 찔려 허무하게 죽은 사건이 있었다. 레슬링 경기 때마다 당수 기술을 사용해 승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의 허망한 피살은 ‘아니, 역도산이 당수를 못해 죽었나?’하는 음산한 유행어를 낳고 말았다. 내게 칼이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위협에 다름 아니다.

청주 당수 녀석은 기겁해서 침묵했다가, 손수건으로 코피를 막느라 경황없는 키 작은 아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야이, 새끼야. 니가 잘못한 거야. 저 분한테 사과해.”

키 작은 아이가 왼손은 코피를 막으며 오른손을 내밀어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없이 고개를 한 번 꾸벅였다. 그는 몹시 아픈 손으로 다시 악수하면서, 그 아이가 코피만 터진 게 아니라 앞니도 몇 대 나갔음을 눈치 챘다. 코뿐만 아니라 입 부분도 온통 피투성이가 돼버렸기 때문에 아이는 입으로 사과의 말도 못하고 고개만 꾸벅인 것이다. 그는 ‘이거, 내가 간단치 않은 사고를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일인 것처럼 넘어갈 수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정이라도 든 듯 그는 어울리지 않게, 측은히 여기는 따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많이 아파?”

그러자 아이는 손수건을 잠깐 떼고는 입을 다쳐 제대로 되지 않는 발음으로 겨우 답했다.

“괜……찮아.”

주먹 한 방에 망신창이가 되었으나 애써 사나이의 담대한 기개를 잃지 않는, 딱한 아이였다.

그는 이번에는 청주 녀석한테 아픈 자기 손의 고통을 숨기며 다시 악수를 청한 뒤 말했다.

“다음에 봅시다. 그 때, 따로 둘이서 소주 한 병 까자고.”

그런 뒤, ‘춘천에서 온 봉길이의 대단한 당수 실력과 그에 따른 호걸스런 마무리’에 존경의 염까지 생긴 희망리 시골 애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씨발 피 봤으니, 오늘 밤 기분도 좆같고. 뭐, 그냥 우리 동네로 되돌아가자고.”

 

돌이켜보면 ‘사건을 저지른 그날 밤’ 자기가 얼마나 기민하게 대처했는지, 스스로도 놀랍다.

요즈음 애들이 잘 쓰는 말로 ‘자뻑’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예순세 살 평생에서 1968년 여름날 달밤에 충북 음성군 운포면 희망리 신작로에서 벌인 그 사건만큼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든 사건도 없었다. 차를 몰고 운포면에 다가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이제 그는 다소 어법에 맞지 않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왜, 그 날 밤 내가 그 위기를 기민하게 잘 대처했을까?’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그 나이는 인생에서 가장 신체기능이 좋은 나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간은 사춘기 때 몸의 기능이 가장 왕성하다’고 진술한다. 1968년 여름 밤, 그는 왕성한 자신의 갖가지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팔팔한 수컷늑대처럼.

키 작은 아이가 시비를 걸어왔을 때 채 말도 끝나기 전에 주먹으로 가격한 사실 하나만 봐도 그런 기능의 유감없는 발휘였다. 왜냐면, 그는 본능적으로 ‘이 순간 이 아이를 공격하지 못하면 내가 당한다. 허를 찔러야 내가 이길 수 있다.’ 판단했고 그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만일 키 작은 아이가 시비를 거는 대로 그들의 작전에 휘말렸다면 그는 청주 녀석한테 엄청 맞고 터지는 결과를 낳으면서 1968년 여름은 그에게 인생 최악의 여름으로 남았을 게다.

그가 2단 옆차기 동작을 활용하지 않고 극히 단순한 동작인 ‘정권 치기’, 즉 주먹으로 그 아이의 얼굴을 가격한 것 또한 아주 적절했다. 왜냐면 2단 옆차기는 화려하고 멋진 동작이긴 하지만 반드시 일정 거리가 확보되어야 하고 준비자세도 갖춰야 했다. 따라서 키 작은 아이가 바짝 다가서며 시비를 걸던 순간에는 결코 적합한 대응동작이 못 되었다. 평범하고 단순한 ‘정권 치기’야말로 그 순간 절묘한 선택이었다. 아이가 가격을 당하자마자 무참하게 쓰러지던 모습이 그를 입증한다.

싸움이 끝난 자리를 더 잇지 않고 ‘씨발 피 봤으니, 오늘 밤 기분도 좆같고. 뭐, 그냥 우리 동네로 되돌아가자고.’ 며 마무리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괜히 머뭇대고 시간을 끌어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었다. 청주 당수 녀석이 뒤늦게 ‘친선경기 한다 치고 당수 대련을 한 번 합시다’고 제안한다면 간신히 가라앉힌 재앙이 되살아나 지옥이 될 게 뻔했다. 게다가 키 작은 아이가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연실 닦고 있었으니, 잠시라도 그 자리에 더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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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복수보다는 용서와 화해가 더 높은 가치로 얘기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은 ‘최순실’이란 특정인의 경우를 보자. 그녀를 용서하고 화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러잖아도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어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해결난망의 생계에 맞닥뜨려 난리인데, 그녀가 단지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저질러 놓은 국정 난맥과 그 폐해를 용서하고 화해의 품에 안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의 절대적 가치를 훼손한 최순실 그녀와 무리를 절대 용서하거나 화해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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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은 물론 어머니의 삶까지 파멸시킨 나쁜 고향마을 사람들에 대해 틸리(케이트 윈슬렛)가 복수에 나선다. 영화 첫 장면에서 고향을 이십 몇 년 만에 찾아온 그녀가 내뱉은 한 마디.

“I'm Back, Bastards.(내가 돌아왔다, 나쁜 놈들아)!”

그렇다면 그녀는 기관총을 들고 왔어야 하는데 어이없게도 재봉틀을 들고 왔다. 허를 찌르는 반전이다. 이 영화에서 반전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반전이란 기법은 우리 삶을 한 번 뒤집어줌으로써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보게 하는 효능이 있다.

마침내 그녀는 온 마을을 불태우고 멀리 떠나가 버린다. 이십 몇 년 간 품었던 복수가 실천된 것이다. 스토리의 앞과 뒤가 호응하는, 전형적인 수미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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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그녀에게 살인자라는 누명을 씌운 양심불량의 마을이 훨훨 불타는 장면을 보면 그 순간 관객으로서의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 일개인이나 몇 사람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을을 통째로 없애는 복수이기 때문이다.

호주의 외진 작은 마을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라서, 나는 ‘어쩌면 마을 전체를 없앨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 규모의 세트장이라면 재산상의 손실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나의 짐작과 기대를 어기지 않았다.

 

복수로써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영화들이 전에도 있었다. 기억나는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인공으로 나온 ‘용서받지 못한 자’다. 악당들에 의해 망신창이가 된 주인공이 기사회생하여 그 마을 전체를 불태우며 복수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물론 우리는 온 마을을 대상으로 불을 지른다든가 하는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 재산상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그것은 큰 범죄다. 그렇기에 대안으로써‘온 마을을 불태우는 영화 감상’을 권한다.

‘드레스메이커’는 그런 면에서 아주 괜찮은 영화다. 재미도 있고 감동까지 준다. 답답한 요즈음, 이 영화 보기를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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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대련 제안’ 도전장이 하루 만에 그에게 전해졌다. 문서가 아니라 지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 구두 도전장이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희망리 애들의 우두머리로 으스대며 지내느라 재미있는 날들이 순간 허풍 짓으로 들통 날 위기다.

‘어떡하나?’

달리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애들한테 ‘이제는 그 먼 면소재지 동네에 가지 말고 예전처럼 가까운 강에 가서 놀다 오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미 동네 애들은 ‘과연 청주 당수와 춘천 당수가 맞붙으면 어느 쪽이 이길까?’하는 호기심 내지 설렘마저 생겨나, 돌이킬 수 없는 사태였다.

 

동네 애들이 소 먹일 꼴을 마련하고 돼지 똥을 치우고, 논의 피도 뽑고, 담배 밭의 김도 매고 그러는 땡볕의 낮 시간에 그는 외갓집의 윗방에 누워 이런저런 궁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잘 나가던 ‘AW메들리’ 영어 공부도 중단됐다.

당수 2단 녀석과 며칠 안 돼 맞닥뜨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묘안이 나질 않는 것이다. 물론 녀석의 ‘빠른 시일 내 날을 잡아 대련하자’는 제안은 일단 얼버무렸다.

“그 새끼, 내가 뭐 한가한 줄 알고 빠른 시일 내에? 웃기고 자빠졌네. 언제고 나중에 한 번은 만나겠지. 그 때 한판 붙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호쾌한 답변을 기대한 동네 아이가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놓고는 혼자 윗방에 누워 고민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안방을 쓰고 그는 외삼촌이 쓰던 윗방을 쓰고 있다. 윗방에는 외삼촌이 보던 만화책이니 연애소설책이니, 누렇게 빛바랜 책들이 널려 있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처럼 녀석을 찾아가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드리면서 제가 당수 1단이니까 어디 형님한테 대적이 되겠습니까? 하며 위기를 모면할까?’ ‘아니 그건 너무도 비참한 꼴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나를 믿고 따르던 희망리 애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당해, 다시는 방학 때 외가로 놀러오지 못하는 딱한 꼴이 될 거다.’ ‘무슨 소리야? 살고 봐야지. 까짓 거, 매 맞아 죽고 나면 누가 알아나 주나? 괜한 외할머니만 고생바가지를 쓰는 거지. 외손주 장례를 치르느라고 말이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까짓 새끼, 칼 하나 품고 갔다가 싸움이 붙으면 그 칼을 휘두르면서 맞서는 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래, 고작 당수 대련 한 번 하고 나면 그만인 것을 칼까지 갖고 가 난리친다고? 호적에 빨간 줄 갈 일이 있어?’

비좁은 춘천 집의 뒤란과 여기 뒷동산 숲에서 익힌 ‘독학 당수’ 갖고는 ‘청주에서 정식으로 당수 도장을 다니며 2단을 땄다는 녀석’한테 도저히, 대적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개학날이나 가까웠다면 ‘어서 춘천 집으로 가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짐을 싸서 새벽같이 버스 타고 달아났을 텐데, 개학날이 열흘이나 남았으니 그것도 마땅치 않고.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부딪쳐 볼 수밖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소매남방을 걸치고는 방에서 나왔다. 외할머니가 돼지 울에 붙어 서서, 팔자 좋게 바닥에 누운 돼지들의 몸을 작대기로 벅벅 긁어주고 있었다. 그래야 ‘돼지 몸에 붙은 벌거지도 떨어지고, 잘 자란다’는 얘기를 그는 들은 듯싶다.

돼지 울 앞을 지나 사립문밖으로 나가는 그를 외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봉길아…… 차려 놓은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가는 기야?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더니만.”

“밥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해? 나, 당수 연습하러 가는 것, 옷을 보면 몰라?”

 

차는 조수석 창이 반쯤 열린 채 제천의 외곽도로를 지나고 있다.

그나마 창이 반 내린 정도에서 고장 나길 다행이다. 쌀쌀한 바깥 기운과 ‘화창한 햇빛이 만들어낸 실내의 뜨거운 기운’이 뒤섞이면서 적절한 실내 기온을 만드는 것 같다.

남제천 인터체인지에 다다랐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그는 내비게이션을 간간이 보며 국도로 들어섰다. 30분 이내로 음성군 운포면에 도착할 것 같다.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운포면 면소재지를 경유해 희망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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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도시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작 친지들보다 더 많은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들이 식장으로 달려왔다. 취재의 화살은 나보다도 경자에게로 퍼부어졌다. ‘어떻게 몸이 불편한 분과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습니까?’

경자는 간단한 대답으로써 기자들의 호기심을 일축하였다.

“저는 이분을 사랑합니다.”

그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부모님부터 고모 이모네까지 참석한 우리 쪽에 비해, 경자네 쪽에선 같이 일하던 간호장교 두셋이 가족처럼 왔을 뿐이라 양가 어른들의 인사 차례도 생략하고 간단히 치러진 결혼식이었다. 나중에 경자가 해명하기로는, 어머님 한 분이 살아계시지만 노환으로 누운 데다가 친척도 별로 없는 자기 집안이라 했다.

기자들은 결혼식장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피고서 요란뻑적지근한 판단을 내렸다. ‘신부네 집에서 극심한 반대가 있었는데도 결국은 한 여성의 진실한 사랑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고. 기자들은 경자의 이름을 필두로 자기네 감정까지 듬뿍 발라가며 기사를 써갈겨댔다. 우리의 결혼은 그렇게 뉴스거리가 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흘간의 불국사 신혼여행.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경자는 신문들에서 우리 관련 사진과 기사들을 찾아 따로 스크랩해놓느라 바빴다.

나는 그런 경자를 지켜보면서 방구석에 심드렁하게 누워 있었다. 경자의 몸은 돌덩이였다. 아무리 껴안아도 변화가 오기는커녕 오히려 소름 돋는 피부로 나를 맞는 불감증…… 경자는 석녀(石女)였다. 나흘간의 신혼여행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수학여행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따분하고 쓸쓸한 여행이었다.

어떻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묻진 않았다. 그녀와의 약속, 결혼식을 올리기 전 날의 약속 때문이다. ‘서로의 상처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그 약속이 나는 내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또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상호쌍무적인 약속이었다.

경자는 첫날밤부터 도무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어리둥절한 내게 그녀는 자기는 본시부터 그랬다면서 쿡쿡쿡 울었다. 나는 술만 마시다가 새벽녘에야 녹아 떨어져 잠이 들었다. 나흘간의 신혼여행은, 내가 경자한테서 ‘사랑합니다’란 유리창 글씨를 받던 순간 곤혹스럽던 무엇을 처음으로 헤아리게 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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