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대련 제안도전장이 하루 만에 그에게 전해졌다. 문서가 아니라 지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 구두 도전장이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희망리 애들의 우두머리로 으스대며 지내느라 재미있는 날들이 순간 허풍 짓으로 들통 날 위기다.

어떡하나?’

달리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동네 애들한테 이제는 그 먼 면소재지 동네에 가지 말고 예전처럼 가까운 강에 가서 놀다 오자고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미 동네 애들은 과연 청주 당수와 춘천 당수가 맞붙으면 어느 쪽이 이길까?’하는 호기심 내지 설렘마저 생겨나, 돌이킬 수 없는 사태였다.

 

동네 애들이 소 먹일 꼴을 마련하고 돼지 똥을 치우고, 논의 피도 뽑고, 담배 밭의 김도 매고 그러는 땡볕의 낮 시간에 그는 외갓집의 윗방에 누워 이런저런 궁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잘 나가던 ‘AW메들리영어 공부도 중단됐다.

당수 2단 녀석과 며칠 안 돼 맞닥뜨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묘안이 나질 않는 것이다. 물론 녀석의 빠른 시일 내 날을 잡아 대련하자는 제안은 일단 얼버무렸다.

그 새끼, 내가 뭐 한가한 줄 알고 빠른 시일 내에? 웃기고 자빠졌네. 언제고 나중에 한 번은 만나겠지. 그 때 한판 붙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호쾌한 답변을 기대한 동네 아이가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놓고는 혼자 윗방에 누워 고민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안방을 쓰고 그는 외삼촌이 쓰던 윗방을 쓰고 있다. 윗방에는 외삼촌이 보던 만화책이니 연애소설책이니, 누렇게 빛바랜 책들이 널려 있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처럼 녀석을 찾아가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드리면서 제가 당수 1단이니까 어디 형님한테 대적이 되겠습니까? 하며 위기를 모면할까?’ ‘아니 그건 너무도 비참한 꼴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나를 믿고 따르던 희망리 애들한테도 업신여김을 당해, 다시는 방학 때 외가로 놀러오지 못하는 딱한 꼴이 될 거다.’ ‘무슨 소리야? 살고 봐야지. 까짓 거, 매 맞아 죽고 나면 누가 알아나 주나? 괜한 외할머니만 고생바가지를 쓰는 거지. 외손주 장례를 치르느라고 말이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까짓 새끼, 칼 하나 품고 갔다가 싸움이 붙으면 그 칼을 휘두르면서 맞서는 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래, 고작 당수 대련 한 번 하고 나면 그만인 것을 칼까지 갖고 가 난리친다고? 호적에 빨간 줄 갈 일이 있어?’

비좁은 춘천 집의 뒤란과 여기 뒷동산 숲에서 익힌 독학 당수갖고는 청주에서 정식으로 당수 도장을 다니며 2단을 땄다는 녀석한테 도저히, 대적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개학날이나 가까웠다면 어서 춘천 집으로 가서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짐을 싸서 새벽같이 버스 타고 달아났을 텐데, 개학날이 열흘이나 남았으니 그것도 마땅치 않고.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나 밥이 되나 부딪쳐 볼 수밖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소매남방을 걸치고는 방에서 나왔다. 외할머니가 돼지 울에 붙어 서서, 팔자 좋게 바닥에 누운 돼지들의 몸을 작대기로 벅벅 긁어주고 있었다. 그래야 돼지 몸에 붙은 벌거지도 떨어지고, 잘 자란다는 얘기를 그는 들은 듯싶다.

돼지 울 앞을 지나 사립문밖으로 나가는 그를 외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봉길아…… 차려 놓은 점심도 안 먹고 어딜 가는 기야?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더니만.”

밥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해? , 당수 연습하러 가는 것, 옷을 보면 몰라?”

 

차는 조수석 창이 반쯤 열린 채 제천의 외곽도로를 지나고 있다.

그나마 창이 반 내린 정도에서 고장 나길 다행이다. 쌀쌀한 바깥 기운과 화창한 햇빛이 만들어낸 실내의 뜨거운 기운이 뒤섞이면서 적절한 실내 기온을 만드는 것 같다.

남제천 인터체인지에 다다랐다.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그는 내비게이션을 간간이 보며 국도로 들어섰다. 30분 이내로 음성군 운포면에 도착할 것 같다.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운포면 면소재지를 경유해 희망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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