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수업이나 참관수업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기를 전제로 한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교사 질문에 답변할 학생들을 미리 정해놓는 각본 구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어교사인  나는 그런 관행에 저항감을 느꼈다. 학생들이 평소 수업 때  모습 그대로  하도록  당부하고 국어 연구수업을 한 것이다. 끝나고 평가회 때 학생들의 발표가 틀리기도 하는 등 매우 자연스런 수업이었다는 호평이 뒤따랐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호평 받은 연구수업을 다시 생각해 본다. 과연 그 수업이 자연스러웠을까?  글쎄, 회의적이다. 당시 학생들이 아무리 평소 수업 때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 했어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예로써, 평소 수업 때 수시로 장난 치다가  야단 맞는 학생이 있었는데 당연히 연구수업 때에는 똑바른 자세로 성실히 수업에  임했던 것이다. 외부손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히 장난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모든  학생들이 외부손님들의 눈길을 의식한 순간 평소의 실제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다.

   타인의 눈길을  의식한 순간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사진기 앞에 서는 순간 절대 평소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뿐만도 아니다. 동물도 사람의 사진기가 자신을 향했음을 인식한 순간 실제 모습에서 벗어난다. 허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거나  획 달아나거나 아니면 놀란 모습이라도  보인다.
   주변에 cctv가 사방에 설치되었다. 속성상 몰래 카메라이기에  설치돼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느 곳에  cctv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주눅들어 조심스레 행동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긴, 숨 거두는  순간까지 남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 인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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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교무과장 선생이 다음 날 아침 조회시간에 들어왔다.

애써 침통한 낯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담임선생님께서 불가피한 사정으로 여러분들도 못 보고 급히 서울로 가게 된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며…… 그런 마음을 여러분에게 대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당분간은, 다른 선생님이 임시로 학급을 맡으실 테니 그리들 알고 전과 다름없이 학업에 임해 주기 바랍니다. 알았죠?”

“네에.”

“대답하는 소리들이 작아요. 다시, 알았죠?”

“네엣!”

대머리 선생이 사라진 뒤 실장이 교단으로 나와 부연했다.

“우리 반 임시 담임은 윤리 선생님이야!”

그러더니 애들이 웃기도 전에 자기부터 먼저 웃었다. 원 세상에, 고루하고 답답한 노인네 선생이 임시 담임이라니! 실장은 애들의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한 마디 더 했다.

“오늘 종례시간에 들어오신다 했으니까, 너희들 절대 뺑소니치면 안 된다!”

그 즈음 종례시간에는 50명 재적 중에 20명 가까이 무단으로 불참하고 30명 정도만 남아 종례를 기다렸다. 담임선생이 거의 오지 않은 종례이니까 무단으로 귀가해도 될 듯싶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이 약한 애들만 남았던 거라면 지나친 자기비하일까? 마음이 약한 경우란 ‘종례에 불참했다가, 담임이 들이닥쳐서 행동발달상황 란의 준법성에 다를 맞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이다. 나는 남아 있는 경우에, 걔는 무단으로 가는 경우에 속했다.

실장이 우리 분단 뒤로 와 걔한테 별도로 부탁했다.

“노인네가 출석 점검할지 모르니까 종례 받고 가야 해.”

걔는 “나 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노인네 선생이 돋보기안경을 빛내며 종례시간에 나타났다. 교실 안팎은, 실장이 청소시간에 청소해달라고 애걸하며 다닌 덕에 깨끗해졌다. 소란스레 지내는 윤리시간의 선생이 아니라 ‘임시 담임’으로 나타난 때문일까, 애들은 뜻밖에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노인네 선생은 청소가 잘 되어있는 데다가 학생들도 빈자리 하나 없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어 흡족해 했다. 돋보기안경 낀 얼굴에 미소가 겹치며 종례의 말씀을 시작했다. 우리로서는 장장 세 달 만에 경험하는 종례 말씀이었다.

“제군들이 근래 들어서 성실하게 학교생활에 임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과연 오늘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

하며 근엄하게 말씀을 이어가는데 그 때 뒤 출입문 밖에서 누군가 약하게 노크했다. 그러자 부근에 앉은 걔가 ‘잠깐 기다려.’라고 소리죽여 답했다. 그래도 밖에서는 뭐가 급한지 계속 약하게 노크했다.

그 소리에 종례 말씀이 침해를 받자 노인네 선생은 말씀을 중단하고 앞쪽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는데, 복도의 누군가 그 낌새를 알아채고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가 났다. 노인네 선생은 할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중단했던 말씀을 이으려는데 자신이 어디까지 말했는지 잊어버려 멍하니 서 있었다. 그 광경에 우리들이 깔깔대고 웃으면서 평소의 윤리시간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노인네 선생은 전개하던 말씀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잘못 박힌 장승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우리는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종례 말씀’이란 걸 우회적으로 전달하려는 듯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실장이 엉거주춤 일어서서 ‘떠들지 말자’는 간절한 표정까지 지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노인네 선생은 사태를 파악하였다. 중단된 말씀인 채로 종례를 마치기로 했다.

“차렷, 경례!”

인사를 받은 노인네 선생보다 걔가 먼저 부리나케 뒤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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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한 마리가 횡단보로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는 걸 나는 목격했다.

 

하기는, 근래 들어서 개가 찻길을 무단 횡단하다가 치여 죽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개의 꼴’은 십여 년 전 일이다. 대낮의 햇빛 아래 그 개는 찻길 한복판에 쓰러진 채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쯤 벌어진 주둥이에서 새나오던 고통의 신음. 마침 가까운 인도를 걷다가 목격한 나는 잠시 멈춰 섰으나 이내 빨리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그 개를 알아서 치울 거라, 마음 정리하고서 현장을 빨리 벗어난 것이다.

 '개 주검'에 불과하니까.

 

그런 개 주검을 보기는커녕, 엉뚱하게도 '횡단보도로 안전하게 찻길을 건너는 개들’을 목격한 것이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개줄에 딸려가는 개’가 아니다. 개 혼자서 자주적인 의사와 판단으로써 마치 인간처럼 횡단보도를 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룬 문화 중 하나가‘교통질서’다. 그런 교통질서에 개가 동참하다니!

 분명하게, 횡단보도의 선이 페인트로 그어진 범주 내로 찻길을 건너는 개. 문제는 그 개뿐만 아니라 다른 개들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자네 눈에만 그런 개들 광경이 자주 눈에 뜨인 모양이네.”

 하고, 누가 핀잔을 준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내 눈앞에서 개들이 자기 의사로써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었으니까. 십여 년 전, 찻길을 아무렇게나 건너다가 횡사한 개들의 말로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데.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장면은 조지조웰의 '동물농장'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사회 생활하는 허구 속 장면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써 우리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슬그머니 사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아득한 옛날, 원시인들 주변을 맴도는 늑대였는데 먹이에 길들여진 끝에 애완의 자리를 차지한 '개'. 그 때 인간들 손에 길들여지기를 끝내 거부한 늑대는 갖가지 박해를 받다가, 이제는 동물원우리에 갇혀 '멸종 위기' 속에 하루하루 연명한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개가 오늘날 대단한 번성을 이룬 것의 핵심은 환경적응이었다. 그렇다, 찻길에서 치이던 개들이 어느 때부터 인간이 만든 교통질서 환경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사용하고 있다. 개들의 유전자 속에 이런 정보가 축적된 게 아닐까?

‘찻길을 아무 데로 건너다가는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으니까,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로 건너야만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는.

 아니면,

‘찻길 아무 데로 건너다가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은 개들은 저절로 단종되면서’ 그렇지 않은 개들만 살아남으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결과? 이런 현상을 '적자생존'이라 했다.

 

인간들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환경에 적응' 된 후손들만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게 아닌가. 

처음 철로가 놓였을 때 발생했다는 인간의 시행착오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철로를 베개 삼아 베고 자다가 횡사한 경우, 멀리서 쏜 살같이 달려오는 기차를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며 철길을 건너다가 치여서 죽은 경우 등등……. 이러한 사건들이 초기에 빈번하면서 적응 안 된 인간들은 배제되고 적응된 인간들만 살아 남아 오늘날 편하게 기차나 전철을 타며 현대사회를 사는 거다. 

 

 변화에 적응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인간이건 ‘개’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시 어느 곳에서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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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blog.choj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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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걔가 눈을 떠 내 눈길과 마주쳤다. 걔가 말했다.

“참, 너한테 보여줄 게 있는데…….”

그러면서 자기 공책의 맨 뒷장을 펴 보였다. 거기에는 무슨 그림이 커다랗게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걔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장난목소리로 한 마디 더했다.

“나도 그림을 그려봤지롱.”

공책을 내 쪽으로 돌려놓자‘두 마리 토끼가 절구질하는 달나라’ 그림이었다. 종이 면의 반을 넘는 크고 둥근 달 한가운데 두 마리 토끼가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절구질하고 있었다. 잘 그렸다기보다는 무난한 스케치였다.

“잘 그렸는데…….”

“야아, 말도 마라. 이 그림이 좋아서 여러 번 연습장에 그려 본 뒤 공책에 최종적으로 그려놓은 거야.”

낙서장이나 다름없는 그 공책 말고도 따로 연습장이 있다니, 나는 우스운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걔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 때, 실장이 어느 샌가 교단에 서서 외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이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로 가셨대. 교무실에 들렀더니 교무과장 선생이 그러더라고!”

그러자 애들이 제각각 떠들었다.

“니미, 어째 종례 한 번 제대로 안 하는 게 이상하더라니까!”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씨발 어떻게 되긴, 별일 없지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들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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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평온한 학교였다. 아침마다 학생과(課) 선생들이 교문 앞에 서서 지각과 복장단정 지도를 하고, 매 시간 수업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종이 빠짐없이 울리고, 월요일의 애국조회 또한 거르지 않고 거행되고, 7교시 직전에는 전교생이 참여하는 청소시간이 진행되고, 종례시간 후 각 반 주번들이 학급일지를 담임선생한테 도장 받으러 다니느라 바쁘고……. 하지만 동시에 피비린내를 머금은 검은 구름 또한 학교에 시커멓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한결같이 교복바지의 밑단을 교묘하게 넓혀 나팔바지 비슷하게 입고 담배냄새도 풍기는, 살벌한 눈매의 존재들이 걔에게 다가와 포옹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섬뜩한 우의를 다지고 있었다. 전에 없이 쉬는 시간도 편히 쉬지 못하는 생활로 바뀌면서 걔는 고단해졌다. 결국은 담임선생의 독일어 수업시간 중에 코골며 자기에 이르렀다. 담임선생이 판서를 멈추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린교?”

나는 손을 뒤로 뻗어, 정신없이 코고는 걔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서너 번 흔들자 코고는 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갈 즈음에 다시 코고는 소리를 내었다. 담임선생이 다시 설명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소린교?”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담임선생 어조를 흉내 내어 답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아닌교?”

교실에‘와하하!’폭소가 터졌다. 담임선생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신이 우스개 가 돼버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 때 끝 종이 울렸다. 담임선생은 체념한 표정으로 교실을 나갔다. 하긴 학급 종례도 교실이 멀어서 오지 않는 분이 생활지도에 시간을 낭비할 리 없었다. 애들이 여기저기서 ‘무슨 소린교?’를 흉내 내며 낄낄거릴 때 나는 돌아앉아 걔를 보았다. 걔는 공책 위에 침까지 흘리며 엎드려 자고 있었다.

교내를 서서히 휘감기 시작한 어두운 태풍의 눈이 침까지 흘리며 고단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걔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게 한 달 전 내 차례였던 ‘양동이 물 버리기’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 날 걔가 나를 돕는다고 했을 때 나는 얼른 사양하며 그 양동이를 들고 교실을 빠져나갔어야 했다.

달리 생각하면……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동이 물 버리기 사건이 없었다 해도, 걔는 어차피 교내 폭력 써클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유도 2단이라는 공인된 실력에, 대단한 체구와 깡다구까지 갖춘 존재가 폭력 써클에 가입하는 일 없이 우리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런 데 휘말리는 일 없이 학교를 무난하게 잘 다니고 싶은 마음이 걔라고 해서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휘말리지 않으려 해도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것은 본인이 바로 거대한 회오리바람 그 자체인 때문이 아닐까? 아메리카 불곰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체구에 으스스한 눈매, 격렬한 감정의 폭발, 그런 것들을 뒷받침하는 깡다구와 운동능력.

그런 요소들을 다 갖추고서 어떻게 풍파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양대 폭력 써클들의 악명이 타교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 학교에서 말이다. 모든 건 얘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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