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한 마리가 횡단보로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는 걸 나는 목격했다.

 

하기는, 근래 들어서 개가 찻길을 무단 횡단하다가 치여 죽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개의 꼴’은 십여 년 전 일이다. 대낮의 햇빛 아래 그 개는 찻길 한복판에 쓰러진 채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반쯤 벌어진 주둥이에서 새나오던 고통의 신음. 마침 가까운 인도를 걷다가 목격한 나는 잠시 멈춰 섰으나 이내 빨리 지나쳐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그 개를 알아서 치울 거라, 마음 정리하고서 현장을 빨리 벗어난 것이다.

 '개 주검'에 불과하니까.

 

그런 개 주검을 보기는커녕, 엉뚱하게도 '횡단보도로 안전하게 찻길을 건너는 개들’을 목격한 것이다.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개줄에 딸려가는 개’가 아니다. 개 혼자서 자주적인 의사와 판단으로써 마치 인간처럼 횡단보도를 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이룬 문화 중 하나가‘교통질서’다. 그런 교통질서에 개가 동참하다니!

 분명하게, 횡단보도의 선이 페인트로 그어진 범주 내로 찻길을 건너는 개. 문제는 그 개뿐만 아니라 다른 개들도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자네 눈에만 그런 개들 광경이 자주 눈에 뜨인 모양이네.”

 하고, 누가 핀잔을 준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내 눈앞에서 개들이 자기 의사로써 당당하게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었으니까. 십여 년 전, 찻길을 아무렇게나 건너다가 횡사한 개들의 말로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데.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장면은 조지조웰의 '동물농장' 속 한 장면이 아니었다. 동물들이 인간처럼 사회 생활하는 허구 속 장면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써 우리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슬그머니 사회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아득한 옛날, 원시인들 주변을 맴도는 늑대였는데 먹이에 길들여진 끝에 애완의 자리를 차지한 '개'. 그 때 인간들 손에 길들여지기를 끝내 거부한 늑대는 갖가지 박해를 받다가, 이제는 동물원우리에 갇혀 '멸종 위기' 속에 하루하루 연명한다.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개가 오늘날 대단한 번성을 이룬 것의 핵심은 환경적응이었다. 그렇다, 찻길에서 치이던 개들이 어느 때부터 인간이 만든 교통질서 환경에 적응되어, 횡단보도를 사용하고 있다. 개들의 유전자 속에 이런 정보가 축적된 게 아닐까?

‘찻길을 아무 데로 건너다가는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으니까,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로 건너야만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는.

 아니면,

‘찻길 아무 데로 건너다가 무지막지한 차에 치여 죽은 개들은 저절로 단종되면서’ 그렇지 않은 개들만 살아남으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결과? 이런 현상을 '적자생존'이라 했다.

 

인간들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환경에 적응' 된 후손들만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게 아닌가. 

처음 철로가 놓였을 때 발생했다는 인간의 시행착오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철로를 베개 삼아 베고 자다가 횡사한 경우, 멀리서 쏜 살같이 달려오는 기차를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며 철길을 건너다가 치여서 죽은 경우 등등……. 이러한 사건들이 초기에 빈번하면서 적응 안 된 인간들은 배제되고 적응된 인간들만 살아 남아 오늘날 편하게 기차나 전철을 타며 현대사회를 사는 거다. 

 

 변화에 적응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인간이건 ‘개’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시 어느 곳에서 개들이 횡단보도를 이용해 찻길을 건너고 있다.

사진출처 : blog.choj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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