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 밤 그분이 나를 찾아왔다.
철광산의 자력 방출 탓으로 흐릿한 텔레비전 화면이라 트랜지스터를 켰는데 그것도 잡음이 심했다.‘하숙방에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밤이라면 읍사무소 분향소에나 가볼까?’하는 장난스런 생각마저 들었다. 밤에도 분향소를 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럴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그분의 음성이 들렸다.
“우리 시인이여, 계십니까?”
그분은 취해 있었다. 내가 그분의 몸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방문턱에 걸려서 넘어졌을 게다. 그런 몸으로 어떻게, 소주 큰 병을 떨어트리지도 않고 들고 왔는지 놀라웠다.
내가 주인 집 부엌에서 갖고 온 김치를 안주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분이 먼저, 딸꾹질을 하면서 말씀하였다.
“나는 말입니다,(딸꾹) 이번에 시인이야말로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직관의 소유자임을 통감했습니다. 어떻게 10․26 같은 큰 사건을 직감할 수 있었는지요! (딸꾹) 돌아가는 정국에 항상 관심 많던 내가 정작 이번과 같은 중요한 사변은 예측조차 못했다니, 정말 스스로 실망감이 커서 (딸꾹) 허탈합니다.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키도 작아 볼품도 없는데 (딸꾹) 단지 교사 자격증 하나로 버티는 인생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자조밖에 없는 거죠.(딸꾹) ……오늘밤 내가 시인을 찾아온 것은 이런 푸념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질문할 게 있어서입니다. 시인이여,(딸꾹)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보름 가까이 대면조차 꺼리더니 자학적인 말씀에 질문까지. 나는 술기운을 빌려 답했다.
“얼마나 지겨운 장기 집권이었습니까? 십팔 년이라니,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한 세월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지겨움이 극에 달하여 이번에 궁정동 사건으로 나타났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중앙정보부장도 지겨웠던 겁니다. 어쩌면 박 대통령 자신도 지겨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겹다고 끝낼 대통령 자리는 아니기에, 궁정동 사건처럼 모두 술에 취한 가운데 끝장나기를 바란 게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지겹지 않은, 다른 세상이 전개될 겁니다. 그 세상은 누군가 매서운 눈길로 국민을 살펴보는 일 없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세상이 아닐까요?”
술기운 탓인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무렴, 박 대통령 자신도 지겨워서 끝내고 싶었을까? 어쨌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감하였다.
나는 이런 질문도 하였다.
“그 지겨운 장기 집권자가 세상을 떴다는데, 어떻게, 모두들 두려워하면서 분향소를 다녀올 수 있을까요? 정년이 일 년밖에 남지 않은 박 주사까지 기를 쓰며 분향소를 다녀오다니, 이런 낮은 민도라면 다가올 자유로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