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前提)’란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 이루어지도록 먼저 내세우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국가발전을 위한 치밀하고 대단한 계획이 짜인들, 국민이 줄어들면 다 헛수고인 것이다.

국민은 영토, 주권과 함께 국가의 삼 요소 중 하나인데 지난 6,70년대 눈앞의 인구과밀 현상만 보고 당시 정부에서 산아제한을 주요정책으로 강력히 추진했다. 국민의 수를 줄이는 바보 같은 정책이었다. 그 결과 머지않아 닥칠 인구절벽 사태에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젊은이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하게 될지도 모른다니 기가 막히다.

국가는 영토, 주권과 함께 국민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망각한 탓에 크나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겨울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해도 얼음이 얼지 않으면 무위한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얼음 어는 추운 날씨는 하늘에 달려 있다. 머지않다는 인구절벽 사태야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하겠지만, 요즈음 위기에 처한 겨울축제들은― 그 지역의 주민들과 담당 공무원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얼음 어는 일 또한 어떤 일의 전제였다는 사실에 기가 막힐 뿐이다.

 

부디, 겨울축제를 준비한 지역에서만이라도 강추위가 엄습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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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섬뜩한 일이 생겼다. 새끼가 결석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시험기간 중에는 책걸상 배열을 다시 해 출석번호순으로 앉기 때문이다. 예전의 창가 자리로 내 자리가 배정되었기에 공교롭다는 생각으로 ‘그럼, 새끼는 어느 자리에 앉나?’둘러보았더니 끝내 보이지 않고 다만 교탁 부근 자리 하나가 빈 채로 1교시 시험이 치러지던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새끼가 결석한 자리였다.

2교시에도 새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닷새간의 기말고사가 끝났다.

‘그 동안 시험공부 하느라고 고생들 많았다’는 뜻인지, 3교시로 시험이 종료되자 정상수업으로 잇는 일 없이 그대로 일과를 끝냈다.

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이번에도 잘 치른 시험 같지 않았다.

시골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6년 간 1등을 놓치지 않던 나다. 반장도 도맡아 했다.

예전에는 그랬었다.

‘완전 정복’‘필수’ ‘정석’‘에센스’등 갖가지 제목의 참고서나 문제집으로 터질 듯한 책가방을 들고서 교문을 나선다.

이제는 교복바지도 예전처럼 평범한 바지로 환원시켜 놓았다. 머리도 다시 빡빡 깎아 버렸다.

내 그림자를 끌고서 하숙집으로 향하는 발길.

머리가 지끈거린다. 요 며칠 간의 벼락치기 공부에 몸살이 난 걸까?

한낮의 산동네는 적막하다. 하숙집으로 들어와 세수도 않고 그냥 방에 누워 버렸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 이마에 열도 나는 것 같다.

어떡하나.

갑갑한 마음에 상체를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에 공설운동장이 침몰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거선의 돛대처럼 한구석에 서 있는 ‘바람 불던 밤’의 그 미루나무. 그 너머, 새끼가 자취하는 동네 풍경.

새끼가 병으로 자퇴한단다.

담임한테 학급일지를 도장 받으러 교무실에 갔다 온 주번 애가 전한 사실이다. 햇살에 눈부신 공설운동장이 달빛이 넘치는 야산 풍경처럼 보이더니 수컷 승냥이가 등장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암컷들을 쫓는 승냥이의 음산한 잿빛 눈, 바람에 찢기듯 날리는 갈기, 드러낸 흰 이빨들, 그리고 마침내 그 부분이 썩어가고 있었다.

“매독 걸린 승냥이…….”

나는 창문을 닫고 다시 누웠다. 몸에 오한이 심해지며 낮은 하숙방 천장이 오르락내리락, 시작했다. 나도 공설운동장을 따라 침몰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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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는‘승냥이’가 되었다.

미친년을 집단으로 빠구리 놓던 그 날 밤 이후 얼마 안 지나 양아치들이 새끼한테 붙여주었다는 별명 ‘승냥이’.

나는 그 날 밤 이후 창가 자리에서 복도 쪽 자리로 옮겼으므로 그런 새끼에 관한 소문은 다른 반의‘깡’ 있는 애들한테서 들었다. 원래 제멋대로 자리를 바꿀 수 없지만 새끼와 가까이 있기 두려워 복도 쪽의 애와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그 애는 ‘햇살 따듯한 창가 자리’라며 좋아했다.

만일 담임선생이 뭐라 한다면 그 애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따듯한 자리에 앉았으면 했거든요.’이라고 둘러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담임선생은 뜻밖에 별 말이 없었다. 바빠서인지, 아니면 학생들끼리 자리 바꾼 것도 모를 만큼 무심한지, 둘 중 하나다.

내가 멀리 떨어져 앉자, 새끼가 점심시간에 와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새끼 얼굴을 마주보기도 두려워, 식곤증으로 졸린 듯 반쯤 눈감고 말했다.

“기말고사를 잘 봐야 하거든. 눈부신 창가 자리보다는 여기가 공부 집중이 잘 되겠더라고. 고향 부모님이, 지난 번 중간고사 성적이 엉망이라고 하도 난리를 쳐서…….”

둘러댄 말이지만 반쯤은 맞는 말이다. 새끼가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돌아설 때 그 등에 대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당분간 공설운동장에도 못 나갈 것 같다야.”

며칠이 지났다.

교실 창가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달라졌다. 초가을 때에는 1교시 전부터 강하게 들이쳤는데 이제는 2교시가 되어야 약해진 기세로 스며들 듯 한다.

나는, 남의 자리가 된 그 창가 자리를 넌지시 살피며 그런 변화를 깨달았다. 그렇다. 지학시간에 배웠듯이,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려하면서 해의 고도가 낮아진 탓이다.

학기 초에 비해 확실히 한기가 도는 교실.

특히 오전 시간이 그랬다. 그러자, 추위를 타는 애들이 햇볕을 쬐려고 창가로 쉬는 시간마다 몰려들었다. 물론 나는 그냥 어둑한 복도 쪽 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무심히 창가 쪽을 보다가 새끼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이상하게 빛나던 잿빛 눈동자.

바로‘승냥이’ 눈이었다. 공설운동장의 양아치들이 새끼한테 딱 어울리는 기막힌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암컷의 맛을 본 뒤 발정 난 승냥이.

잠시 후, 새끼는 두 눈을 감고서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 베개처럼 만든 뒤 엎드려 자는‘쉬는 시간 10분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잠’에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쪽잠을 자는 새끼의 모습.

혹시 밤늦도록 빠구리 놓느라 밤잠을 설친 게 아닐까?

 

그 짐작이 맞았다.

새끼는 공설운동장의 색골 ‘승냥이’로 소문이 났다.

공순이건 식모건, 일단 접근하면 거의 백 퍼센트 ‘당일치기’에 성공한단다. 생각지도 못한 새끼의 놀라운 변신이다. 자신도 몰랐던 잠재능력을 찾은 걸까?

하긴, 새끼는 촌놈 치고는 잘생긴 얼굴이다. 이태리 무법자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프랑코네로’를 연상케 하는 얼굴인데 흔치 않은 잿빛 눈동자까지 닮았을 줄이야.

그런 매력적인 외모에 명문고 학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깡’까지 갖추었으니 어떤 여자이건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예전에 나를 따라서 주위를 살핀 뒤 얼른 ‘그것’을 꺼내어 밤바람 쐬어 주던 장난들을 생각하면― 그런 스릴 있는 장난을 고안해냈다고 새끼한테 가우 잡던 일들을 생각하면 나는 너무 쪽팔리면서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진짜 멸건 놈은 나였다.

나는 그 ‘집단으로 빠구리 놓던, 바람 불던 날’이후로 밤마다 내 하숙방의 창문을 담요로 가리고 지낸다. 공설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으로 방의 불빛이 내비치면 걔들이 나를 찾아올까 두려워서다.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혹시 누가 저를 찾아오면 무조건 어디 가고 없다고 얘기 좀 해 달라.’는 당부도 단단히 해 놓았다.

양아치들이야 굳이 나를 찾아올 것 같지는 않고 문제는 새끼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때 수시로 내 하숙방에 놀러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방문도 안으로 단단히 걸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일이 없는 새끼.

그래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여하튼 해가 져서 서쪽 동네에서 생겨난 시커먼 땅거미가 스믈스믈 우리 산동네까지 기어 올라오면 나는 창을 담요로 가리고 방문까지 잠근다.

창문을 열면 거대한 어둠의 궁전처럼 가슴 뛰게 하던 공설운동장의 밤 풍경을 잃었다.

다른 먼 동네로 하숙을 옮겨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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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는 개그맨이다.

 

서울에서 방영되는 TV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 지방의 TV 프로그램에서는 낯을 보인다. ‘웃찾사’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는 지방 TV이라 그가 하는 일은 취재 프로그램에서의 리포터 역할 정도이다. 사실, 그가 다른 일반 리포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변이 없을 것 같다. 요즈음 리포터들 중에는 개그맨 못지 않게 재미나게 진행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개그맨이라 인식하는 것은, 방송국 측의 특별한 대우에 근거한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개그맨 ○○○’라고 작은 글자를 화면 아래에 병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대우가 없다면 아무도 그를 개그맨이라 고 봐 줄 이유가 없을 듯싶다.

 

‘개그맨으로 출세하고 싶은 사람’이 여의치 않아서  지방 TV 방송국에 속해서라도 노력하며 지내는 게 아닐까?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그는 딱한 개그맨이다. 인터뷰 취재를 재미나게 진행하려 애쓰지만 억지웃음에 가까워,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으니 말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푸념까지 했다.

 

“저 사람, 라면 값이나 벌까?”

 

사실 시청자 혼자만의 독백이라 해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지방 TV에서라도 자기 입지를 마련하려 항상 애쓰는 개그맨에게 마음의 격려는 못해 줄망정 모욕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즉시 반성했다.  

​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나를 감격시켰다.

​

그와 함께 취재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던 여(女) 아나운서가 개인 사정으로 방송계를 떠난다는 날이다. 그녀의 마지막 등장 화면(생방송이다.)에서, 그가 석별의 마음을 꽃다발에 담아 전하다가 그만 엉엉 우는 게 아닌가. 마치 철부지 아이처럼 말이다. 재미난 덕담으로 이별을 장식하려다가, 섭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여 아나운서.

개그맨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울고 있는 그를 달래려고 애쓰는 중에 프로그램이 끝났다.

 

나는 감격했다. 글쎄, 개그맨이라는 사내가 포복절도하게 웃겨서 감격한 게 아니라 애들처럼 우는 모습에 감격했다니 말도 안 되지만, 여하튼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감격했다.

 

서울에서 방영되는 TV들마다, 억지웃음을 유발시키려고 개그맨들이 여간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이상한 복장에다가 이상한 분장, 이상한 억양 등, 그래서 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잘 보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지방의 TV에 소속되어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그를 업신여겼을 게다. 그러나 그가 여 아나운서와 이별할 때 철부지 아이처럼 엉엉 우는 장면을 지켜본 뒤로는 그가 좋아졌다. 얼마나 신선한 울음인가. 각본을 벗어난 울음이 내게 전해주던 그 진한 감동.

 

여전히 지방 "개그맨"인 그는 아직도 시청자들을 웃기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나는 정겨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며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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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바람이 불었다.

밤공기가 차가와져 공설운동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었는데, 그 날 밤 바람까지 불자 양아치들과 우리와 ‘미친년’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년이 공설운동장 한 구석에 선, 오래 된 미루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가마니 한 장을 바람막이 삼아 두르고서, 둘레가 두 발이 넘는 그 미루나무를 벽처럼 등 뒤로 기댄 채로였다.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며칠 전부터 공설운동장을 맴돈다는 년. 년을 훤한 낮에 보았다는 누군가의 귀띔에 의하면 인물도 좋다고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런 대로 옷가지들도 정갈하게 차려입은 년. 산발에 짝짝이 신발만 아니었더라면 정상인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연에 미치면서…… 가출한 게 아닐까?

년은 자기를 에워싼 우리 패거리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간간이 소리없이 웃었다. 물론 어두운 밤이라, 년의 흰 치아들이 ‘씨익’모양 짓는 것을 보며 짐작했다.

양아치들 중 한 녀석이 년이 두르고 있는 가마니를 뺏어 땅바닥에 깐 뒤, 년의 상체를 잡아 눕혔다. 그래도 연실 웃는 년.

마침내 녀석이 허겁지겁 바지를 내리더니…… 년의 치마를 벗기면서 덮쳤다.

짐승의 신음소리를 내면서 하체를 격하게 움직이는 녀석. 내 옆에서 ‘꿀꺽’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새끼였다.

“아흐응 아흐으으흥…….”

년이 고양이 소리를 내며 녀석과 한 덩어리 몸이 되어 퍼드럭거렸다. 그런 어둠 속 광경을 에워싸고 있는데…… 다른 양아치 녀석이 자기 바지의 혁대를 풀면서 ‘두 번째 타자’로 뛰려는 채비다.

공설운동장에 바람이 거세지며 미루나무 잎들이 무수히 떨어져 날렸다.

그 중 두어 잎이 년을 덮친 녀석의 허연 엉덩이에 떨어졌다가, 격렬한 엉덩이 움직임 탓에 이내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얼마 후 그 녀석이 ‘끄응!’외마디 소리를 내며 기절한 듯 년의 몸 위에 엎드려 있자, 두 번째 타자로 준비하고 선 녀석이 이런 말을 하며 나섰다.

“내 차례야.”

첫 번째 녀석이 바지를 추스르며 물러나고 두 번째 그 녀석이 하체를 허옇게 드러내고 자빠져 있는 년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이 ‘뒷다리들을 쩍 벌리고 죽어 자빠진 개구리한테 달려드는 가재’와 똑 같았다.

여기저기서 바지의 혁대를 풀면서 다음 순서를 차지하려는데 그 때 내 옆의 새끼가 뇌까렸다. 분명한 발음으로.

“이번에는 내 차례.”

끼득끼득 웃으면서 양보하는 양아치들.

나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려운 오줌이라도 누고 오려는 듯 구부정한 자세로 물러나…… 바람 휘몰아치는 어둠 속을 걸었다.

공설운동장을 벗어났다.

그 때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늑대의 울음처럼 도시의 밤하늘에 퍼졌다.

“으허엉으허엉…….”

구불구불하고 비좁은 산동네 골목으로 해서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방의 불도 안 켠 채 옷을 갈아입고는, 방문 고리를 안으로 잠근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억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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