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가 한 달에 한 번 혈압 약을 사러 들르는 약국의 약사다. 30대 후반 나이로 보이는데 아주 성실하다. 너무 성실해서 마치 로봇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손님의 처방전을 받자마자 컴퓨터에 내용을 입력한 뒤 해당 약을 찾아 봉투에 담아 주는 일련의 동작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것이다.

 

지난 휴일에 영화 보러 영화관에 갔다가 라운지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약국에서‘흰 가운을 입은 로봇’처럼 근무할 때와 다른 아주 편한 점퍼 차림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눈길이 닿지 않는 다른 곳으로 갔다. 왜냐면, 모처럼 편하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 또한 약사 앞의 손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데도 아니고 영화관에서만은, 누구나 마음 편하게 영화를 봐야 할 자유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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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읍으로 돌아온 뒤의 얘기는 사실, 회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 미술반은 단 한 아이도 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뜻밖의 참담한 결과였다. 돌아온 이틀 후, 특상부터 가작까지 입상자들 명단이 학교 이름과 함께 백 명 넘게 일간 신문에 실렸는데 단 한 명도 우리 학교 미술반은 뽑히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다.

  입상자 명단 발표 후 우리는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분이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갔다 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몸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도 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는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미술실에 모였다. 나까지 다섯 명이 출석했다. 한 명은 몸이 아파 조퇴했고 다른 한 명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꺼내놓지도 않고 앉아 잡다한 얘기들이나 나누었다. 그분에 대한 소문부터 재미있게 본 만화 얘기, 어느 반 화장실 벽에 그려져 있다는 이상한 그림 얘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고 있었다. 십여 분 지났다. 앞쪽의 미닫이문이 반쯤 열리더니 교무과장 선생님이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데, 운동장 조회 때 사회를 보다가 순서를 바꾸거나 할 말이 안 떠올라 허둥대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선생님은 문도 다 열지 않고 복도에 서서 얼굴만 미술실 안으로 들여놓은 모양으로 우리한테 말했다.

  “여기 미술반 맞지요? 내가 당분간 미술반 담당입니다. 뭐 미술이라는 게…… 뭔가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각자 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고, 여하튼 떠들지만 말고 조용히 그림 그리고 있으면 됩니다. 알았죠?”

  ‘알았죠?’에서 이상하게 높아진 그분의 어조에 우리는 겁먹고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이번에는 어조를 바짝 낮추어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내가 교무실에 있으면서 가끔씩 여기를 와서 살펴볼 겁니다. 그 때 아무 것도 안 그리고 장난치는 새끼는 각오해! ……알았죠?”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반쯤 열었던 미닫이문을 다시 닫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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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우리는 높은 지대에 사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겠다. 우리 춘천에 ‘국사봉’이라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다. 이 동산의 해발 높이가 203미터다. 그렇다면 춘천 시민들 대부분이 해발 150 내지 180미터 높이의 지대에서 산다는 얘기인데…… 해발이란 인천 앞바다의 수면을 0으로 기준한 거니 ‘150 내지 180미터 높이’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어릴 적에 학교 운동장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해 봤을 텐데 그 거리의 두 배도 되지 못하는 높이다.

만일 서해에서 엄청난 해일이 나 바닷물이 내륙으로 밀려든다면, 우리 춘천에서는 어느 곳으로 피신해야 안전할까? 국사봉 정도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대룡산 꼭대기라면 괜찮을 듯싶다. 해발 899미터나 되는 높은 산이기 때문이다.

바삐 사느라 잊고들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 춘천은 대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저 멀리, 어머니 품 같은 대룡산이 봄날을 맞아 나날이 초록빛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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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 되면서 우리는 성당 마당을 떠났다. 그 때부터는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망가졌다는 다리 위에 모였다. 읍내 전경이 보이는 명당자리 성당을 떠나 그런 망측한 장소로 옮기는 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껏 짐작한 게‘밤나무에 밤송이들이 달리기 시작하니, 그게 떨어져서 우리가 다칠까 봐 그러는가 보다’였다. 그분의 생각은 달랐다.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마당의 시각을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 달 뒤, 덕수궁 그리기 대회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다.

    망가진 다리 위는 나무그늘이 없어서 각자 모자를 쓰고 와야 했다. 다리 위에서는 읍내 풍경의 옆과 앞모습이 보였다. 성당 마당에서는 주로 지붕이나 옥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건물의 벽이나 담 등,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마당에서 그리기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가까운 데 있는 펌프를 찾아 물을 마셨다. 다리 위는 그렇지를 못해 물병도 각자 갖고 와야 했다. 다리 위는 여러 모로 그리기 활동에 불편한 장소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불편이 한 달 만에 마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마침내, 시월 초에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는 모 ‘신문사 주최 전국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에 우리 미술반 명단을 보내면서 망가진 다리 위의 활동을 마감했다.

    대회 날까지는 한 주가 남았다.

    미술실에서 대회를 대비하는 총 정리에 들어갔다. 3월부터 9월 하순까지 매주 이틀씩 그리기를 한 결과물은 대단해서, 그 동안 쓰인 스케치북이 일인당 여덟 권씩 되었다. 스케치북의 낱장마다 그분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혼합 색이 되도록 애써 가르치고 고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햇빛에 고요히 잠겨있거나 간혹 구름 밑에 깔려있던 갖가지 읍내 풍경들이 피땀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분한테 지적 받은 부분을 다시 연습해 보는 일로 9월의 마지막 주를 보냈다.

    출전의 날이 왔다.

    새벽 다섯 시 서울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는 새벽 네 시 반까지 시외버스 대합실로 모였다. 전국에서 쟁쟁한 애들이 참가하는 그리기 대회라 생각하니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 모두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이고 기성회장님까지 나와 있었다. 기성회장님은 ‘사이다 한 박스를 버스 짐칸에 넣어 두었다.’고 그분한테 일러주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도 허연 얼굴로 고개 숙여, 배웅 나온 모든 분들께 인사드렸다. 정작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분까지 여덟 명인데 배웅한다고 나온 어른 분들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부모님들까지 따라 나온 때문이었다. 대합실이 좁아 밖으로 나와 선 어른 분들은 추워서 몸을 떨기도 했다. 새벽이면 냉기가 도는 가을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 보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렁크렁’ 엔진 소리를 내며 버스는 어둠 속 거리로 출발했다. 밤잠을 설친 탓에 얼마 못 가 모두들 녹아떨어진 채, 버스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서울로 가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걸려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침식사를 한다고 눈에 뜨이는 식당부터 찾아들어갔는데 차멀미가 가라앉지 않았다. 밥공기를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먹고 남겨도 좋습니다. 내가 이따가 빵을 살 테니까, 그 빵이라도 먹으면 되는 거지요. 오늘 여러분은 그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면 됩니다.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린다는 애들은 모두 온다지만…… 여러분 정도로 열심히 그린 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긴장만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저 성당 마당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 중 한 아이가 물었다.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원,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그분은 껄껄껄 웃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덕수궁 안은 전국에서 모여든 그리기 대회 참가 어린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 학교의 전체 어린이 숫자인 천 명에 가까울 듯했다. 그분이 대회본부에서‘참가 어린이 이름표’를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왼쪽 가슴에 달고서 각자 흩어져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주어진 화제는 ‘가을 풍경’이었다. 그분은 내 곁에 와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리면 된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건물 주위로 단풍든 나무들이 있고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도 두어 점 떠 있으니, 이게 바로 ‘가을 풍경’이 아니고 뭐냐?”

   ‘아하, 이래서 읍내 건물들의 앞이나 옆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리도록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리기 활동을 했었구나!’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소 비현실적인 화가의 풍모를 갖췄지만 우리 미술반 지도에 있어서는 그토록 치밀하고 철저할 수가 없는 그분이었다.

    전국적인 대회라 해서 참가 어린이들만 대회장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솔한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까지 들어와서 김밥이나 사이다를 먹으면서 참가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어른 분들이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특상 감’이라느니 ‘맡아놓은 당상’이라느니‘소년 화가’라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분 역시 간간이 내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고개 들고 보지 않아도 그분만의 독특한 체취랄까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리기에 몰입하는 제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녀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역량을 대회본부의 확인 도장이 구석에 찍힌 켄트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대상으로 삼은 건물이 석조이지만 잿빛을 기본 바탕으로 칠해 놓고 부분적으로 흰색이나 검정색을 보탠 뒤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면서, 석조 건물 자체의 명암에 따른 입체감 살리기에 힘썼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 즈음에는 어른 분들이 와서 탄복하는 소리들이 내 귓전으로 계속 들렸다. 마침내 나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본부석으로 향했다. 마감시간이 오 분 남짓 남아서, 그림을 제출하려는 애들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 그림을 엿봤더니 유치한 수준이었다. 덕수궁 건물들을 엉성하게 그려놓고 여기저기서 노는 애들 모습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결같은 단색이었다.

    나는 그림을 제출한 뒤 약속 장소인 분수대 물개 상 앞으로 갔다. 그분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애들도 와 있었다.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분수대 주변에서 모이거나 떠나느라 소란스러운데도 그분의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분은 말했다.

   “나 참, 버스에서 사이다 박스를 내린다는 것을 잊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출장비 받은 게 많으니까 사이다를 두 병씩 사 주마. 그깟 놈의 사이다가 문제냐, 우리 미술반 모두가 상을 휩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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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그분은 내 그림을 지도할 때는 다른 애들 것보다 더 오래 했다. 단순한 색칠로 끝나지 않고 미묘한 변화를 주는 기교까지 가르쳤다. 예로써 기와집 지붕을 그릴 때 회색 칠로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 연두색이나 노랑을 보탬으로써 ‘이끼 낀 기왓장 느낌’까지 표현하는 기교였다. 밤나무그루도 단순한 암갈색 칠로 끝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흰색을 보태어 검지 끝으로 문지르면 ‘햇살을 한 쪽으로 받는 밤나무그루’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 그렸으나 아무래도 내 그림만큼 되지는 못했다. 성당 마당으로 놀러왔던 어른들도 내 그림을 보게 되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했다. 나는 말없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인자라는 자부심으로 벅찼다.   

   사실, 나는 전학 오기 전 다닌 교대부속초등학교의 미술반에 선발된 과정부터 남달랐다. 그 도시의 여럿 초등학교 중 그 학교만 별나게 입학시험을 치러서 어린이들을 골라 받았는데 나는‘미술반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된 어린이’였다. 간단한 읽기 쓰기 셈하기 그리기 달리기를 과목으로 한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로 불합격되었던 내가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간신히 입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골로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방과 후에 미술반에 남아 한 시간씩 그리기를 했었다. ○○시 교육청 주최 그리기 대회에서 내 그림이‘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전학 온 뒤, 그리기 활동도 없이 평범한 어린이처럼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미대 출신의 그분을 만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참이었다.

    그 당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는 나처럼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된 애가 더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두 같은 경우였는데 창피해서 말들을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건부 입학이란 원죄로 어린 우리는 고생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고생하는 노력 끝에 빛을 보는 게 아닐까? 고진감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나는 바야흐로 숱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들을 쌓은 더미 위에서 전국적으로 빛을 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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