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그분은 내 그림을 지도할 때는 다른 애들 것보다 더 오래 했다. 단순한 색칠로 끝나지 않고 미묘한 변화를 주는 기교까지 가르쳤다. 예로써 기와집 지붕을 그릴 때 회색 칠로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 연두색이나 노랑을 보탬으로써 ‘이끼 낀 기왓장 느낌’까지 표현하는 기교였다. 밤나무그루도 단순한 암갈색 칠로 끝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흰색을 보태어 검지 끝으로 문지르면 ‘햇살을 한 쪽으로 받는 밤나무그루’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 그렸으나 아무래도 내 그림만큼 되지는 못했다. 성당 마당으로 놀러왔던 어른들도 내 그림을 보게 되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했다. 나는 말없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인자라는 자부심으로 벅찼다.
사실, 나는 전학 오기 전 다닌 교대부속초등학교의 미술반에 선발된 과정부터 남달랐다. 그 도시의 여럿 초등학교 중 그 학교만 별나게 입학시험을 치러서 어린이들을 골라 받았는데 나는‘미술반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된 어린이’였다. 간단한 읽기 쓰기 셈하기 그리기 달리기를 과목으로 한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로 불합격되었던 내가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간신히 입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골로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방과 후에 미술반에 남아 한 시간씩 그리기를 했었다. ○○시 교육청 주최 그리기 대회에서 내 그림이‘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내가 전학 온 뒤, 그리기 활동도 없이 평범한 어린이처럼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미대 출신의 그분을 만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참이었다.
그 당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는 나처럼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된 애가 더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두 같은 경우였는데 창피해서 말들을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건부 입학이란 원죄로 어린 우리는 고생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고생하는 노력 끝에 빛을 보는 게 아닐까? 고진감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나는 바야흐로 숱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들을 쌓은 더미 위에서 전국적으로 빛을 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