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이 끝났다. 5학년이 시작되는 삼월 초 어느 날 그분이 나타났다.

연세가 오십 돼 보이는 담임선생님과 달리 그분은 삼십도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젊은 분이었다. 그분이 나타난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여자애들은 교실 뒤쪽 빈자리에서 노래 부르며 공기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책걸상 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 싸움을 하는데 낭랑한 어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그런 소란을 제압한 것이다.

애들이,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나와 앞쪽 출입문 가에 서 있는 그분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에,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라서 선생님인 듯했는데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에…….”

뒤늦게 대답을 하며 나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분은 허연 얼굴에 빛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냐?…… 나 따라 와라.”

다시 소란해지는 교실을 뒤로 하고 나는 그분을 따라갔다. 복도에서 쿵쾅쾅 뛰어다니던 애들이 그분 몸에 부딪쳤다가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애들은 낯선 선생님한테 끌려가는 듯한 나를 의아한 눈길로 보며 얼핏 내 손이나 옷을 잡았다가 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본관 끝에 있는 미술실로 나는 따라 들어갔다. 그 때 수업 시작종이 울었다. 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분은 예의 낭랑한 음성으로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네 반 담임선생님께 말해 두었다.”

겨우내 방치한 미술실로 알고 있는데 (연료를 아끼느라 그랬는지 겨울로 들어서면 교실 아닌 특별실들은 그냥 문 잠가버리던 시절이었다.)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따듯하게 피워져 선생님 책상 가까이 놓여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내가 지난 학기 미술시간마다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그림들 중 세 장이 놓여 있었다. 그분은 의자에 앉더니 그 중 하나를 들면서 내게 물었다.

네 그림, 맞지?”

.”

전학 왔다며? 그래, 먼저 학교를 다닐 적에 그림 그리기를 많이 했나 보지?”

나도 모르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시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미술반을 했거든요. 거기서 매일,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남아 한 시간씩 그림 그렸습니다. 그런데 작년 구월에 아버지가 여기 군청으로 전근 오면서 모두 이사 오게 되어, 전학 온 겁니다.”

그분은 그럼 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 특활반을 정할 때 미술반에 들 거지?”

아직 새 학년도의 특활반을 정하지 않은 때였다. 다음 주에 정할 듯싶었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내가 미술반을 맡아 가르칠 거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보자.”

그분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미술실을 나왔다. 나올 때 미닫이문이 겨우내 안 쓰인 탓인지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밀다가 잘 안 되어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야 했다. 그럴 때 그분이 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창가의 햇빛을 뒤로한 모습이라 웃는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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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에 전학 간 첫 날, 담임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 어느 특활반에 가고 싶냐?”

미술반입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미술반은 이미 인원이 꽉 차서 안 되니까…… 독서 3반에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시의 그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라는 걸 모르시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럴 만했다. 담임선생님이 받아든 내 생활기록부에는 특활부서: 미술반이란 정도로 극히 간략하게 쓰여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어린 나는 뭐라 해명할 엄두도 못 내고 풀죽은 목소리로 네에.’하고 답했다.

독서 3반은,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 모여서 아무 책이나 한 시간 동안 묵독하는 반이었다. 원래 한 반이었는데 희망 인원이 넘쳐나 독서 1,2,3으로 나뉘었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뿐이라는 미술반역시 각자 알아서 아무 그림이나 그리다가 종치면 끝나는 반이라 했다. 그런 식으로 특별활동에 관심 없는 학교라면 나의 특출한 그림 솜씨는 드러날 수가 없었다.

학급에서 교과학습으로 하는 미술시간마저 담임선생님이 미술교과서를 읽고 풀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시골학교에서 내 그림 솜씨는 영 빛을 못 볼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났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처음으로 국화 몇 송이가 담긴 꽃병을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한 장씩 그려 내거라.’ 하였다. 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줄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그려 제출했다. 담임선생님은 놀랐다. 어린이의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햇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무슨 사무를 보느라고,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주변의 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내 그림이 교실 뒤의우리 솜씨란에 게시됐다. 다른 애들 그림도 게시됐지만 내 그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꽃병의 명암까지 살려 다채롭게 색을 쓴 데 비해 다른 애들의 그림은 단색으로 꽃병 모양이나 가까스로 그려낸 정도였다.

그 날부터 나는 아주 그림 잘 그리는, 전학 온 아이가 되었다. 미술시간이 교과서 수업 대신 실제로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바뀌면서, 내 그림들 중 두 점이 교실 옆 복도 벽에까지 붙여졌다. 담임선생님은 내 그림 솜씨에 늘 감탄했지만 정작 그리기를 잘하는 분은 아니었다. 칠판에 백묵으로 어떤 물건을 그리며 설명할 때 보면 원근법에도 맞지 않고 명암도 엉망이었다.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담임선생님보다도 낫다고 속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저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한 번쯤은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담임선생님이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분이 못 되었다. 단지그림을 잘 그리는 어린이가, 내가 맡은 학급으로 전학 왔구나.’하는 정도로 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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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漠이 자고 나온 용문객잔에 나그네 들다. 보따리 생각 맡겨 놓고 마시는 외로움 그 독한 술. 客愁 일으키다가 쓰러지다. 日常의 뼈 발라낸 주방장, 言語들을 삶는다. 들이닥친 포졸들, 여주인 마음잡지 못해 흩날린다. 背景 삼아 빌린 바람 밤새 분다. 虛僞의 칼부림 피비린내 가득한 記憶. 잘생긴 뜻 하나 살아남아 여주인 情慾 촛불로 나부끼다. 벗은 속곳 새벽하늘 분홍빛 感性. 여전하게 뒤척이는 雜念. 다시 식칼 잡은 주방장. 검붉은 피 뿌리며 햇살 모가지들 사방에 나뒹굴다. 여주인 남은 숨결로 불타오르는 용문객잔. 사막은 넋을 잃어 하얗게 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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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길로 외갓집을 나왔다. 먼동이 트는 새벽에 동네 안 길이 아닌, 뒷동산 오솔길로 해서 동네를 떠났다. 외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 날 밤 저지른 일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전개될 듯싶은 불길한 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그렇듯 춘천으로 새벽같이 달아나는 방법을 택했다. 개학은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다. 뒷동산을 넘을 때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깐 멈춰 서서 외갓집을 비롯한 희망리 온 동네를 돌아보았다.

 

 

‘“꼬끼요오!”

닭울음소리들이 여기저기 나며, 굴뚝들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밥 짓는 연기들. 초가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기와집이 있는 그 평온한 풍경.

그의 황급한 처지와 비교되던 평온한 풍경이라니…….

 

 

그 후 그는 왠지 외갓집에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장 45년간이나 발길을 끊었

.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함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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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가을, 밭에 있는 수도의 물을 빼 놓았다.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 때 함지박 가득히 물을 채워뒀다. 

오늘, 봄 농사를 준비하려고 오랜만에 밭에 갔다 . 밭의 수돗가에 있는, 함지박의 물이 얼어 큰 얼음덩이가 됐다. 이 봄에 남은  "지난겨울 한 덩이" .   사진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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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02-2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얼음 한 덩이. 그것을 ‘지난 겨울 한 덩이‘로 환치하니, 느낌이 완전히 새로운데요... 무심 선생님은 무심치 않은 것 같습니다. ^ ^

ilovehills 2017-02-2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중요한 일은 무심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유심하다 하여 저를 잘 아는 지인이 붙여준 호가 ‘무심‘입니다. 평생 호를 붙여본 일이 없었는데 ‘무심‘이란 호를 받는 순간 딱 마음에 들더라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