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그것은 주변 사물에 대한 놀라움이다. 늘 하늘에 떠 있는 별이지만 왜 저 별이 떠 있는지, 놀라운 눈길로 쳐다볼 때 철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을 경이라고 하는데”

하면서 칠판에 ‘驚異’라고 백묵으로 휘갈겼다. 얼마나 격렬하게 휘갈겼는지 백묵이 부러지기도 했다.

“이것을 영어로는 'WONDERING'이라 한다. 아아, 원더링!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얼마나 원더링한가?”

그분은 쉬는 시간 십 분도 무시하고 계속 백 분 간 혼자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첫 강의를 마쳤다. 강의를 끝내면서 엄포성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여러분이 교재의 제 2장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각자 예습한 것을, 나와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일인당 십분 내외로 발표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러나 만일 처음부터 발표 희망자가 없거나, 발표자가 있다 해도 다음 발표자로 이어지지 않을 시에는 작년 방식대로 출석번호 순으로 나와서 발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차 알립니다.”

그 분이 강의실을 나가자, 남학생들은 ‘젠장, 괴상한 원더링 교수를 만나서 매주 두 시간씩 욕봤다!’며 탄식들이나 하는데 잔꾀가 많은 여학생들은 달랐다. 벌써 해결책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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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는 이렇다.

강의가 시작되면 먼저 학생들이 칠판 앞에 나와 그 날 진도 나갈 교재내용에 대해 자기의견을 보태어 발표한다. 그러면 교수가 다 듣고 나서 총평한 뒤 덧붙여 손수 교재내용도 설명해 줌으로써 강의를 마치는 식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항상 교재내용을 예습하고 발표할 준비도 해야 한다.

처음에 그런 강의방식을 천명했을 때 학우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반발했다. 교재를 매주 예습해 오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학우들이 지켜보는 칠판 앞에서 발표도 한다니? 그분은 ‘머지않아 교단에 설 미래의 교육자들’을 위한 좋은 방법이라 강변했지만,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애송이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닐까?

학우들의 반발하는 소란이 쉬 가라앉지 않자, 그분은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어둑한 얼굴에 흰 치아로 씨익 웃으면서 모두 진정하도록 한 뒤 일부 수정해서 말했다.

“다만, 희망하는 학생들에 한해 앞에 나와 발표하라는 겁니다. 작년에는 말입니다, 앞 번호 학생부터 지명해서 발표시켜 봤는데, 글쎄,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나 잡아 잡수’하며 서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서 올해는 이렇게 발표 방식을 개선해 본 것입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학우들은 박수까지 쳐댔다. 그분은 ‘만일!’ 하고 외쳐서 성급한 박수를 제지한 뒤 덧붙였다.

“발표하는 학생이 없으면 그 때는 제가 일방적으로 출석번호 순으로 발표를 시킬 겁니다. 작년 방식대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발표하는 학생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분은 우선은 첫 시간이므로 당신 혼자 백 분 강의를 강연식으로 열강 하였다. 그렇다, 열강이었다. 얼마나 인상 깊은 열강인지 사십 년 넘은 세월인데도 눈앞에 선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첫 강의의 제목은 ‘철학은 무엇인가?’였다. 그분은 자기 몸을 가리는 교탁을 한 옆으로 밀쳐두고서 마치 일인극의 배우처럼 손짓발짓에 침까지 튀겨가면서 열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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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모든 만남이 소중하지만 바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는 일정한 얼굴과 체구를 갖춘 외형적 존재들을 접촉하는 데 익숙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내력이 반드시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 어찌 만남을 소홀히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이겨낸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일 수 있고, 그 사람은 훗날 인류에 남길 귀중한 정신적 유산을 준비한 위인일 수 있고, 그 사람은 어쩌면 당신을 위기에서 구출해낸 의인일지도 모른다.

혹, 그 사람이 그냥 눈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갈 존재라 해도 ‘만남의 소중함’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수십억 인구 중 방금 나와 유일하게 만난‘인연’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에.

 

과거뿐만이 아니다. 당신처럼 그에게도 앞으로 전개될 미래가 있다. 눈앞의 그가 혹시 실망스런 모습이라도 당신이 그를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다치기 쉬운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처럼 말이다. 당신은 그를‘살며시 부는 바람이 책갈피를 소리 없이 하나하나 넘기듯’정성껏 맞이해야 한다. 그의 마음을 다치지 않는 환대는 그렇게 이뤄진다.

 

이 시의 내용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뉠 수 있다. 전반부는‘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일생이 온다는 뜻이다’는 내용으로, 후반부는‘살며시 부는 바람이 책갈피를 소리 없이 하나하나 넘기듯 그를 정성껏 맞이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간추릴 수 있다. 전후반부 모두,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듯하면서 점층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같거나 비슷한 리듬의 반복이라는 내재율(內在律)과 연관된다.

이 시의 주제는‘만남을 소중히 하자’이다. 정현종 시인은 철학적이고 교훈적일 수 있는 주제를 극히 평이한 언어들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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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짧은 이 시를 보는 순간‘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에 지친 화자가 이제는 그만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들 삶이란 어차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좋으나 싫으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래서 아주 작은 공간이나마 내(화자)가 쉴 수 있는 곳을 그리는 마음이 나타난 거라는 해석이다.

 

우리에게 ‘섬’이란 단어는 어떤 이미지인가? 고립이나 소외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마음 편히 쉬는 곳’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도 분명히 있다. 모든 게 복잡다단한 현시대에 이르러 ‘섬’이 휴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주도라든가 그리스의 섬들이라든가 발리 섬 등이 휴양지나 신혼 여행지로써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충분히 납득될 것이다.

 

그렇기에 복잡다단할 일이 없는 예전에는 ‘섬’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유배지로나 쓰였을 뿐이다.

  

한편,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상략) 시인이 꿈꾸는 섬은 먼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감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꿈이다. 정현종은 ‘무척 외로울 때 이 시를 썼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 섬에 가는 길은 우정이나 연대(連帶)에서 찾을 수 있다. 동시에 홀로 있더라도 시를 읽거나 춤과 음악·그림에 몰입하는 영혼의 항해를 통해 이르는 섬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 사람은 삶의 진짜 알맹이를 실감할 수 있다.(하략)”-박해현/기자, 조선일보 '문학산책'-

 

내 감상과 다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않겠다. 현대시의 맛은 난해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평이하게 해석되거나 정답 같은 감상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한용운의‘님의 침묵’이란 시에서의 ‘님’을 절대자나 잃은 조국으로만 보다가, 근래 들어 실제 연인으로서의‘님’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일로 온 국민이 패닉에 빠졌던 시절, 내게 이 시가 선하게 떠오른 까닭은 아무래도 시 속의 '섬'을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느꼈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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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맡은 과대표 일이란 게 대부분 개강하던 즈음에 있었다. 수강 신청 조절 문제라든가 지도교수를 모시는 자리 주선, 과 회비를 걷기, 같은 과 선배들과의 모임, 사범대학생회와의 연락 관계 등의 일들이 그렇다.

그런 일들로 녀석이 학우들 앞에 서서 뭐라 지시하고 설명하고 권유하는― 언변을 구사할 때에는 예의 검남색 외투차림이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 그런 일들이 마무리 되고 나면 과대표로서 언변을 구사할 일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되면서 ‘괜히 검남색외투 하나 걸치고 거들먹거리는 싱거운 원주 촌놈’인 것이다. 키가 컸으니 분명히 싱겁게 보일 게다. 그렇게 되면, 뒤 따라다니던 몇몇 여학생들도 제풀에 떨어져 버리지 않을까?

그렇다. ‘철학개론’강의 덕분이다. ‘철학개론’강의가 없었더라면 녀석은 그런 꼴이 날 뻔했다. 그 강의 덕분에 녀석은 매주 한 번씩 언변을 과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럼으로써 과대표로서 구축한 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철학개론. 교양필수 과목으로서, 화요일마다 두 시간씩 하던 그 강의. 담당 철학교수는 체구도 작은데다가 간이 안 좋은지 늘 어둑한 낯빛이었다. 대개의 교수들이 묵은 노트나 두꺼운 책을 펴놓고 일방적인 설명식 강의를 진행하는 데 비해 그분은 항상 학생들의 발표를 전제로 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따분할 수 있었던 철학 강좌를 긴장되고 흥미로운 장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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