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녀석이 맡은 과대표 일이란 게 대부분 개강하던 즈음에 있었다. 수강 신청 조절 문제라든가 지도교수를 모시는 자리 주선, 과 회비를 걷기, 같은 과 선배들과의 모임, 사범대학생회와의 연락 관계 등의 일들이 그렇다.
그런 일들로 녀석이 학우들 앞에 서서 뭐라 지시하고 설명하고 권유하는― 언변을 구사할 때에는 예의 검남색 외투차림이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 그런 일들이 마무리 되고 나면 과대표로서 언변을 구사할 일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되면서 ‘괜히 검남색외투 하나 걸치고 거들먹거리는 싱거운 원주 촌놈’인 것이다. 키가 컸으니 분명히 싱겁게 보일 게다. 그렇게 되면, 뒤 따라다니던 몇몇 여학생들도 제풀에 떨어져 버리지 않을까?
그렇다. ‘철학개론’강의 덕분이다. ‘철학개론’강의가 없었더라면 녀석은 그런 꼴이 날 뻔했다. 그 강의 덕분에 녀석은 매주 한 번씩 언변을 과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럼으로써 과대표로서 구축한 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철학개론. 교양필수 과목으로서, 화요일마다 두 시간씩 하던 그 강의. 담당 철학교수는 체구도 작은데다가 간이 안 좋은지 늘 어둑한 낯빛이었다. 대개의 교수들이 묵은 노트나 두꺼운 책을 펴놓고 일방적인 설명식 강의를 진행하는 데 비해 그분은 항상 학생들의 발표를 전제로 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따분할 수 있었던 철학 강좌를 긴장되고 흥미로운 장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