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가 울지 않은 적이 없다.

평이한 줄거리의 <각설탕>을 볼 때도 펑펑 눈물을 쏟았고

<우리개 이야기>, <에이트 빌로우>같은 최루성 영화를 볼 때는

부지런히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야 했다.


그런 걸로는 부족했던 걸까.

<마음이...>란 영화가 나와 버렸다.

지금까지 영화들이 솔바람이었다면 <마음이...>는 태풍이다.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 영화는

울리려고 작정을 한 듯

‘이래도 안 울 테냐?’는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용을 잠깐 보자.

강아지 때부터 기르던 리트리버 마음이가 여동생과 강가에 가는데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여동생이 죽는다

그때부터 남자애는 그 개를 미워하며

마음이를 버린 채 기차를 타고 가버린다.

주인을 따라 철로를 달리는 마음이의 모습은 가슴이 찢어진다

그거 말고도 노숙을 하는 주인공을 몸으로 감싸안는 장면 등

어느 하나, 만만한 장면이 없다

2분 남짓한 예고편을 보는 동안에도 눈물이 주르르 흐르던데

얼마만큼 울어야 영화가 끝날까?

휴지는 도대체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할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각설탕>에서 내가 처음으로 울던 장면은

주인과 헤어진 말이 택시에 탄 주인을 발견하고 열심히 쫓아가던 대목(결국 놓친다)

마음이의 철로 씬에서도 어김없이 눈물이 흐르는 등

추격 장면에 유난히 약한 이유는

거기 얽힌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건원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

휴일날 벤지를 데리고 가서 산보를 시켰다.

근데 이 녀석이 동물냄새를 맡더니-토끼 등-평소와 달리 천방지축 날뛰는 거다

내 시야를 벗어나서까지 설치기에

불러서 좀 야단을 쳤다.

“너, 그렇게 할 거면 혼자 여기 남아! 나 갈거야!”

녀석 앞에서 나 혼자 차에 올라타 정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놀란 벤지는 흰털을 휘날리며 차를 쫓아온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교육이고 뭐고 차를 세우고 벤지를 안아 올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그때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숙이 저장되어 추격 씬 때마다 눈앞에 불려나온다

주인을 찾아 택시를 쫓는 <각설탕>의 말

병원에 입원한 주인을 찾아 먼 길을 떠나는 <우리개 이야기>의 하얀 개

주인이 자신을 버리고 가자 쇠사슬을 끊으려 몸부림치는 <에이트 빌로우>의 썰매개들....

이 동물들은 내게 벤지와의 그때를 연상시켜 날 슬프게 한다.


울 게 뻔한데도 영화를 보려고 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서라도 벤지를 추억하고 싶어서다.

처음엔 다른 개를 보는 것도 피했고

개가 나오는 책이나 영화도 보지 않았지만

이젠 그것들을 두려워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벤지를 마음으로 보내려고 한다.

눈물엔 정화 기능이 있고 정화 능력은 그 양에 비례한다.

벤지에 대한 추억으로 인한 생채기가 워낙 깊어서

웬만한 눈물로는 치유가 안 되겠지만

너무 많이 눈물을 흘려

눈물이 마르는 그날이 되면

마음으로도 벤지를 떠나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막상 <마음이...>를 보려고 하니 무섭긴 하다.

그래서 난 10월 말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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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도 많으신 마태우스님, 벤지에 대한 그런 애틋한 기억이 있었군요. 마음이 보고 극장이 눈물바다 되는 것 아니에요? 전 10월 말(horse)이 무섭다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ㅎㅎㅎ

하루(春) 2006-10-0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예고편 오늘 봤는데요. 예고편만으로 줄거리 다 알겠더군요. 그래서 안 보려구요. 어린 것이 그 어여쁜 개를 학대하는 게 너무 무서워요.

水巖 2006-10-05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나도 개를 키우던 시절엔 전생과 환생이란 말을 믿었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더군요. 다음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조선인 2006-10-05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심만만> 재방? 특집편?을 보다가 지진희씨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랑이 떠나가도 잊으려고 하지 말라고. 마음 한 켠에 쌓아두라고. 잊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라고.
그러니, 마태우스님, 벤지를 잊지 마세요.

비로그인 2006-10-0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나는 제꺼예요.

저도 너무 많이 울까봐서 이런 영화는 같이 못 보겠네요...^^

BRINY 2006-10-0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는 말도 잘 알아들었네요...햄돌이는 지금쯤 빈 집 지키기 잘 하고 있으려나...

LAYLA 2006-10-0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고편보고 엉엉 울었어요. 우행시 보러갔던 거였는데 예고편부터 끝날때까지 운거에요. 이런 예고편은 처음이었어요...마태우스님 좋은 추석되세요~~^^

마태우스 2006-10-07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라님/아, 저만 그런 게 아니군요. 저도 그런 예고편은 처음이었는데... 님도 좋은 추석 보내시어요.
브리니님/벤지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었죠. 차별을 안하려고 해도 머리 좋은 녀석에게 정이 더 가더라구요...
고양이님/추천 감사하구요... 저도 혼자 볼 건데요 뭐.
조선인님/아, 좋은 말이네요. 음, 제가 잊는다는 건 말이죠 정면으로 다른 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벤지를 제가 어찌 잊겠어요...
새벽별님/용기 내서 봐야죠...
수암님/다음 세상에선 벤지가 사람, 제가 개로 태어나면 어떨까싶어요... 벤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낄수 있도록요...
하루님/개 나오는 영화는 줄거리가 아닌, 개를 보러 극장에 가는 거 아닐까요..
배혜경님/눈물바다가 될 게 확실합니다. 가끔은 울어줄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10월의 말이라, 호호.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정희진 선생의 문화강좌를 들을 무렵, 존경의 표시로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를 선물했었다. 선생님이 그 답례로 주신 게 바로 <돈 잘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읽는 내내 짜증을 느껴야 했다. 이유는 바로 남자들 때문. 평소 남자들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지만(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악함이 지나친 것 같아서다.


언젠가 네이버에 이런 기사가 떴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훨씬 증가했음에도 남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시간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는 내용. 거기 달린 남자들의 댓글이 아주 가관이었다. “왜 남자 욕하는 기사만 메인에 올리냐?”부터 “남자가 여자 먹여 살리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집안일까지 해야 하냐?” 등등. “아, 내가 정말 미안하다. 앞으로는 좀 하겠다”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걸까. 왜 우리나라 남자들은 세계와 경쟁할 생각은 안하고 여자 공격하는 것만 낙으로 삼는 걸까.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남자가 뻔뻔한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미국의 맞벌이 가정도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부인이 돈을 더 많이 벌건 적게 벌건, 저자가 관찰한 여러 계층의 가정들은 하나같이 여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이끌어 가는 곳이었다. 일과 직장 모두에서 성공하기를 바랐던 여자들은 남자의 도움을 줄기차게 요구하다가 1) 일을 그만두고 가사를 전담하거나 2) 자기가 다 하면서 “남편도 분담한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3) 그것도 아니면 갈라섰다. 부인이 파트타임으로 바꾸는 등 직장을 희생하는 경우는 있어도 남편이 가사일을 돕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남자들이 집안일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뭘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원래 여자의 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맞벌이의 증가는 여성들이 슈퍼우먼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결혼을 점점 꺼리는 경향도 여기서 비롯되는 듯하다. 참고로 말하면 남자들의 가사일 분담은 전혀 늘지 않았지만, 옛날에 비해 남성들의 TV 시청 시간이 하루 한 시간 이상 늘었고, 수면 시간도 늘었다고 한다. 그러니 여성들이여, 직장 일을 계속할 생각이 있으면 가사 일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결혼 전에 굳게 약속을 하시라. 남성과의 약속만큼 못믿을 건 없지만.


* 어느 분의 지적처럼 나 역시 가사 일을 전혀 안하고 있다. 꼭 가정을 가져야만 가사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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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0-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품절이네요...

하루(春) 2006-10-0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요. 부부관계는 대등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가정이 많잖아요.

비로그인 2006-10-0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궁금해집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라도 찾아봐야겠어요. 더불어서, 저는 수퍼우먼, 안할래요. 둘 다 하기는 버겁고 힘들고, 무엇보다 둘 다 하기는 싫으니까요.

비로그인 2006-10-05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엔 딸만 둘인데 아버지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시고, 어머니가 바쁘시면 저와 제 동생이 번갈아가며 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죠. 동생은 그나마 가사를 즐기는데 전 영 아닌지라... 아버지 밥을 차려드릴지라도 전 굶는답니다;; 귀찮아서-_-;; 고로 (혼자 살 확률이 가장 높은 듯하긴 하지만 만약)제가 결혼하면 식구가 다같이 굶어죽는 아름다운 역사가 탄생할듯-_- 남자 쪽에서 요리를 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듯하므로;;

마태우스 2006-10-07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대생님/그 시절 아버님들이야 다 그러셨죠...문제는 지금 젊은애들도 그런다는 거죠. 애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을 때 중요한 회의를 빠지겠냐는 질문에 남자들 대부분은 참석한다고 한 반면, 여잔 절반 이상이 빠진다고 했다는...
주드님/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이 세상이잘못된 거죠....
하루님/그러게 말입니다...
블루마린님/아 제가 귀한 책을 얻은 게로군요.
다우님/이 책이 미국서 굉장한 반향을 얻었나 보더군요. 울 나라 버젼으로 님이 다시 쓰시면 좋겠는데............

moonnight 2006-10-0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품절이잖아욧. 흑흑. 재미있을 것 같은데-_ㅠ 여성에게만 만능을 요구하다니, 참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
 
첩첩 상식 - 진중권의 시사 키워드 사전
진중권 지음 / 새움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에 관한 서양 농담. 로마에 있던 갤리선 함장이 노를 젓는 노예들에게 말을 합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총독께서 너희를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해주시겠단다.” 노예들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함장이 이어서 말을 했습니다. “다음은 나쁜 소식. 총독님께서 점심 식사 후에 수상스키를 즐기시겠단다.”


저도 농담 한번 할까요? 요즘 국민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정부에서 부동산 관련법을 헌법처럼 고치기 힘들게 확실히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어서 나쁜 소식. 그 약속을 한 정부가 하필이면 노무현 정부라고 합니다]


<첩첩상식>은 진중권이 SBS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쓴 오프닝 멘트를 모은 책이다. 책으로 묶여 나오면 시의성도 떨어지고 성의가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글쓴이가 진중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위에 소개한 내용처럼 책 전체에 저자의 재치가 번뜩이고, 책과 더불어 지난 일년간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을 회고해 보는 의미도 있다.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이...(성추행을 한) 최연희 의원을 변명하는 논리가 재미있네요. “얼마 전 모친상도 당하고 따님 혼사도 치룬 분으로, 속되게 보이는 그런 분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성추행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모친상도 안당하고 딸 시집도 안 보내나 보지요? 그렇다면 성추행범들은 죽지 않는 영생교 교주를 어머니로 모시고, 시집가지 않는 동정녀들을 딸로 둔 사람들이란 얘기가 되는데...]


하지만 평소 시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면 보는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문을 안보기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이 책을 읽는 데 별 지장이 없었던 걸 보면 다행히 내가 사회에서 눈을 완전히 돌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책을 선물해준 미녀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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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10-0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번에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책을 번역했더군요. 저야 관심이 그리 가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나저나 미녀분께서 책을 선물해주셨다니... 좋으시겠어요. 미녀는 아니더라도 누구하나 책 선물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나저나 연휴에도 바쁘신가요?

즐거운 한가위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마태우스 2006-10-0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안녕하셨어요? 진중권이 비트겐슈타인 얘기 많이 인용하죠... 전 어려워서 읽을 생각을 안하고 있다는...^^ 미녀한테 선물을 받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미녀 분께 먼저 선물을 하는 거죠. 그러면...^^ 님도 즐건 한가위 보내세요. 참고로 저도 알라딘 가입 전엔 책선물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답니다

moonnight 2006-10-08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시사에 별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해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좀 있었어요. 흑. 그렇지만 역시, 재미는 있더군요. 추석 잘 보내셨어요? ^^

마태우스 2006-10-10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밤님/저야 뭐.... 더이상 바랄 나위 없을만큼 잘 지냈사옵니다^^ 님은요?
 

 

 

 

 

남들이 다 쉴 땐 일하기 싫다. 연휴의 한가운데 끼어 있는 날, 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늘 역시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 중 한명이 바로 의예과 조교다.


환한 미소로 날 맞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그녀, 덕분에 내 학교생활이 조금은 더 즐겁기에 되도록이면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수요일날 출근 하나요?”

“당연하죠.”

나도 안나올 거고, 학생들도 안나오는데 그녀가 학교를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담? 내 재량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녀는 학교 소속이라 교학과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담당자가 원칙주의자였기에 선뜻 말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봐야 했다. 하루 동안을 미룬 끝에 담당자 앞에 섰다.

“저... 우리과 조교, 수요일날 나오지 않게 해주면 안될까요?”

담당자는 대번에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어요? 제가 이 학교에 근무한지 20년이 넘었는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울릉도 같은 산간벽지에 내려가는 사람만 수요일 오전근무고, 나머지는 다섯시까지 근무해야죠!”


씁쓸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20년 동안 그런 적이 없다는 게 올해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텐데. 지난 20년 동안 아침에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오늘도 안나오는 방귀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비유가 잘못된 거, 안다)? 그래도 내가 인사권자인데, 추석 선물은 못할지라도 그 정도 선심을 쓰게 해줄 수는 없는 걸까? 할 일도 없는데 적막한 학교를 지키도록 해야 속이 시원할까. 결정적으로 그냥 “안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일장 연설을 하는 걸까.


오늘 하루를 제끼고 테니스를 치면서 학교에서 지루하게 다섯시를 기다릴 조교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담당자는 평소 내게 말해 왔다.

“왜 조교들만 이뻐하세요? 나도 밥 좀 사줘요.”

그 답을 지금 드린다. 제 삶이 워낙 대충주의로 점철되어 있어서 그런지 원칙주의자가 옳다는 건 알겠지만 같이 있으면 좀 힘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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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칙주의자 반대말은 대충주의자? ^^ 말은 그리하셔도 일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춤추는인생. 2006-10-0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칙주의자들 미워요..^^

marine 2006-10-0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교분은 MD이신가요? 아니면 일반과?

마태우스 2006-10-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그냥 일반과 나왔지요..
춤추는 인생님/아앗 님도요? 반갑습니다!
배혜경님/그, 글쎄요 제 일에는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ㅠㅠ

산사춘 2006-10-0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도 다 쉬던데... 그나저나 작년엔 빨간날이 다 주말이어서 넘 억울했어요.

멜기세덱 2006-10-0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예과 조교분만 아니라, 여기 이 국교과 조교도 출근을 해야했답니다. 마태우스님 온정이 넘치시는 교수님이시군요...ㅎㅎ

sorinova 2006-10-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분들에게 인기 많으실 것 같아요 ㅎㅎ ... 여기 온지 3년이 넘었는데 처음 글 남기네요... 사실 ... 알라딘 가입도 방금 했어요. 전 yes24쓰거든요 OTL

새우범생 2006-10-0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원칙주의자라고 명명하신 분을 원칙주의자로 보기는 조금 무리인 거 같아요. 제가 가진 정보가 한정되어서 속단하기 힘들다 정도의 의미지만요. 저는 우리 둘레에 원칙주의자가 좀 더 늘었으면 좋겠어요. 대다수 선진국들이 부드러운 융통성보다 답답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건 그만한 효용이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물론 그 ‘원칙’은 쓸데없는 의무를 없앨 때는 민첩하고, 사회적 가치 배분을 왜곡할 때는 신중하려는 태도가 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그 원칙이 지위 고하나 힘의 강약과는 무관하게 일괄 적용된다는 점도 아울러서요. 아마 마태우스님도 이런 원칙주의자라면 흔쾌히 반기시리라 믿습니다. 미력이나마 이런 괜찮은 원칙주의자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저도 쓸데없는 번문욕례에서 희열을 느끼는 고루한 사람들, 지킬 가치가 없는 것에 연연하는 측은한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요.^-^

마태우스 2006-10-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우범생님/그렇죠...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엔 원칙주의자가 너무 없어서 문제죠... 우리가 보는 원칙주의자는 죄다 지킬 가치가 없는 것에만 연연하는 듯...
속삭이신 분/님 서재에 댓글로 달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속삭이신 분/아저씨가 아니라 여자분입니다... 글구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리노바님/안녕하세요? 처음 뵙겠네요 가입 안하고 눈팅만 하셨군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만 좀 인기가 있답니다^^ 그래스물넷에 계시는군요 한번 찾아뵐께요
멜기세덱님/아아 님도 출근하셨었군요.. 지금은 속상함이 좀 풀리셨는지요... 세상이 좀 여유롭게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사춘님/작년의 억울함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더 잘사는 세상이 어서 와야 할텐데요...

 

 

 

 

 

아침에 일어나 약간의 걱정을 했다. 과연 오늘 테니스를 칠 수 있을까. 추석 전날이라 주부들은 다들 바쁠 텐데, 몇 명이나 코트에 나올까. 괜한 걱정이었다. 총 열두명이 나와 코트를 꽉 채웠고, 난 일곱 경기를 알차게 뛰었다. 오늘 따라 테니스가 잘 돼서 한층 즐거웠는데, 내가 잘 되는 것과 승패는 무관해 4승3패의 그저그런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성적은 내 기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일까. 미녀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 때? 그게 정답에 더 가깝겠지만, 오늘만큼은 코트에서 테니스를 칠 때,라고 답을 하겠다. 난 그곳 사람들이 좋고, 그들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이런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우나를 끝내고 갈아입을 옷을 꺼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가방을 필사적으로 뒤졌지만 난 끝내 새 팬티를 찾지 못했다. 그냥 바지를 입을까를 고민하다 결국 젖은 팬티를 입어야 했는데, 그러고 나니 집에 가기까지의 4시간여가 정말 괴로웠다.


행복은 테니스를 치다가도 느껴지는 것이고, 팬티 한 장 때문에 사라지기도 한다. 집에 가니 내가 가방에 넣으려던 팬티가 널부러져 있다. 얄궃은 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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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티 한 장의 행복 *^^* 운동하고 나면 행복한 노곤함, 근육에 불끈 붙는 힘, 좋지요. 마태우스님 황금연휴에요. 전 별다른 일 없이 가족들이랑 보낼 거에요. 종일 먹겠죠.ㅎㅎ 군데군데 널려있는 행복을 주으며 황금 같은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태우스 2006-10-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님 말씀대로 행복을 주우며 보내겠습니다 님도 좋은 시간 보내길 빌께요 운동 후의 노곤함을 즐기는 중입니다^^
다우님/이미 갈아입었습니다. 설마 제가 아직도 그 팬티를 입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지요?^^

로쟈 2006-10-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의 소설 <생은 다른 곳에>에도 팬티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나옵니다. 마태님 버전으로 하면, '팬티는 다른 곳에'...

산사춘 2006-10-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팬티가 평소보다 소중하게 느껴졌을 경험인걸요. 팬티만세~

marine 2006-10-05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니스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다락방 2006-10-0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 정말 얄궂은 팬티로군요.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