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다 쉴 땐 일하기 싫다. 연휴의 한가운데 끼어 있는 날, 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늘 역시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 중 한명이 바로 의예과 조교다.


환한 미소로 날 맞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그녀, 덕분에 내 학교생활이 조금은 더 즐겁기에 되도록이면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수요일날 출근 하나요?”

“당연하죠.”

나도 안나올 거고, 학생들도 안나오는데 그녀가 학교를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담? 내 재량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녀는 학교 소속이라 교학과의 허락을 맡아야 한다.


담당자가 원칙주의자였기에 선뜻 말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봐야 했다. 하루 동안을 미룬 끝에 담당자 앞에 섰다.

“저... 우리과 조교, 수요일날 나오지 않게 해주면 안될까요?”

담당자는 대번에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어요? 제가 이 학교에 근무한지 20년이 넘었는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울릉도 같은 산간벽지에 내려가는 사람만 수요일 오전근무고, 나머지는 다섯시까지 근무해야죠!”


씁쓸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20년 동안 그런 적이 없다는 게 올해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텐데. 지난 20년 동안 아침에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오늘도 안나오는 방귀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비유가 잘못된 거, 안다)? 그래도 내가 인사권자인데, 추석 선물은 못할지라도 그 정도 선심을 쓰게 해줄 수는 없는 걸까? 할 일도 없는데 적막한 학교를 지키도록 해야 속이 시원할까. 결정적으로 그냥 “안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일장 연설을 하는 걸까.


오늘 하루를 제끼고 테니스를 치면서 학교에서 지루하게 다섯시를 기다릴 조교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담당자는 평소 내게 말해 왔다.

“왜 조교들만 이뻐하세요? 나도 밥 좀 사줘요.”

그 답을 지금 드린다. 제 삶이 워낙 대충주의로 점철되어 있어서 그런지 원칙주의자가 옳다는 건 알겠지만 같이 있으면 좀 힘들거든요.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6-10-0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칙주의자 반대말은 대충주의자? ^^ 말은 그리하셔도 일에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춤추는인생. 2006-10-0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칙주의자들 미워요..^^

marine 2006-10-0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교분은 MD이신가요? 아니면 일반과?

마태우스 2006-10-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그냥 일반과 나왔지요..
춤추는 인생님/아앗 님도요? 반갑습니다!
배혜경님/그, 글쎄요 제 일에는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ㅠㅠ

산사춘 2006-10-0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도 다 쉬던데... 그나저나 작년엔 빨간날이 다 주말이어서 넘 억울했어요.

멜기세덱 2006-10-0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예과 조교분만 아니라, 여기 이 국교과 조교도 출근을 해야했답니다. 마태우스님 온정이 넘치시는 교수님이시군요...ㅎㅎ

sorinova 2006-10-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분들에게 인기 많으실 것 같아요 ㅎㅎ ... 여기 온지 3년이 넘었는데 처음 글 남기네요... 사실 ... 알라딘 가입도 방금 했어요. 전 yes24쓰거든요 OTL

새우범생 2006-10-0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원칙주의자라고 명명하신 분을 원칙주의자로 보기는 조금 무리인 거 같아요. 제가 가진 정보가 한정되어서 속단하기 힘들다 정도의 의미지만요. 저는 우리 둘레에 원칙주의자가 좀 더 늘었으면 좋겠어요. 대다수 선진국들이 부드러운 융통성보다 답답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건 그만한 효용이 있기 때문인 거 같아요. 물론 그 ‘원칙’은 쓸데없는 의무를 없앨 때는 민첩하고, 사회적 가치 배분을 왜곡할 때는 신중하려는 태도가 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그 원칙이 지위 고하나 힘의 강약과는 무관하게 일괄 적용된다는 점도 아울러서요. 아마 마태우스님도 이런 원칙주의자라면 흔쾌히 반기시리라 믿습니다. 미력이나마 이런 괜찮은 원칙주의자들이 왕따를 당하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저도 쓸데없는 번문욕례에서 희열을 느끼는 고루한 사람들, 지킬 가치가 없는 것에 연연하는 측은한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요.^-^

마태우스 2006-10-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우범생님/그렇죠...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엔 원칙주의자가 너무 없어서 문제죠... 우리가 보는 원칙주의자는 죄다 지킬 가치가 없는 것에만 연연하는 듯...
속삭이신 분/님 서재에 댓글로 달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속삭이신 분/아저씨가 아니라 여자분입니다... 글구 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리노바님/안녕하세요? 처음 뵙겠네요 가입 안하고 눈팅만 하셨군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만 좀 인기가 있답니다^^ 그래스물넷에 계시는군요 한번 찾아뵐께요
멜기세덱님/아아 님도 출근하셨었군요.. 지금은 속상함이 좀 풀리셨는지요... 세상이 좀 여유롭게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사춘님/작년의 억울함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더 잘사는 세상이 어서 와야 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