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출연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덕분에,

자주는 아니지만 고교 강의를 나갈 때가 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경기여고에 다녀왔었다.

학생들이 열심히 듣고, 또 여학생들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아주 좋아

강의하는 내내 보람을 듬뿍 느꼈던 강의였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내 사인을 받고 싶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갖고 다니던 네임펜을 꺼내려고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손끝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황급히 손을 빼니 네 번째 손가락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기생충한테 물렸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를 닦을 뭔가를 찾다보니

가방에 웬 양말 한 짝이 있었다.

내 가방은 안그래도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어서

아내한테 늘 가방 정리를 좀 하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인데,

그 양말이 있었던 건 신의 한수였다.

나중에 다른 학생이 밴드를 갖다주기 전까지 양말로 손가락을 감싼 채 지혈을 했으니 말이다.

 

저녁 모임에 갔을 때, 도대체 뭐가 내 손을 다치게 했는지 궁금해 가방을 뒤졌다.

답은 쉽게 나왔다.

가방 안주머니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1회용 면도기가 꽂혀 있었다.

지난번 집에 못들어가 외박을 할 때,

편의점서 1회용 면도기를 사서 모텔에 들어갔었다.

1회용이면 한번 쓰고 버리는 게 맞지만,

뭐가 그리 미련이 남았는지 한번 더 쓰려고 가방에 꽂아둔 거였다.

그러고보니 아내 말이 맞았다.

양말 한 짝을 가방에 넣어둔 걸 가지고 신의 한수 어쩌고 했지만,

아내 말대로 평소에 가방을 잘 정리했다면

손가락을 다칠 염려도 없었잖은가?

 

그래도 이건 결혼을 하고난 뒤 많이 나아진 것.

과거 내 가방엔 플러스펜 뚜껑들과 호치키스, 맥주병 따개, 다른 이한테서 받은 명함들 등등

갖은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더랬다.

그러고보니 이런 기억도 난다.

나만 오면 썩는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던 아내가

한번은 마음잡고 내 가방을 뒤졌는데,

거기서 한달쯤 전 아내가 기차에서 먹으라고 싸준 샌드위치가 나왔었다.

비닐에 든 그 샌드위치는 상할대로 상해서 액체 비슷하게 돼 있었고,

거기서는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났었다.

 

 

 

 


오늘 아침, 가방을 뒤지다 그 양말 한짝을 발견했다.

피가 묻은 걸 그대로 다시 넣어두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빨아서 다시 신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진을 찍은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방엔, 필요한 것만, 그리고 깨끗한 것만 넣어두자,고 결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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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5-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면도날에 베인거면 상처가 깊을 텐데요 괜찮으신지요.

전 마테우스님 정리정돈 엄청나게 잘 하실꺼라고
왜...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

마태우스 2014-05-18 17:40   좋아요 0 | URL
어머나 정말 신기해요 전 한번도 정리정돈을 잘한 적이 없어요.ㅠㅠ
허술하게 보이지 않던가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5-1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포장마차에서 술 먹고 다음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주머니에 꽁치'가 있더라고요.

마태우스 2014-05-18 17:40   좋아요 0 | URL
윽...꽁치는 어디 쓰시려고...전 오징어 같은 거 주머니에 넣어갖고 오는 경우는 흔합니다. 어디까지나 마른 오징어요!

무스탕 2014-05-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말 두 짝이라면 이해를 해 드리겠는데, 왜 한 짝만... ^^;;;;

같이 근무하시던 아저씨 한 분은 가방을 맨날 들고 다니시길래 거기 뭐 들었어요? 묻고 가방을 열어보니 칫솔 하나 달랑 넣어서 갖고 다니시더라구요.
빈 손으로 다니면 허전해서 들고 다니는 가방이래요.

마태우스 2014-05-18 17:41   좋아요 0 | URL
어 전 그런 건 아니구, 제 가방엔 늘 읽을 책이 있답니다. 문제는 책 이외에 지저분한 것들이 부수적으로 딸려온다는 거...

2014-05-15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4-05-1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희 학교에는 특강 안 오시나요...
시골 학교다보니 특강을 안 한다는게 문제죠.
내가 경기여고생이었으면 ㅠㅠ

2014-05-1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8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4-05-19 00:2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섭외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전화를 안하셔서 그런 거구요, 전 주로 과학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얘기를 한답니다.

책이좋아 2014-08-2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이게 그 양말이군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는데,

강아지가 놀러왔다.

귀여워서 누운 채 강아지 배를 쓰다듬다가 책장을 보니

못보던 책이 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책을 보시라.

제목이 'T-700 Enriched Hand Essence'다.

내가 언제 저런 책을 샀던가 싶어서 자세히 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책장에서 꺼내봤더니

이럴 수가.

이건 책이 아니라....

 

핸드크림이었다.

하도 교묘하게 세워놓은 탓에 책인 줄 알았던 것.

어디 강의 갔다가 선물로 받은 건데,

그럼 그렇지. 내가 손 마사지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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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5-1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 읽으면서 저건 대체 뭔 책인가 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태우스 2014-05-13 22:00   좋아요 0 | URL
그죠그죠^^^

stella.K 2014-05-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감쪽 같군요. 근데 진보라고 할 것 까지야...ㅎㅎ

마태우스 2014-05-13 22:01   좋아요 0 | URL
저 책은 그냥 '착각'을 검색해서 넣은 거구요 제가 진보라는 의미라든지 진보가 착각했다, 이런 의미는 전혀 아니옵니다

재는재로 2014-05-1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한번더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써 알겠네요 진짜 감쪽같네요

마태우스 2014-05-13 22:01   좋아요 0 | URL
호호 감사합니다. 속아주셔서!

moonnight 2014-05-1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 같아요. 아니 저런 책이 있었나 하고 노려봤네요. ^^;;;

마태우스 2014-05-13 22:02   좋아요 0 | URL
엄나 달밤님 몸소 오셔서 댓글 달아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달밤님 노려보는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곰곰생각하는발 2014-05-1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정말 속았습니다. 다시 보니 알겠군요...

마태우스 2014-05-13 22:02   좋아요 0 | URL
우와 곰발님을 속이다니, 대단한 핸드크림이네요

hnine 2014-05-1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시 봐도 책 표지 같지 않은데요? 제가 이상한가요 ㅠㅠ

마태우스 2014-05-13 22:0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이게 원래 누워서 보시면 속는데, 제가 사진을 똑바로 찍어놔서요...

아무개 2014-05-14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암튼 ㅋㅋㅋㅋ

마태우스 2014-05-14 22:02   좋아요 0 | URL
어머나 아무개님 안녕하셨어요...^^

무스탕 2014-05-1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다 읽고 다시 사진을 보니 상자 뚜껑 양쪽 끝 부분에 높이 차이가 보여요. ㅎㅎㅎ

마태우스 2014-05-14 22: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근데 누워서 보니깐 감쪽같더라고요...!

하양물감 2014-05-1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속았네요. 저는. 일단. 알파벳은. 잘. 안읽는 버릇이 있어서 하하

꼬마요정 2014-05-19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완전 유쾌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첫 사진만 보고 뭔가 의학서적이 아닐까, 혹은 영어사전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니까요~ ㅎㅎ
 
양심을 보았다 - 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이얼 프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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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체비치, 따라와.”(99)

아초가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의 발을 툭툭 차며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당사자는 무척 황당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아초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코바체비치가 아니고 스탄코였기 때문이다.”(99)

상황은 이랬다.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아무래도 민족간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주를 이루는 세르비아인은 소수민족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인과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여기에는 악연도 있다.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인은 나치와 협력해 70만명의 세르비아인을 몰살시켰다. 겉으로는 협력해서 한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 19915, 크로아티아는 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나라의 해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세르비아인이 아니었기에 두 민족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독립에 대한 크로아티아인의 의지는 강했지만, 장비에서 앞선 세르비아인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이 주로 살던 부코바르라는 도시를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원래 부코바르에는 크로아티아인뿐 아니라 세르비아인도 살고 있었는데, 두 민족은 외모도 비슷했고 사용하는 언어도 동일했으니까. 포로들 중 크로아티아인들만 골라서 죽여야 하지만,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부코바르 출신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아초는 그 포로들 사이에 있다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세르비아인 간부의 눈에 띈 세르비아인이었다. 그 간부는 아초에게 포로들 중 세르비아인을 골라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초에 의해 세르비아인으로 분류가 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코바체비치, 따라와.”라는 평범한 단어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즉 아초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스탄코라는 세르비아인을 코바체비치라는 세르비아 이름으로 불러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아초는 또 다른 크로아티아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가 부른 이름은 모두 세르비아식 이름이었다. 그제야 감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도 불러달라고 속삭이며 애원했다.”(100)

 

<양심을 보았다>(이얼 프레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아초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크로아티아인을 구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2차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에게 부모를 잃었으니, 아초가 세르비아인만 지목했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초가 그런 일을 함으로써 그의 처지는 곤란해졌다. 크로아티아인은 아초가 세르비아인이라서 그를 싫어했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을 도운 아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아초는 왜 그랬을까? 책의 저자가 묻자 아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본능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것 같았거든요.”(124)

그렇다고 해서 아초가 평소 인권이나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를 찾아간 저자는 아파트에 책이 한 권도 없으며, 그가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즉 사람을 구하는 본능은 그냥 타고난 것이지 책을 읽거나 교육을 받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세월호라는 배가 거꾸로 뒤집혀 그 안에 있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낡은 배를 사서 운행한 것, 객실을 무리하게 증축하고 화물을 적정량 이상으로 실은 것 정도야 우리나라의 총체적인 부패지수로 봐서 두드러지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선장과 승무원이었다.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버려둔 채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은 해양사고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안전한 객실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함으로써 승객들의 탈출 기회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아초의 예에서 보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본능일진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지인 한분은 "지난 2주간 선장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하기야, 책임과 의무, 거기에 본능까지 버린 선장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양심을 보았다>를 읽자. 세상에는 그 선장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니까. 탁월한 문장력에 탁월한 번역도 이 책의 빛나는 장점이란 것도 추가로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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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이은조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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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하늘같이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 중 저자가 열명을 돌파하고,

나도 책을 내게 된 후로는 저자에 대한 존경심이 다소 엷어졌다.

하지만 이은조 작가는 좀 다르다.

내가 글을 연습하던 알라딘 시절, 이은조 작가는 이미 일반인 수준을 벗어난,

아름다운 글들을 서재에다 쓰고 있었다.

저런 분은 정말 작가가 돼야 해.”

나중에 이은조 작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도 놀라지 않은 것은

될 사람이 됐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이은조 작가님은 그보다 10년 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분야에 당선된 경력도 있다)

 

습작 수준의 글을 모아 후딱 책을 펴낸 적이 여러 번인 나와 달리

이은조 작가님은 신춘문예 이후 4년만에 <나를 생각해>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두 번째 책이 나오기까지는 그로부터 또 3년을 기다려야 했다.

첫 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책 <수박>이 훨씬 더 좋았다.

여러 편의 소설이 묶인 소설집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긴 해도,

<수박>은 실린 작품들은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바람은 알고 있지>에서 혜리라는 여성은 사고만 치는 가족들의 뒷수습에 치인 삶을 산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 가족들의 수습을 거절하면 대번에 언니는 이기적이란 문자가 온다.

배려와 희생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둔갑하지 않았고,

단 한 번의 어쩔 수 없는 외면이 그동안의 배려와 희생을 덮어버린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이 얘기가 더 크게 다가온 건 내 지인 때문이었다.

나랑 친한 여선생은 아버지가 평생 일을 한 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식당의 밥을 하나만 시켜서 여동생과 같이 먹는 식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했다.

여동생이 이렇게 물었단다. “언니, 우리도 나중에 돈 벌면 학교 밥을 각자 하나씩 시켜서 먹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이 된 후부터 그녀는 소녀가장이 됐다.

인턴.레지던트 월급이라야 100만원이 채 안됐지만,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 그녀의 월급이었으니, 소녀가장이 된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전문의를 따고 난 뒤 병원에 취직해 돈을 벌면서

그녀는 자기 밑의 네 동생을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다.

맨 마지막 동생이 시집가던 날,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이제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반문했단다.

엄마, 나는?”

 

이제 다 자리를 잡은 그녀의 동생들이 언니의 희생에 보답을 했을까.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그녀의 동생들은 틈나는대로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와서 건강검진과 치료를 받았고,

자신들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병원에 오게 해서 언니를 힘들게 했다.

소녀가장이 힘들었던 그녀는 여기서 탈출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어.”

<바람>에 나오는 혜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따금씩 혜리는 여기서 펑,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도,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혜리는 여기서 펑,을 외우곤 했다....그건 왠지 서글프면서도 통쾌했다. 병에 걸렸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사를 가야 한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가족의 안부에 답하지 않아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45)

 

소설의 재미가 기존 상식을 깨뜨리는 쾌감에 있다면,

소설집 <수박>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단편은 단연 <효녀 홀릭>이다.

좀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구성이 너무 그럴듯해 실제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난 그래, 내가 이래서 애를 안낳는 거야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는데,

두 번째 만에 이런 멋진 소설집을 낸 이은조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시국이 어려워서 책이 잘 읽히지 않겠지만,

그래도 <수박>은 한번 읽으라고 권해 드린다.

수박씨는 그냥 뱉으면 돼. , .... 마치 가슴에서 멍울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이란 대사처럼,

지금 우리를 휘감고 있는 멍울 같은 수박이 조금은 작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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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5-0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어느 서재에서 처음 봤고, 신문에서 신간 안내로 봤고, 이번에 세 번째로 봅니다.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잘 지내셨나요?

마태우스 2014-05-01 16:16   좋아요 0 | URL
아앗 페키님 안녕하셨어요. 지난 한달만 얘기하자면,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었겠어요.. 마음이 많이 아파서 글도 안쓴 채 멍하니 보냈죠.ㅠㅠ 아직도 선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근거라도 찾고 싶었는데, 그놈이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비연 2014-05-0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박씨는 그냥 뱉으면 돼. 툭, 툭.... 마치 가슴에서 멍울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아. 마음에 와닿는 문구에요. 요즘처럼 심란할 때 읽으면 좋을 듯 싶네요...

마태우스 2014-05-04 00:2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무지 많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주제들이었구요.

2014-05-04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4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5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6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7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08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념의료 - 왜 병원에만 가면 화가 날까
박재영 지음 / 청년의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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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 미국에서 돌아온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이 책을 하나 보내왔다.

<개념의료>라는 제목의 책 속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공들여 쓴 저의 새 책을 마태우스 서민교수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립니다.“

책은 꽤 두꺼웠고, 그땐 내가 좀 바빴을 때라 책을 읽을 짬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2, 신학기 때 학생들과 토론할 만한 의학관련 책을 찾던 중

다음과 같은 리뷰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xxx의 탁월한 책 선택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 하나로 본과 1학년 내내 배운 예방의학 시간 동안 배운 내용보다 훨씬 알기 쉽게, 심지어 더 자세하게 의료 체계 및 현실에 대해 개념을 쌓았다. 교수님께 심지어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을 정도이다ㅡㅡ"

이럴 수가. 그가 권해드리고 싶다는 책은 내가 작년에 받은 <개념의료>였다.

더구나 이 리뷰를 쓴 분은 의료계에 대해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을 한의학업계 분이었으니,

이 책이 얼마나 균형잡힌 시각으로 한국의료의 현실을 기술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이번 학기 학생들에게 읽힐 책 중 하나에 이 책을 포함시키려고

서둘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시금 이럴 수가.

이 책은, 훌륭해도 지나치게 훌륭했다.

몇 권의 저서를 펴냈고, 매주 청년의사에 사설을 썼으니 문장력이 탁월하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세밀한 자료조사와 그에 근거한 객관적인 진단은 읽는 중간중간 !’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기초의학 전공자라 막연하게만 알았던 한국의료의 현실과 문제점을 이 책보다 더 잘 말해주는 책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저자랑 알고 지내는 것의 장점을 살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때 주신 책 읽고 있는데 정말 훌륭한 책이더군요. 감동입니다.”

그가 답을 했다.

미국 연수 기간 동안 시간이 좀 있어서, 정말 정성들여 썼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금 책의 속지를 폈다.

 

 

공들여 쓴이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 되는 책을 썼다면 공들여 썼다고 거 자랑해도 전혀 흉은 아니겠다 싶었다.

그리고 이 정도 되는 책을 읽으라고 추천할 수 있다는 건

쉽게 갖지 못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여러분, 개념의료를 읽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색해 봅시다.

일반인 여러분, 하나도 어렵지 않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의사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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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3-2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과잉진단'을 읽으면서 실망하고 있어요. '개념의료'에서 위로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마태우스 2014-03-24 02:08   좋아요 0 | URL
이책은 최고입니다. 실망하실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2014-04-03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9-09-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분 강의듣고 책 주문하려고 들어왔는데, 마침 마태우스님의 추천글이 ^^ 괜히 반가워 (엄청 뒤늦게) 댓글 남겨봅니다.

제가 드라마작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라, 아직 의학드라마는 꿈도 못꾸지만 의사가 나올 때 성격이나 대사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으로 쓰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간 거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을 얻고 왔고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의학드라마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네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의학드라마 꼭 써보고 싶어요. 동기부여가 많이 된 강의였는데, 이 책도 그럴 것 같네요. ^^

마태우스 2019-09-04 10:02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 안녕하세요 의학드라마가 울나라는 정말 많이 부족하죠. 그건 그만큼 님에게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힘 내시고 꼭 좋은 의학드라마 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