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출연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덕분에,
자주는 아니지만 고교 강의를 나갈 때가 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경기여고에 다녀왔었다.
학생들이 열심히 듣고, 또 여학생들이라 그런지 리액션이 아주 좋아
강의하는 내내 보람을 듬뿍 느꼈던 강의였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내 사인을 받고 싶다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갖고 다니던 네임펜을 꺼내려고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손끝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황급히 손을 빼니 네 번째 손가락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기생충한테 물렸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를 닦을 뭔가를 찾다보니
가방에 웬 양말 한 짝이 있었다.
내 가방은 안그래도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어서
아내한테 늘 “가방 정리를 좀 하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인데,
그 양말이 있었던 건 신의 한수였다.
나중에 다른 학생이 밴드를 갖다주기 전까지 양말로 손가락을 감싼 채 지혈을 했으니 말이다.
저녁 모임에 갔을 때, 도대체 뭐가 내 손을 다치게 했는지 궁금해 가방을 뒤졌다.
답은 쉽게 나왔다.
가방 안주머니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1회용 면도기가 꽂혀 있었다.
지난번 집에 못들어가 외박을 할 때,
편의점서 1회용 면도기를 사서 모텔에 들어갔었다.
1회용이면 한번 쓰고 버리는 게 맞지만,
뭐가 그리 미련이 남았는지 한번 더 쓰려고 가방에 꽂아둔 거였다.
그러고보니 아내 말이 맞았다.
양말 한 짝을 가방에 넣어둔 걸 가지고 신의 한수 어쩌고 했지만,
아내 말대로 평소에 가방을 잘 정리했다면
손가락을 다칠 염려도 없었잖은가?
그래도 이건 결혼을 하고난 뒤 많이 나아진 것.
과거 내 가방엔 플러스펜 뚜껑들과 호치키스, 맥주병 따개, 다른 이한테서 받은 명함들 등등
갖은 잡동사니가 다 들어 있었더랬다.
그러고보니 이런 기억도 난다.
나만 오면 썩는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던 아내가
한번은 마음잡고 내 가방을 뒤졌는데,
거기서 한달쯤 전 아내가 기차에서 먹으라고 싸준 샌드위치가 나왔었다.
비닐에 든 그 샌드위치는 상할대로 상해서 액체 비슷하게 돼 있었고,
거기서는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났었다.


오늘 아침, 가방을 뒤지다 그 양말 한짝을 발견했다.
피가 묻은 걸 그대로 다시 넣어두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빨아서 다시 신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진을 찍은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가방엔, 필요한 것만, 그리고 깨끗한 것만 넣어두자,고 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