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보았다 - 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이얼 프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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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체비치, 따라와.”(99)

아초가 쓰러져 있던 한 사람의 발을 툭툭 차며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당사자는 무척 황당했던 모양이다. “남자는 아초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코바체비치가 아니고 스탄코였기 때문이다.”(99)

상황은 이랬다.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아무래도 민족간의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주를 이루는 세르비아인은 소수민족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인과 사이가 무척 나빴는데, 여기에는 악연도 있다. 2차 대전 때 크로아티아인은 나치와 협력해 70만명의 세르비아인을 몰살시켰다. 겉으로는 협력해서 한 나라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었다.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 19915, 크로아티아는 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나라의 해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세르비아인이 아니었기에 두 민족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독립에 대한 크로아티아인의 의지는 강했지만, 장비에서 앞선 세르비아인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이 주로 살던 부코바르라는 도시를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원래 부코바르에는 크로아티아인뿐 아니라 세르비아인도 살고 있었는데, 두 민족은 외모도 비슷했고 사용하는 언어도 동일했으니까. 포로들 중 크로아티아인들만 골라서 죽여야 하지만,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은 부코바르 출신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아초는 그 포로들 사이에 있다가 전에 같이 근무했던 세르비아인 간부의 눈에 띈 세르비아인이었다. 그 간부는 아초에게 포로들 중 세르비아인을 골라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초에 의해 세르비아인으로 분류가 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코바체비치, 따라와.”라는 평범한 단어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즉 아초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스탄코라는 세르비아인을 코바체비치라는 세르비아 이름으로 불러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아초는 또 다른 크로아티아인 한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가 부른 이름은 모두 세르비아식 이름이었다. 그제야 감을 잡은 사람들이 자기도 불러달라고 속삭이며 애원했다.”(100)

 

<양심을 보았다>(이얼 프레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아초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크로아티아인을 구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2차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에게 부모를 잃었으니, 아초가 세르비아인만 지목했다고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아초가 그런 일을 함으로써 그의 처지는 곤란해졌다. 크로아티아인은 아초가 세르비아인이라서 그를 싫어했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을 도운 아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아초는 왜 그랬을까? 책의 저자가 묻자 아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본능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것 같았거든요.”(124)

그렇다고 해서 아초가 평소 인권이나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를 찾아간 저자는 아파트에 책이 한 권도 없으며, 그가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즉 사람을 구하는 본능은 그냥 타고난 것이지 책을 읽거나 교육을 받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세월호라는 배가 거꾸로 뒤집혀 그 안에 있던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낡은 배를 사서 운행한 것, 객실을 무리하게 증축하고 화물을 적정량 이상으로 실은 것 정도야 우리나라의 총체적인 부패지수로 봐서 두드러지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선장과 승무원이었다.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버려둔 채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은 해양사고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부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안전한 객실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함으로써 승객들의 탈출 기회를 봉쇄하기까지 했다. 아초의 예에서 보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본능일진대,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지인 한분은 "지난 2주간 선장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하기야, 책임과 의무, 거기에 본능까지 버린 선장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양심을 보았다>를 읽자. 세상에는 그 선장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니까. 탁월한 문장력에 탁월한 번역도 이 책의 빛나는 장점이란 것도 추가로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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