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졸업한 박재환은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의 문을 두드린다. 중앙의대에 있는 그의 선배처럼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꿈을 안고서.

“안녕하세요? 서민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공보의 신분으로 교실을 드나들던 내가 갓 들어온 그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는 수줍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말이 없었다. 일을 할 때는 물론이고 술자리에서도 그는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 지도교수는 “답답해 죽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재환이가 두마디 이상 말하게 하면 천원 준다”며 내기를 걸기도 했다.


말 없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 그는 무척이나 성실했고, 묵묵히 맡은 바 일을 해냈다. 전임자인 나 때문에 폐허가 된 우리 교실은 서서히 연구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하나둘씩 업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지도교수가 외국논문에 가장 많이 실은 교수상을 몇 번이나 탄 건 순전히 그의 공이다.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던 어느날의 노래방, 그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노래와 더불어 현란한 율동을 선사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가끔 추는, 벽에 바싹 붙어서 몸을 비비는 춤은 사실 그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그의 말없음이 사라진 건 아니어서, 그 다음날부터 그는 다시금 말없음 모드로 돌아왔다.


작년에 이미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는 서울대에서 조교로 있다. 비의대 출신을 차별하는 풍토 탓인데, 연구 능력만 놓고 봤을 때 그는 나보다 먼저 교수로 풀렸어야 했다. 그래서 난 그를 만날 때마다 부끄러웠고, 가끔씩 술을 사면서 면죄부를 얻고자 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나 선배가 동물병원에서 많은 돈을 버는 걸 보면서 그는 많이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그는, 한때 교실을 그만두고 선배와 동업을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잠시의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다시 말없이 맡은 바 일을 했고, 좋은 논문을 만들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연구도 안하면서 술만 먹는 날나리? 원체 말이 없는데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지만, 난 그가 나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친한 사람이 모두 사라진 모교에 갈 때마다 날 가장 반겨준 게 바로 재환이였으니까.


어제, 난 심복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박재환이 죽었대요.”

너무 갑작스러운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법이라 난 그 박재환이 내가 아는 박재환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게 아니면 박재환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다.

“한성대 안에서 시체로 발견됐대요. 신분증 보고 경찰에서 전화했어요...”

한 3분간 설명을 들었어도 난 그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974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서른네살, 한창 때인 젊은이가 왜 갑자기? 그는 2년 전에 결혼했고, 2월이면 첫 아기가 태어난다. 더구나 그는 그 전날 내게 전화를 걸어 교실 신년회 때문에 지도교수 댁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어느 날짜가 좋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고, 011-9944-9041로 전화를 걸면 그가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할 것만 같은데, 그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믿어지는가.


고대병원 영안실에 달려간 어제 저녁, 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변사인지라 부검을 해야 하는데, 그 부검이 오늘 아침에야 이루어진다나. 사건 당일 그는 새벽 한시 반까지 동문 모임에 나가 술을 마셨고, 같이 갔던 룸메이트가 그를 집까지 데려다 줬다고 한다(그는 주말부부로, 부인은 대전에 살고 자신은 한성대입구에서 자취를 한다). 룸메이트에 의하면 그는 술에 취한 뒤면 한성대 안을 산책하며 술이 깨길 기다렸다는데, 그날 역시 한성대로 갔고,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인이 도대체 뭘까. 난 구토를 하다가 그게 기도로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늘 아침에 나온 부검 결과는 장파열. 왜 장이 파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단다.


하긴, 사인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으며 그의 순박한 미소를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닐까. 세상에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하나 둘이겠냐만은 한달 후면 태어날 아이의 얼굴도 못본 채 세상을 하직한 재환이의 죽음은 안타까움의 측면에서 보면 최상위일 것이다. 오늘밤 난 그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 잘 가라, 재환아.... 잘 못해줘서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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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1-0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럴때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는걸까요? 어떤 댓글을 달아야 하나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moonnight 2007-01-0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일이. 너무 허망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스탕 2007-01-0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읽지 말걸... 속상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로그인 2007-01-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야.. 참담한 일입니다. 마태우스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렌초의시종 2007-01-04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aviana 2007-01-0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우리가 이렇게 황망한데,
그 부인은 지금쯤 어떨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7-01-04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1-0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가 삼류소설 카테고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분도 그렇지만...남겨진 부인과 아이는 어찌 한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게으름뱅이_톰 2007-01-0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젊고 성실한 사람을 왜 이리 일찍 데려가실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해적오리 2007-01-04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이런 사연을 접할 때마다 전 신의 존재에 대해 되묻게 됩니다.
그렇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아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프레이야 2007-01-04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새해벽두부터 마음 아픈 일이 생겼군요.
남은 가족들도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stella.K 2007-01-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년초에 이런 슬픈 일이...뭐라 할 말이 없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ooninara 2007-01-0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분이...아깝네요. 욕 먹는 사람들은 오래만 사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07-01-0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뭐라 말을 해야 할 지..고인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레와 2007-01-0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모1 2007-01-04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허무하게 세상을 뜨셨군요. 너무 안타까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건우와 연우 2007-01-0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겨진 가족들이 하루빨리 몸과 마음을 추스리실수 있길...

춤추는인생. 2007-01-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안타깝네요.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것 같아요. 하느님은 좋은사람들을 너무 일찍데려가세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水巖 2007-01-0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영엄마 2007-01-0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 곧 아기 아빠가 되실 참이었는데 어쩌다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남은 가족분들이 얼마나 황망하실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_)

마노아 2007-01-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이와 부인이 너무 가여워요ㅠ.ㅠ

sweetrain 2007-01-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말이 지금 이 상황에 위로가 되겠냐만,
그저,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ㅠ.ㅠ

짱꿀라 2007-01-05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이런 일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냐 2007-01-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겨진 유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고인의 운명도 가슴아프지만, 유복자의 삶도 신산하지 않기를 바랄 뿐임다. 때로는 살아숨쉬는 하루하루가 소중한거라 알려주는 이런 '사건'들이 야속할 뿐임다.

토탈리콜 2007-01-0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글을 읽을때마다 오늘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됨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key6700 2007-01-07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읽다가 넘 놀라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태우스 2007-01-0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러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전 아직도 그가 세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내일 모교 갈 건데, 그때 그 친구가 절 여전히 반겨줄 것 같아요... 마냐님 말씀대로 유복자의 삶이 신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