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 역사 분쟁 · 무역 전쟁 · 이념 갈등 차이나는 클라스 4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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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클래스를 본적이 없다. 아이들 키우며 아내가 고장난 TV를 고치지 않은 탓이다. 수리비가 20만원이 나왔는데 새로사는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란 의견을 서로 나눈후 무려 3년을 TV없이 살고 있다. 좁쌀같은 성격에 누구도 적극성이 없어 이리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내가 그 대단했던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인 러시아 월드컵 한국대 독일전 마저 주방용 조그만 TV로 시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차이나는 클래스도 당연히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이대로라면 코로나가 다음 월드컵을 허락한들 역시 주방TV신세일 것이다. 

 이 책은 쉬운데 좀 알찬 지식들이 있다. 북한과 소련,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북한의 개혁 개방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우선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고, 기득권을 물리칠만한 강력한 1인집권체제라는 점과 동시에 중국, 베트남이라는 성공적 모델도 같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소련을 개혁개방에 실패했다. 이는 소련이 절대빈곤이 아닌 중화학 공업중심으로 소비재가 부족해 돈이 있어도 소비재는 못사는 기형적 빈곤상태였으며, 개혁개뱡의 주체였던 고르바초프가 불과 4세대 지도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아예 기득권층의 저항을 물리치고자 민주정치를 감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억눌렸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나 소련연방은 여러나라로 쪽져 버렸다.

 반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성공한다. 중국은 우선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였고, 덩샤오핑은 무려 1세대 혁명지도자로 특별한 지위없이도 사실상 최강의 권위를 누린 존재로 개혁개방 반대세력을 억누를수 있었으며 사실상 일당독재이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집단지도체제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으로 본다. 덩샤오핑은 민주체제가 매우 비효율적이고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언제든 분열가능성이 있는 중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로 보았다. 때문에 중국은 한국이나 대만식의 민주화가 아닌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정치제도화의 길을 택했다. 정치제도화는 민주화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국방, 치안, 사회복지, 경제성장등의 필수적 정치재를 제공해 안정화를 노리는 것이다. 

 중국은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 정치재의 제공에 사활을 건다. 중국은 국유기업이 많은데 효율성이 떨어져 적자를 보는 경우에도 일자리의 제공이라는 사회적 역할때문에 적자를 국유은행이 보전해준다. 그러면 그 기업을 쓸데없이 살아남아 생산을 지속해 과잉생산을 일으켜 시장을 혼동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자원을 역시 쓸데없이 집어삼켜 좀비기업화한다. 중국의 체제가 유지되려면 매년 2천만개의 일자리가 요구되는데 공산당은 어떻게든 천 이삼백만개의 일자리를 생성하여 제공한다. 

 중국 공산당원은 무려 8900만에 달하는데 인구대비로 생각하면 소수다. 이중 겨우 2000명을 뽑아 5년마다 공산당 전당대회를 연다. 여기서 다시 200명의 정위원과 160명의 후보위원을 뽁고 이들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위원회가 1년에 1-2회 열리고 중국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집단이다. 또 여기서 중앙정치부에 속하는 25명의 위원이 있고 또 여기서 상무위원 7명이 선출된다. 시진핑은 중국의 상무위원직책중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주석을 겸임한다. 국가주석은 상징적 권력에 불과하지만 총서기는 공산당 인사권자이며 중앙군사위원 주석은 무려 군지휘권자다.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한 셈인데 시진핑 이전 부정부패한 기득권층이 공산당 지도부에 저항한 사건으로 인해 권력집중이 허용되었다. 시진핑은 이미 헌법개정으로 무한집권이 가능한 상태다.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다. 글자그대로 종교와 공화정이 결합한 초유의 실험인 셈인데 이슬람 법학자인 최고지도자가 국가원수이자 성직자이고, 그가 군통수권과 전쟁성포권, 외교 사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공화정 체제로 대통령을 놀랍게도 직선으로 선출하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는다. 이란의 국정은 최고지도자가 더 큰 영향력으 갖지만 대통령 및 공화정 인사들과 협의를 하는 체제이다. 양자의 조화랄까나. 

 이란이 이리된데는 영국과 미국의 탓이 크다. 이란은 본디 오랜 기간 왕정체제였다. 영국은 이란의 유전을 개발해 이란 왕조와 결탁했고, 영국이 이득을 취하는 대가로 사우디처럼 왕가는 보호받았고, 이득을 얻었다. 그러다 모함마드 모사데그란 자가 등장한다. 그는 영국이 자국의 석유로 이득을 취하고 이란 국민이 가난한 것에 분개해 영국이 장악한 석유를 국영화해버렸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종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를 축출한다. 당시 한국전쟁 직후로 영국은 사회주의자인 모사데그가 소련과 결탁할 우려를 제기해 미국을 설득했다. 모사데그 이후 이란은 급진적인 백색혁명으로 서구의 여러 문화와 제도를 도입한다. 이란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같은 급진적 변화는 많은 이란의 전통주의자들에게 경각심과 반감을 불러온다. 또한 이후 팔레비는 부를 쌓기만 하고 역시 이란 국민을 돌보지 않는다. 결과는 호메이니 혁명이었고 이란은 지금의 모습이 된다. 

 68혁명은 오늘날 세계를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64년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본게 혁명의 계기였다. 자유주의의 수호를 자처하던 미국에게서 유럽의 젊은이들은 제국주의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혁명은 파리를 시작으로 독일, 런던은 물론 철의 장막을 넘어 동유럽인 체코 프라하의 봄으로 이어진다. 대서양을 건나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거기에 일본까지 간다. 물론 독재의 압제하에 있던 한국은 아니었다. 68혁명 이전 독일 사회는 지금의 일본처럼 과거청산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총리가 나치당원 출신이니 정말 지금의 일본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68혁명이후 독일은 지금의 독일로 변모한다.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이 68혁명이 한국엔 도달하지 못한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권으로 독재가 극에 달할때였으며 오히려 베트남 전쟁에 40만에 달하는 병력을 파병한 나라였다. 유럽의 68혁명세대에는 한국은 86세대가 대응된다. 한국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세대이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세대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 오랜 세월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20년전 비교적 30대의 젊은 나이에 정치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5-60대가 된 지금도 자리를 차지한다. 그 덕에 한국정치세력은 세대, 그리고 직능에서 대표성이 크게 떨어진다. 직능에선 언론, 법률, 교수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책은 한국민주주의의 실현은 광장이 아닌 일상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될때 가능하다고 본다. 광장과 정치에선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실생활인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유교적, 군사적 문화가 혼합한 권위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 후엔 북한이 통일한국정치권력의 캐스팅 보드를 잡을 것으로 본다. 우린 독일의 통일을 서독이 주도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많은 봉기와 적극성을 보였다. 그리고 메르켈 총리를 비롯하여 통일 이후 독일의 집권자는 대개 동독 출신이었는데 이는 정치권력이 균형적이었던 서독의 세력을 동독 세력이 선택해야 집권이 가능했다는 정치지형과 관련한다. 이는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데 소수지만 2천5백만의 북한시민이 캐스팅 보드를 쥐는 정치지형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 호남과 경상이 대립하여 충청이 캐스팅 보드를 잡았던 묘한 상황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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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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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1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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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미술사 - 주먹도끼부터 스마트폰까지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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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을 읽으며 시대의 정신 및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견인해나가는 미술과 시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리 미술 혹은 동양미술엔 이런 흐름이 없을까 궁금했다. 여러 책을 좀 보긴 했는데 그런 사조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역사 흐름은 다르며 역사를 단선적으로 보는건 위험한 시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그런 흐름은 있다고 본다. 그러다 이 책 '이야기 미술사'를 보게 되었다. 분량은 무려 600쪽, 저자의 야심이 대단해 무려 구석기부터 현대의 한국미술을 총망라했다. 한국미술 전반을 아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직접 주요 유물의 발굴 및 견학에 참여한 저자의 식견이 빛난 책이다. 아마도 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소화한 것을 조금씩 써본다.


1. 토기와 도자기

 서양과 다른 동양의 미술 장르는 확실히 토기, 도자기다. 서양은 미술이 실용과 확실히 분리된 듯 하지만 동양은 그렇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우리의 달항아리는 사실 관상용이 아니라 고기 따위를 담아놓던 보관용 그릇이었다. 연구에서 달항아리 중간 부분 기름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고기따위를 보관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빗살무늬 토기는 무척 큰데 50cm에 달하기도 한다. 대체 이 빗살은 왜 있는걸까 궁금증이 드는데 단순한 장식이란 견해에서, 주술적 의미, 아무표시도 없는 빈공간에 대한 불안감의 대처, 그리고 실질적 용도로 마찰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신석기 후기로 들며 토기는 작아지고 아래는 편평해졌으며 크기도 작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는데 이는 음식을 큰 그릇에 담아놓고 같이 먹던 습관에서 점차 작은 크기의 그릇에 덜어먹는 형태로의 식습관 변화를 의미한다. 신석기 시절 토기는 가까우면서도 먼 한중일이 모두 상당히 다르다. 중국의 토기는 대부분 채색토기로 화려하고 검고 붉은 채색이 많은데 이 시기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 유사하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과 무채색인데 만주, 몽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의 북아시아 쪽과 유사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조몬시대 이르러 구연 부분을 조각하는 특유의 형태로 차별성을 드러낸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빗살무늬 토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위 부분에만 점을 찍는 가벼운 띠무늬 형태 토기가 많아진다. 이 시기부터는 물레가 생겨나 세련된 둥근 형태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졌다.

 삼국시대에 토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토기가 매우 다르다. 백제와 고구려는 토기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형태가 무른 연질의 토기를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단단한 경질의 토기 생산이 가능했다. 이는 가야 지역의 토기를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로 가능했다. 신라 토기는 가야 토기의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는데 6세기 무렵이면 무려 1000도 이상에서 토기를 구워내고 유약을 살짝 바르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주로 벽화를 통해 삶을 표현한 반면 당대 신라인은 토기에 장식한 토우나 상형토기로 그들의 삶과 문화는 나타낸듯 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토기에서 도자기의 시대가 열린다. 유약을 본격 사용하고 고온에서 경질도기와 자기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단연 청자다. 동북아시아에서 청자의 시작은 중국인데 청자는 당시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던 옥을 대신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어떻게 하면 그릇에 옥색을 내느냐가 초점이었던 것이다. 청자와 백자는 유약과 1200-1300도의 가마에서 구워내야 생산이 가능하다. 즉, 유약과 고온기술이 초점이다. 그래서 두 기술이 발달했는데 도자기는 흙과 불, 유약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달라진다. 청자는 유약에 철분을 섞에 초벌하면 붉은 색이 되고, 이를 다시 재벌하면 푸른빛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며 가능해졌다. 이 유약에 철분이 적으면 푸른 빛이고 다소 많아지면 탁한 갈색을 띠는 푸른빛의 청자가 된다. 가마기술은 비탈에 짓는 비탈가마와 평지가마가 있다. 비탈가마는 고온에서 산소를 차단하는 환원법으로 청자가 주로 갈색조나 황갈색조라 만들어지며 평직마에서는 산소가 많이 투입되는 산화법으로 맑은 녹색과 청생의 푸른빛의 청자를 만들어낸다. 고려는 이 중 비탈가마 형태를 받아들였다. 고려 청자의 톡특함은 유명한 상감이다. 상감은 본래 청동기에 금, 은, 보석, 뼈등을 박아 넣은 금속공예였는데 고려는 이 상감을 도자에 넣었다. 성형한 그릇의 표면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넣었는데 문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이 얇아지다보니 상감청자의 유색은 약간 청회색조가 되었다. 조선은 초기엔 고려의 청자를 계승해 분청자가 유행했다. 분청자는 청자에 백토를 분장한 자기를 말한다. 그러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나라의 청화백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청화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청자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2. 불교

 한국 미술에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불화나 사찰, 탑, 불상이 모두 불교에서 비롯한 예술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스투파라는 신도들이 예배를 하던 탑이 있었다. 스투파는 인도에선 둥근 사발을 뒤집은 듯한 복발형으로 무덤과 유사한 형태였다. 하지만 중국에 스투파가 유입되어 다층탑 형식과 결합하여 3-5층의 전망형 망루와 비슷한 탑으로 변모한다. 다만 중국에선 목탑이 대세였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자연적 특성과 결합해 석탑이 유행한다.

 처음엔 탑이 중심이었지만 불상이 유래하며 불상의 인기가 탑을 넘어서게 된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본 뜻 것이기에 사리가 보관된 탑보다 신앙과 관련하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신자들을 포섭하기 더 쉬웠다. 그래서 사찰도 탑 중심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 중 천불은 같은 모양과 크기를 지닌 천개의 불상을 의미하며 삼존불은 부처를 중심으로 미륵반가사유상과 보살상이 위치한 것이다. 7세기 전반엔 삼국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이 유행했는데 아무래도 전란과 나라의 멸망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이 결합한듯 하다. 반가사유상은 글자그대로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걸치고 그 오른 무릎위에 올린 오른 팔로 턱을 괸채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의 불상이다.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대개 석불이지만 한국은 금동불로 제작을 했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6-7세기 일본 불상과는 달리 적송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일본 불상이 대개 조립식이었던 것에 반해 반가사유상은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삼국시대 탑과 불상의 배치인 가람배치는 지역마다 다르나 탑하나에 세개의 금당을 배치한 고구려식 1탑 3금당이 일반적이었다. 백제에는 3탑 3금당, 3탑 1금당식의 독특한 형태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팔각형의 목탑이 많았고, 신라와 백제는 목탑과 석탑이 공존했다. 백제미륵사는 1탑 1금당으로 가운데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 석탑이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백제 사비시대의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완성형 석탑이다.1층의 탑신을 높게 설정하고 2층부터 탑신의 너비와 높이, 길이를 급격히 줄여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하였고 1:1.618의 황금비를 나타냈다. 

 남북국 시대 신라는 불교를 이용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삼민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왕즉불의 이념아래 전국토를 불국토로 이념화했다. 이에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이 건립되었고, 석굴암을 만들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자연 석굴이 많아 석굴 사원을 만들기 손쉬웠지만 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거대한 인공암반을 그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인공석굴을 조성한게 석굴암이다. 그리고 불교의 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범종도 많이 주조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는 쇠퇴해 석탑이나 조형물의 조형미가 쇠퇴한다. 몰락한 왕권을 상징하는듯 한데 불상의 얼굴도 이상적이고 근엄한 것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얼굴도 우리와 유사해진다. 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었는데 이 선종은 중앙집권적인 교종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부처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지방세력의 입맛에 잘 맞았다. 때문에 이시기 지역색이 강한 불교 문화가 발달한다.

 고려가 들어서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영향인지 고구려식 팔각형 목조탑형식을 따른 다각다층석탑이 유행한다. 13-14세기 고려말에 이르면 권문세가의 영향으로 취향이 담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불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이 불화는 적록의 보색대비를 강조한 고구려 벽화와 비슷하여 광물색의 원색조와 적록의 보색대비가 특징이다. 고려불화는 고급스럽게 비단에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흰색과 황색, 금색, 은색 물감을 사용하였다. 뒷면에도 물감을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하여 적록을 선명히 하고 변색을 막고 그림에 안정감을 주었다. 변상도는 불경의 주요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인데 14세기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옅은 선묘방식이 퇴락하고 미륵불의 이목구비가 매우 짙게 표현되어 조선초기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3-14세기는 원의 영향으로 진흙으로 구운 후 금박을 입힌 소조불이 나타났고, 3,5,7,9의 홀수탑에서 십이라는 숫자를 중시하는 화엄종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이 그것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불교는 탄압받지만 왕실의 후원과 민간의 신앙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특히, 전란후 승병의 활약으로 왕조보존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가 나서 불교를 중흥하는데 인조와 숙종대에 전국의 사찰이 새로 재건될 정도였다. 전란 후 조선에서는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 활발했다. 때문에 천도의식을 위해 거는 불화인 괘불이 많이 제작된다. 괘불은 무려 10m크기로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때 거는 탱화였다. 


3. 조선시대 회화

 동아시아에서 산수는 만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잘 부합했다. 산수는 이로인해 수신의 의미를 갖고 상징적 의미가 커지면서 산수화를 그리는 일이나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는 문화가 유학자들사이에서 보편적 문화로 자리한다. 산수화는 중국에서 시작해 조선도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중국의 기법은 크게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뉜다. 북종화는 부벽준 기법으로 붓을 옆으로 눕혀 도끼처럼 찍는 방식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거친 절벽의 표현에 적합하다. 남종화는 피마준과 미점 기법으로 피마준은 갈필로 그려 산과 언덕의 주름을 표현하고, 미점은 붓을 옆으로 눕혀 툭툭 찍는 기법으로 안개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조선 초기 산수화는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다. 대가인 안견은 몽유도원도에서 북송대 거장 곽희의 산수기법은 운두준법을 사용하여 능선과 주름은 마치 구름같이 표현하였다. 후원자인 안평대군과 안견의 일파는 15-16세기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인 남송화 기법이 유행한다. 기법에 이어 흐름도 크게 변하는데 17세기 중반 진경산수화가 시작되고 18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통념과는 달리 진경산수화는 사실 실경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과거 관념적인 중국의 이상화된 풍경을 그린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인상과 주관에 따라 과장과 변형, 여러 시점을 이용해 그린 것이다. 즉, 현실경치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구축한 것인데 이는 당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해 새로운 유교문명국을 조선에서 찾고자하는 소중화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유명하다. 그의 3대 명화는 박연폭도,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인데 모두 실경을 바탕으로 그의 이상적 바램이 구상된 그림이다. 금강전도는 토산과 암벽산으로 구성되었고, 양자는 마치 태극모양처럼 표현된다. 봉우리에 눈을 부각하기 위해 주변 배경을 암청색으로 처리한 것도 돋보인다. 정선이후  강세황과 심사정등로 대표되는 신조류가 등장한다. 정선은 조선의 명승을 통해 이상을 꿈꾼 마음의 그림을 그렸고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 노론 세력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 반면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식 사실화법은 박지원, 정약용등의 실사구시학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산수화와 초상화 일색이던 그림판에 풍속화가 등장한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며 서민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결과인데 애정소설이 유행하고, 흥과 신명의 감정을 드러내는 당나라 시풍이 완연했으며 음악도 기존의 느리고 절제된 음률이 빨라지고 변화폭도 커졌다. 그림에도 이게 반영된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이런 흐름의 초기 주자로 평범한 서민들의 노동을 화폭에 담는 혁신적 변화를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풍속화가 도화서 화원의 정식 시험과목으로 독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김홍도는 단원풍속도첩에 무동, 씨름도, 서당등 25개의 화폭을 남겼다. 조선 후가 풍속화는 여성도 대상을 많이 부각되었는데 김홍도의 제자 신윤복은 남여 애정지사를 담은 노골적 성적 이미지를 그림에 담아 당대 신분사회를 질타했다. 이는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예교와 풍속이 느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 19세기에는 관찰을 통한 사실 위주의 그림이 유행하여 당대 화가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을 개성적인 스타일로 그려냈다. 반면 김정희 풍의 문인화도 사대부가 무너지는 시기임에도 아이러니 하고 강조되어 갔다.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의 많은 변천과 양상을 담아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서양과 같은 고대인문주의에서 중세 종교 인문주의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르는 시대적 흐름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름이라면 왕조의 흥망에 따라 초기 불교든 유교든 조금더 이상적인 흐름에서 후기에 이르러 사회적 법도와 왕조가 흔들리며 지방세력이나 백성의 요구에 맞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형국이다. 이런게 불교나 유교라는 그릇을 차용하여 반복되어 표현되는 느낌이다. 동아시아사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동아시아 수력기반 농경왕조가 다소간의 발전은 해나가지만 생산 및 분배체제가 초기엔 잘 잡혀있다가 이것이 무너지며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설의 흐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여튼 책은 상당한 한국 미술품을 책에 담아냈고,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싶다면 볼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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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은 책 읽기를 싫어한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성찰이 없고, 오로지 남들 보다 돈한푼을 버는데 사력을 다하고, 공동체를 무시하고 이익집단의 의견에 경도되어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는 양태는 독서없는 삶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리고 어른이 이렇게 책을 안읽는 것은 어릴때부터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며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본 교육방송의 독서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릴적 책 읽는 재미를 붙여주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 그것이 평생 독서가로 살아가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선생님들이 독서교육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중요하며 좋은 책은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한학기 한권 무엇을 읽을까'는 참 실제적인 책이다. 문학과 비문학은 포함해 초등학생 3-6학년이 읽을 만한 책 100권을 선정했다. 초등사서교사 연구모임에서 만들었고, 현직 교사들이니 아마도 실제 수업한 책들을 사용했을테니 그 수준과, 교육과정 및 성취기준과 관련이 높아 보인다. 3-4학년 수업은 한 권당 8차시 정도로 구성했고, 5-6학년 책은 10차시 이상으로 구성했다. 

 책의 간략한 내용 소개와, 관련 활동들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데 독서전 활동과, 독서중 활동, 독서후 활동으로 구분한다. 보통 온책 읽기 활동은 독서후 활동이 많은 편인데 이 책에선 책을 분량을 나누어 읽게 한 후, 바로 활동하는 형태로 차시 구성이 되어 있어 독특했다. 100권의 책 뿐만 아니라 각 책과 주제가 비슷한 책들도 소개하고 있어서 아마 실제로는 300권 정도의 책이 소개된 듯 하다. 교육현장에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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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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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고전 문학을 보면 거울이나 그림자, 혹은 물속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도리언 그레이에선 이것이 자신의 초상화인데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전통을 잘 드러내는 듯 하다. 하긴 그 덕에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을 발전시켰고, 무의식 같은 것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이전에 본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100년 전 서구 문명의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맹신, 그리고 이성을 믿으면서도 무의식의 발견으로 인간 본성과 내면의 어둠에도 주목하는 시대적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파멸적 결말을 세기말적 상황을 비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살피면 도리언 그레이는 10대 후반이고 혈색이 잘 도는 하얀 피부와 무척 어울리는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이다. 성격도 외모에 걸맞게 순수하다. 사실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것에 가깝긴 했다. 집안 배경도 좋다. 귀족이며 부모가 일찍 죽긴 했지만 외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레이는 화가 바질의 모델이 된다. 바질은 그레이의 아름다운 용모와 순수함을 담아낸 그림을 그린다. 바질은 웬지 죄책감을 느낄정도로 작업에 몰입했고, 그로 인해 작품은 순수하지 못해보였다. 바질에겐 친구 헨리가 있다. 순수한 예술가인 바질에 비해 헨리는 속세의 때가 묻을때로 묻었다. 세상을 관조하고 꿰뚫어보는 달변가 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실제 생활과 정신은 그렇지 못하다. 바질은 그런 헨리가 웬지 순수한 도리언을 물들일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을 들어 맞는다. 

 도리언을 만난 바질은 최고의 초상화를 남긴다. 그리고 헨리로부터 젊음의 허상함에 대해 듣고, 관련 책도 읽기 시작한 도리언은 헨리와 어울리며 조금씩 변해간다. 젊음의 허상함을 알게된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자신의 젊음이 영원하고 늙음과 정신적 추함이 모두 초상화로 향하길 기원한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이는 곧 실현된다. 도리언은 시빌이라는 아름다운 소녀의 연극을 관람하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시빌은 도리언을 얻게되자 연기력을 잃게 되고, 이 모습을 본 도리언은 그녀에게 실망에 이별을 통보한다. 실의에 빠진 시빌은 자살하고, 도리언은 이사실을 알게 되지만 헨리의 말에 금방 죄책감에서 벗어나 연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도리언의 아름다운 초상화엔 잔인한 미소가 남겨진다. 도리언은 두려움에 빠져 초상화를 감추기에 이른다.

 이후 나이가 들어도 도리언은 십대의 미모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의 악행에 초상화의 얼굴은 노화와 내면의 잔혹함을 반영하여 망가져간다. 도리언과 어울진 사람들은 남여를 불문하고 불운해졌고, 도리언은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는 그런 거의 모습을 반영해나간다. 

 책은 과거 책 치곤 전체적으로 재밌는 편이다. 이 당시 소설이나 사람들은 인생사나, 여성, 남성, 예술, 시, 드라마, 철학, 종교 등등에 상당히 단정적인 정의내리기를 좋아하는데 포스트모던 시대를 지나온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좀 듣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이런게 크게 거슬리지 않다면 볼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나의 내면을 반영한 초상화가 있어 순수한 시점으로 계속 변해왔다면 그걸 관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자신의 초상화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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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부모님도 서울태생이고 나 역시 서울태생이며 그래서 마땅히 친가와 외가가 모두 서울인 나는 서울 이외 지역을 상상만 하고 살았다. 국딩땐 서울이 되게 크다고 생각했었고(대한민국에서 마땅히 가장 클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경기도가 더 크다는걸 알았을땐 충격이었다) 서울 이외 지역은 시골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살곤 했다. 그랬던 사람이 지방을 군생활 중 처음 경험한 이후 직장이 경기 지역에 자리하여 지방에서 가정을 꾸려 살고 있으니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서울태생임에도 지금에 비하면 많이 저렴한 2천년대 초중반의 서울 집값이 난 당시 무척 비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다 얼마 안되는 내 종잣돈과 급여를 매몰해가며 십수년을 대출과 이자를 감당하며 살아가느니 당시 부동산 값이 싼 지방에 자리 잡아 사는게 어떨까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처음 읽은 지방에 관련한 책이 강준만의 '지방은 식민지다' 였다. 모든 것이 수도권에 몰린 한국의 현실을 잘 지적하고, 지방 삶의 쾌적함과 지방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책이었다. 다음책은 '재정은 어떻게 내 삶을 바꾸는가'로 지방민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지방재정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책이었다. '지방소멸'은 일본 책으로 우리보다 앞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로 지방소멸 위기를 겪는 일본의 현 주소를 제시한 책이다. 텅 빈 집 문제와 소멸 대상 도시로 65세 이상 인구와 20-39세의 가임기 여성수를 비교해 노인 인구가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지역을 소멸 대상 지역으로 꼽았다. 지방의 생존전략으로 거점도시 개발과 주변 지역의 연계를 꼽은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본 책이 제목조차 살벌한 마강래 교수의 지방도시 살생부다.

 최근의 지방과 수도권의 상황은 더욱 극변하고 있다. 서울로의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몇년 전 마침내 서울과 인천, 경기를 합친 수도권 인구가 그 좁은 면적에도 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고 말았다. 산업구조도 2천년대 이후 재편되어 단순 제조업 중심의 지방기업은 경쟁력이 쇠퇴했고, 글로벌 기업 본사가 위치한 수도권 지역의 일자리가 더욱 고급화되고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인재는 더욱 서울로 몰렸고 양 지역의 일자리 급여차도 커짐에 따라 집값도 더욱 양극화되었다. 

 그래서인지 부동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현 여당대표가 갑작스레 세종시로의 행정수도의 완전한 이전을 주장하며 갑작스레 지방분권에 대한 관심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지방으로의 분권에 대한 생각은 무척 오래되었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수도권 과밀화는 오래된 그리고 갈수록 답이 없이 심각해지는 문제다. 언급한 것처럼 사실 정부의 지방활성화에 대한 고민과 대책 및 재정투입은 저출산 문제만큼 오래되었다. 무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지방중소도시의 인구이탈이 본격화되며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었고, 저출산문제만큼 진단을 잘못하여 그간 5조에 달하는 재정이 투입되었음에도 효과는 미미하다. 

 책 '지방도시 살생부'는 향후 20년후 위기에 빠질 지방중소도시를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15만 인구 이하의 지역으로 정의한다. 이 지역들은 2천년대 이후 인구가 꾸준히 빠지고 있는데 몇몇 지역은 최근 인구감소가 정체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희망적인게 아니며 이미 이동가능한 인구인 젊은 층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이기에 일시적 정체를 겪는 것이며 노년 인구가 사망하는 시점이 되면 본격적으로 다시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지방중소도시의 위기는 거대한 4가지 메가트렌드 때문인데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그리고 4차산업혁명때문이다. 지방도시는 세계화 이후 지방제조업이 쇠퇴하고 글로벌 대기업이 경쟁력을 갖추면서 서울등 수도권에 비해 일자리의 양과 질을 크게 줄어들었다. 때문에 젊은 층이 떠나가니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되어 인구가 줄어들었다. 거기에 저성장 기조로 인해 나라의 투자와 자원이 경쟁력있는데 집중된다. 즉, 집적효과가 큰 수도권에 더 큰투자가 된다는 셈으로 지방은 소외된다. 4차산업혁명은 인공지능과 로봇등을 활용한 자동화로 어려 직종의 인간대체 효과를 크게 가져온다. 창의성있는 고급직종이 대체를 피할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직종 역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단순제조형태와 서비스업이 집중된 지방중소도시일수록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효과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설상가상인셈이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쇠퇴원인으로 저자는 크게 4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제조업 경재력의 쇠퇴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당하며 거제나 울산, 포항, 아산, 당진, 구미, 여수, 광양등 한 산업에 특화된 지역일수록 외부 환경에 의해 더욱 취약하다. 이런 쇠퇴지역의 생존전략으로는 아예 다른 사업으로 도시의 산업을 전환하는 손떼기 전략과 급여나 후생복지등의 감소로 비용을 절감시켜 가격경쟁력을 회복하는 절감 전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역 고유의 특수성을 살려 해당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는 보존 전략이 있다. 하지만 이중 어느것도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 번째 쇠퇴요인은 지역의 자연자원이 고갈되거나 수요가 사라진 경우다. 강원도의 탄광도시들이다. 세 번째는 미군부대가 이전하는 경우로 동두천이나 의정부가 그러하다. 한국군부대의 해체 또는 이전도 요인이 될 것이다. 네 번째 요인은 교통망의 변화가 도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과거 육상교통이 미비할 때 수로 교통의 이점을 노렸던 나주가 그렇다. 

 하여튼 지방의 이런 여러 문제의 핵심에는 결국 일자리 문제가 자리한다. 건물이 부실해서도 인구가 적어서도 아니다. 문제는 일자리다. 양질의 일자리만 생긴다면 인구는 늘어나고, 서비스업도 활성화되고 기업도 알아서오며 재투자가 이루어지는 건물도 새것들이 들어서고 교통망도 확충된다. 세수도 많이 걷히니 공공인프라도 우수해진다. 양적 되먹임인 것이다.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기에 95년 지방자치가 시작된 후 지방은 일자리를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건다.

 일자리유치를 위한 지방의 첫 번째 해결책이 산업단지 육성이다. 산단은 국가산단, 일반산단, 도시첨단산단, 농공단지 4개로 구분되며 국가산업단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시군 차원에서 얼마든지 지정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렇다보니 경쟁력없이 마구잡이로 산업단지를 지자체별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상당수의 산업단지가 미분양으로 신음하고 있으며 이에 지자체들은 지자체가 미분양을 모두 떠안는다던지 그외 파격적 경제조건으로 분양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하며 이런 무리한 정책으로 인해 지방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다음은 축제다. 지방자치제의 실행이후 지방은 온통 축제판이다. 다만 주객이 전도되어 행사관계자가 항상 손님보다 더 많을 뿐이다. 지방의 행사는 총 361개 정도의 큰 행사 그리고 작은 것까지 하면 무려 1만 5천개 정도에 달한다. 상당한 재정이 투입되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자 축제는 화천의 산천이 축제가 유일하다. 그 유명한 보령 머드 축제도 적자다. 그런데 축제는 성공해도 일자리 창출효과가 미미하다. 축제의 특성상 일년 내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일자리도 일시적으로 창출되는 편이며 교통의 발달과 축제 콘텐츠와 관광 인프라 부족으로 당일치기 관광이 대개 이루어져 숙박업에도 기여가 없기 때문이다. 함평의 나비축제도 크게 성공한 편인데 그럼에도 지역의 이미지는 개선되었지만 지역 인구는 꾸준히 줄어든다고 한다. 결국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축제는 효과가 없는 셈이다. 아이러니한건 지방의 대부분 축제는 그 지역의 특색 문화와 관련 없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며 가장 성공한 화천엔 정작 산천어가 없고 함평엔 본래 나비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방을 대체 어떻게 살려야할까? 가까운 시일내에 지방을 살리지 못하면 지방은 향후 세금을 먹는 하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도시에는 도로나 상하수도, 전기, 가스, 도서관, 소방서, 경찰서, 학교등 많은 공공서비스가 제공된다. 이는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진데 문제는 인구가 좁은 지역에 모여 집적도가 높을 수록 인당 세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2016년 대도시는 주민 1인당 공공서비스를 위한 세금이 1619만원이 필요했지만 중소도시는 무려 4822만원, 군지역은 7369만원이 필요했다. 이것이 2027년엔 각각 2467만, 7568만, 1억 1739만으로 상승 예정이다. 그야말로 지방은 돈먹는 하마이지 밑빠진 독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걸 막기 위해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3가지다. 우선 고밀도 압축 개발이다. 현재의 도심재생이나 지방회생전략은 쇠퇴를 모두 막아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이미 실패한 정책이며 불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모든 지역이 인구가 늘어나고 산업지역이 될 수 있을까? 각 지자체는 모두 인구증가를 목표로 내세우는데 그들의 공약이 모두 실현되려면 남한 전역에 1600만명의 인구가 필요하다. 어불성설인셈이다. 때문에 저자는 현실을 인정하고 쇠퇴하는 지역은 과감히 쇠퇴시키되 거점지역을 고밀도로 개발하고 여기에 서비스를 집중시키고 다른 지역도 이 지역과 교통망을 통해 연결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원도심을 쇠퇴시키는 도시 외곽지역의 무분별한 아파트 공급및 개발을 막고 대형마트등의 입점도 막을 것을 제시한다. 또한 원도심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해당지역으로 이주시 이사비나 빈집 리모델링, 임대주택등을 활용하고 공공서비스 기능을 집중시키는 것을 제안한다. 

 두 번째 회생전략은 일자리 창출이다. 많은 지역이 외부기업이나 대형마트 유치를 희망하지만 설사 그들이 들어와도 지역의 고용효과는 미비했고, 지역의 부만 외부로 유출되어왔다. 따라서 지역의 문화와 특색, 특산물을 활용한 마을 기업을 제시한다. 마을 기업은 수익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대부분 지역민을 고용하며, 지역의 교류를 활성화시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장점이 있다. 정부는 마을 기업에 지원금을 공급하고 판로 및 경영지원을 통해 지원할 필요가 있으며 대규모 체인점등이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 이들 기업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역의 마지막 회생전략은 대중교통결절점 위주의 교통재편이다. 지방중소도시의 경우는 서울이나 대도시 같은 환심형 교통체계는 적합하지 않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역이 너무 광범위하고 사람들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비용을 초래한다. 때문에 저자는 선형으로 교통을 재편하고 사람들도 그에 맞게 집중배치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선형 교통에 겹치는 결절점을 중심으로 주거, 상업을 집중해야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20년 한국의 생산인구와 인구절대수는 감소하고 세계화와 경제침체로 지방과 수도권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 자명하다. 물론 통일이라는 변수와 4차산업혁명 역시 큰 변수로 다가올 가능성은 있다. 통일이 된다면 적어도 북한 전지역은 과거 남한처럼 양적성장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으며 4차산업혁명은 의외로 큰 경제성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방에 대한 회생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도시파산제도가 없기에 텅빈 비역을 버릴수 없고 안그래도 좁은 땅에 인구가 부족하다고 하여 지역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방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미리 경각심을 갖고 마을기업등의 설립으로 일자리 위주로 접근하고 지방문제를 풀기위해 지역을 스마트하게 압축 거점화하고 교통결절점을 선형강화한다면 저자의 생각처럼 지방은 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방이 이렇게 살아난다면 이는 출산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가능성이 높다. 결국 일자리 문제가 어느정도 지역수준에서도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얼마 없고 해결해야할 숙제는 많다. 정치권에 기대를 갖고 지켜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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