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대이동 - 달러와 금의 흐름으로 읽는 미래 투자 전략
오건영 지음 / 페이지2(page2)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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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경제가 코로나 19로 난리인데 자산시장은 더 난리다. 타오르다 못해 그 끝을 알기 어려운 지경이다. 열풍은 한국의 경우 부동산에서 금과 주식, 해외 주식 그리고 이젠 코인으로 옮겨갔다. 투자의 성공은 내가 산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내 자산을 다른 사람이 사 주는 경우다. 그게 무너지는 순간 투자는 실패가 되고 가격은 연쇄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가계부채도 무려 1800조에 이르러 무서울 지경이다.  

 이번에 본 부의 대이동은 이런 혼란스러운 투자상황에서 채권과 금, 달러라는 자산에 대해 논한다. 특히, 채권은 수익성이 낮아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 외의 자산인데 실제 자산 증폭 효과는 낮아도 다른 자산을 움직이는 주요 변술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금과 달러와의 상관관계와 달러가 안전자산이라는 책의 주장도 흥미로웠다. 


1. 채권

 채권은 빚에 대한 보증서다. 빚진 자는 채무자가 되고 돈을 빌려준 자는 채권자가 된다. 채권에는 얼마에 돈을 빌렸고, 어느 기간동안 얼마의 이자를 지급할지가 표시된다. 채권은 국채와 회사채로 나뉜다. 국채는 나라의 정부가 발행한 채권이고 회사채는 기업이 발행한 채권이다. 당연히 나라가 보증하는 국채가 더 안전할테니 채권금리도 회사채보다 낮다. 

 채권은 희안하게도 채권금리와 그 가격이 반비례한다. 이자를 많이 주면 돈을 많이 벌게 되는 채권인데도 이상하게도 그러하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00만원에 8%의 고정금리를 주는 채권을 산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경기불황으로 금리가 급등하여 내가 채권을 산지 한 달만에 채권금리가 20%되었다. 그렇다면 투자자는 당연히 기존의 채권을 정리하고 고금리 채권으로 갈아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자면 기존의 채권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8%금리의 채권이 20%금리 시대에 팔리기가 만무하다. 때문에 채권가격할인이 들어가야 한다. 12%만큼의 손해를 보상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리가 올라 채권의 수익성이 좋아지면 희안하게 채권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금리가 떨어지면 채권 가격은 반대의 이유로 상승한다. 

 채권이 무서운 것은 한 국가의 경기가 후퇴할 때다. 이유는 채권의 가격이 금리와 연동하기 때문이다. A라는 나라에 경제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면 A 국가에 투자한 외국인들은 위기를 느끼고 그 나라의 주식과 국채를 매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주가 하락과 채권 가격 하락이 갖이 찾아온다. 외국인들은 주식과 채권을 팔아 얻은 A 국가의 화폐를 안전자산인 달러 매입에 사용한다. 그러면 A나라에는 달러가 사라져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금리가 급상승하는 부작용이 찾아온다. A나라는 지금 미국이 하는 것처럼 자국 통화를 풀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싶지만 이미 금리가 상당히 올라있고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한 상황이라 재정정책을 펼수가 없게된다. 자국 통화를 풀면 금리의 안정은 몰라도 화폐가치는 더욱 떨어져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내수 경제침체가 오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 한국처럼 채권이 안전 자산인 나라의 경우에는 시나리오는 다르게 흘러간다. 선진국의 경기가 후퇴하면 당연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그 나라의 주식을 팔아버린다. 하지만 그 나라가 충분한 경제력으로 신용이 있다면 채권을 팔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세계적인 경제후퇴국면이라면 그 나라의 채권은 오히려 인기가 있어진다. 주가는 떨어져도 채권 가격은 오히려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채권 가격의 상승은 금리의 하락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 나라는 주식으로는 달러가 유출되지만 채권으로 인해 달러가 들어오게 되므로 자국화폐의 가치 하락을 방어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물론 내수 경기 방어가 가능해져 경제난맥에서 여러가지 재정정책도 펼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한국의 국채도 안전자산인 것으로 주장한다. 이는 좀 의외로 다가오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한국경제가 보여주는 안정성은 이를 뒷받침한다. 우선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1100원-1300원 사이의 안정적인 원/달러 환율을 보이고 있다. 고정환율제가 아님에도 긴 기간동안 상당히 안정적인 수치다. 그리고 한국은 2008 경제 위기 이후 99개월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국제사회는 해당국가를 구조적 무역 흑자국으로 인정한다. 그 나라의 산업고조상 흑자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보는 것이다. 이런 강력한 무역수지 흑자로 한국은 외환보유고가 4000억달러를 넘어선다. 때문에 한국의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다가올 미래에 한국이 채권투자국으로써 매력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이미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나라로 주식투자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강한 경제구조로 채권투자로는 적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노령화에 따른 저성장 기조가 일반화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일수록 돈을 벌기 어려워지며 노령화에 따라 각 나라가 큰 규모의 연금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 연금은 성격상 안전자산에 투자하는 경향이 짙다. 때문에 한국의 국채는 장차 여러나라에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2.달러

 선진국 국채에 이어 저자가 주장하는 두 번째 안전 자산은 달러다. 달러가 안전자산인 이유는 오랜기간동안 막강한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여러 도전을 물리치고 꾸준히 기축통화의 위치를 지켜오고 있는 점과 경기후퇴시 가치를 오히려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달러에 대한 도전을 살펴보자.

 첫 번째 도전은 1970년대 산유국들의 도전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금본위제를 철회한다. 금1온스당 35달러를 보장하던 약속이 깨어지자 달러의 가치는 급락한다. 여기에 중동전쟁으로 OPEC는 원유수출도 중단한다. 그러자 달러에 대한 환상은 깨어지고 오히려 급등한 원유를 갖고 싶어하는 국제사회의 수요가 늘어났다. 기축통화로써 달러의 첫 위기였다. 하지만 새롭게 Fed의 의장이 된 폴볼커는 1980년대 미국 금리를 무려 20%로 올려버린다. 미국내 실업자가 증가하고 기업은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달러가치는 급상승했고, 전세계적인 경기둔화로 원유수요는 감소한다. 유가는 급하락했고 OPEC가 오히려 위기에 봉착한다.

 두 번째 도전은 1980년대 엔화다. 폴볼커에 의해 달러가 초 강세를 띄자 일본의 엔화는 상대적 약세로 일본의 수출은 크게 증대한다. 미국은 막 석유파동에서 벗어난데다 긴축으로 고실업의 파고였다. 여기에 일본산 물건이 들어오니 제조업이 잠식되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에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를 강제로 두배 정상하는 합의안이 도출된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은 엔화가치가 실제보다 거의 3배 상승하여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그러자 일본은 내수에 초점을 두어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한다. 그리고 엔강세로 수출물가가 크게 떨어졌고 유가도 하락헤 국민생활이 크게 안정되었다. 하지만 부동산 버블이 강하게 일어났고 그 붕괴로 금리가 인상되며 오랜 불황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세 번째 도전은 2000년 유로화다. 미국 경제만큼의 유로존 경제가 등장하고 단일화폐가 등장하자 달러에겐 새로운 도전이었다. 하지만 유로존 내 국가들의 경제력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경우 약한 경제력으로 신용이 낮아 원래라면 고금리에 대출을 해야했지만 유로존이 형성된 이후 다른 유로국가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저금리로 대출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을 한다. 하지만 2008 글로벌 금융위기이후 더욱더 강한 경기부양이 필요해졌으나 재정적자가 감당이 안되었다. 투자자들은 위기를 느끼고 그리스에서 이탈리아, 포르투갈로 위기가 전파된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유로존은 양적완화를 실시했고 유로화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네 번째 도전은 위안화의 도전이다. 중국은 과거 달러당 8.2위안의 고정환율을 실시했다. 하지만 2005년부터 관리변동 환율제를 도입하면서 2005년 달러당 8.2위안이었던 것이 2015년 6위안까지 화폐가치가 크게 상승한다. 하지만 2014년부터 미국은 경제위기이후 풀린 돈의 회수를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달러가 초강세를 띄게 된다. 유로화와 엔화는 여전히 경기부양을 위한 양적완화로 가치가 낮은 상황이었다. 중국화폐만 상대적 강세를 띠게 되자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다시 달러당 7위안정도로 올리게 된다. 

 이처럼 달러는 기축통화로 오랜 기간 위기때마다 도전을 물리쳐왔다. 이런 강력함은 선진국 채권과 더불어 경제위기시 달러를 안전자산으로 갖고자 하는 수요를 꾸준히 만들어낸다. 때문에 저자는 안전자산으로 불황에 강한 달러를 추천하고 한번에 대량 매입보다는 경제 위기를 대비하여 적립식으로 조금씩 갖고 있을 것을 권한다.


3. 금

 금은 안전자산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가격의 변화를 살펴보면 금은 달러화와는 가치가 반비례하며 오히려 주식시장과는 비례하여 움직였다. 이말은 불황에 강한 달러 가치와는 달리 금은 불황에 약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안전자산이 아니라는 셈이다. 

 과거 금은 금본위제로 화폐에 대한 담보로 사용디었다.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는 금 1온스당 35달러의 가치를 보장하였고 세계 각국은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화폐를 찍어낼 수있었다. 때문에 각국은 고정환율제를 택하였고 자신들의 화폐가치를 달러화에 고정하였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미국이 1-2차대전 중 유럽에 많은 돈을 빌려주고 큰 폭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문제가 있었다. 경제규모와 교역의 규모가 커지면 더 많은 화폐의 발행이 필요하지만 금에 화폐가 묶이므로 이것이 어려웠다. 실제 경제공황때 극복이 어려웠던 것도 적기에 필요한 곳에 화폐공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의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려면 전세계에 달러가 퍼져야만 했다. 달러를 퍼뜨리려면 다른 나라에 무상 원조를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혹은 미국이 여러 나라에 큰 폭의 무역적자를 가져야만 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기축통화국이 된후 전통적인 흑자국에서 상당한 무역 적자국으로 돌변하게 된다. 하지만 해외투자자가 보기에 이는 불안요소였고 미국에 달러대신 금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 이로 인해 1971년 닉슨에 의해 금본위제가 철폐된다. 달러의 담보가 사라지자 달러가치는 하락하고 반면 금가치는 상승한다. 금은 70년대에 황금기를 맞는다.

 하지만 달러가치가 절하되자 폴볼커에 의해 고금리 정책이 실현된다. 이는 달러 가치의 상승을 가져왔다. 그의 정책은 가혹했으나 향후 인플레이션을 막아내고 초 고금리로 강한 기업만 살아남는 구조조정이 일어났고, 물가는 안정되고, 유가도 하락하였다. 미국은 우량기업 중심으로 2000년까지 강한 호황을 맞는다. 달러는 초강세를 보였고 금은 무려 20년가까운 암흑기를 맞는다. 

 최근 금가격은 경기후퇴로 인한 저금리 및 양적 완화가 이루어질때만 상승세를 보인다. 하지만 달러가치는 강한 미국 채권과 미국의 경제력으로 크게 하락하지 않기에 달러가치와 반비례 연동하는 금은 안전자산으로서는 가치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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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지음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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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광대한 인구와 영토를 자랑하는 중화왕조와 강한 군사력을 갖춘 기병 위주의 북방 유목민족을 지척에 두고도 멸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해왔다. 이는 산과 강, 삼면이 바다라는 자연방어책(하지만 인도와 중국사이의 히말라야처럼 절대 못 넘을 만한게 못된다)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국방력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막아냈고, 고려는 요와 금, 원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그리고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수십년간 전쟁으로 단련되고 조총이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왜를 막아내었다.

 물론 참담한 패배가 없던 건 아니다. 고조선은 1년의 농성끝에 한에 왕검성이 점령되어 멸망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는 결국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한반도 혹은 만주에 기반한 우리나라 왕조를 멸망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침략국가는 수년 혹은 수십년 간의 인적 물적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국답지 않은 어이없는 패배가 있으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끝난 전쟁이며 왕이 포위되어 굴욕적 항복을 하고 수십만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는 대사건이었다. 한국의 역사에 이런 굴욕적 패배가 어디 또 있을까. 그런 병자호란의 패배를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청 태종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이 책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다. 


1. 전쟁 발발과 청의 전력

 정묘호란 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조선 역시 명과의 사대가 있었지만 후금의 군사력을 당해낼수 없었기에 상당히 맹약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조정에서는 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침략을 조심하고 방비를 강화하라는 교서를 변방에 내렸는데 이것이 그만 청의 사신단에 넘어가고 만것이다. 청은 이를 절화교서로 규정하고 조선이 맹약을 어긴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홍타이지의 칭제 사건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정묘호란), 자하르 정복, 그리고 과거 원황제의 옥새를 손에 넣고 이 업적을 바탕으로 칭제를 한다. 하지만 당시 청에 와있던 조선의 사신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홍타이지의 칭제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명의 최대 조공국인 조선의 이런 반항은 홍타이지 입장에선 자신의 칭제의 정당성을 상당히 부인하는 사건이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의지는 이로써 확고해지게 된다. 

 혹자들은 조선 침략을 명을 정벌하기 이전 후방을 정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과 명, 청의 지정학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하지만 정묘호란 이후, 아직 왜란의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이미 청의 후방을 공격할 능력과 의도가 없음을 청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명공격을 위한 후방 정리가 아닌 그 자체가 목표였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홍타이지는 조선 공격전 명의 후방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북경 일대에 대대적 침공을 가해 약탈을 감행한다. 

 병자호란이 조선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는 친정이다. 고대로부터 어느 왕조든 친정은 매우 큰 부담이 따르는 사건이다. 황제나 왕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적의 내지로 직접 들어가 친정하는 것은 조선정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조선정벌에 상당한 우선순위를 두었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청이 동원한 전력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절대 큰 나라가 아니었다. 국방력을 막강했을 지언정 인구는 130-240만정도로 명에 비하면 인구수나 경제력면에서 1%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라였다. 이중 청의 군대인 팔기만주의 남자 총인구수는 34만정도였다. 게다가 이중 21만은 자유민이 아닌 한인 출신의 노복으로 그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 결국 징병 가능 청의 총 인구수는 12만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은 절대적 패배를 강조하기 위해 청의 군사가 30만이거나 12만 8천정도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홍타이지는 그럼에도 조선 정벌에 무려 3만4천의 병력을 동원한다. 팔기만주와 팔기몽고가 1만 우전초하 1만, 명에서 항복한 천우, 천조병 2천, 외몽고병사 1만2천이었다. 총력전이었던 셈이다. 


2. 조선의 방어전략과 청의 공격전략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여진인의 강력한 군사력을 맛보았다. 1619년 심하천투를 통해 조선은 적과 평지전에서 조우하면 승산이 전혀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낮은 평지성의 공성 능력 역시 적은 매우 뛰어났다. 때문에 조선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적 침공시 기병이 점령이 어려운 산성으로의 입보였다. 조선의 방어선은 3중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황해도 방어선이었다.

 압록강은 너무 길기에 모든 지역을 방어할 수 없어 침공로로 예측되는 의주와 창성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전쟁발발시 이 지역 군사들은 백마산성과 당아산성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청천강 방어선은 안주와 영변으로 안주는 적이 의주로 침공할시, 영변은 적이 창성으로 침공할시 방어기점이 되었다. 안주성에는 평안병사 유림을, 영변의 철옹산성에는 부원수 신경원에세 수천의 정예병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 양지역은 서로 기각지세로 서로 위험할 경우 응원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마지막은 황해도 방어선으로 황주와 평산일대였다. 황주는 홍산 근처의 정방산성에 도원수 김자점에 평산지역은 태백산성이었다. 

 이런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년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둔것으로 정묘호란시 청은 주요 평지성들을 손쉽게 점령하였고 요충지에서 만난 조선군을 쉽게 격파하였다. 때문에 산성으로 피신하여 요충지가 점령당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 적을 불리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조정은 상황에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는게 전략의 골자였다.

 하지만 청의 공격전략은 이런 조선의 전략과 확연히 달랐다. 청은 정묘년과는 다르게 조선의 항복이 목적이었으므로 요충지의 점령에는 관심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도성을 포위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제 일 목적이었다. 또한 침공로 역시 한군데가 아니라 두곳이었다. 청은 의주와 창성 두지역으로 모두 침공한다. 하지만 의주로 침공한 부대는 빠르게 전격전을 감행한 반면 창성으로 침공한 부대는 요충지를 점령하면서 천천히 진군했다. 빠른 전격적은 보급로의 문제와 고립의 문제가 있으므로 양자를 병행해 약점을 보완하려던게 아닌게 생각된다. 하여튼 이런 청의 방식은 조선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킨다. 

 홍타이지는 선발대 300명을 상인으로 변장시켜 진군시켰는데 이들은 한양도성에 불과 침공 후 4일만에 도달한다. 이런 빠른 진군에 조선 조정은 겁을 집어먹고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한다. 강화도 파천에는 3-4일의 말미가 필요한데 이런 시간을 방어선들이 벌어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처음 도달한 선발대는 소규모였으므로 충분히 강화도로 파천이 가능했지만 청의 전광석화 같은 진군으로 혼란스럽게 도달하는 장계에 정신이 빠진 조선 조정은 그런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인조는 부랴부랴 남한 산성으로 입성한다. 물론 청의 포위망이 완성되기전 남한산성에 갇힐 것을 우려해 성을 나오려 하였지만 날씨가 이를 돕지 않았다. 이 처럼 전방 조선군의 산성입보는 이처럼 청의 전격전에 큰 도움이 되고 말았다. 

 계절도 문제였다. 만주에서 한양까지는 큰 여러개의 강이 있다. 압록강, 청천강, 예성강이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전격적은 위해 겨울까지 침공을 기다린다. 1월이 되어 강이 모두 얼자 청의 기병은 빠른 속도로 도하가 가능했다. 물론 1월이라고 강이 반드시 어는 것은 아니었지만 17세기는 전세계적인 소빙기로 무척 추웠고, 진군시기에 유독 추워 날씨가 청을 도왔다.  


3. 무너지는 조선군

물론 남한산에 갇혔어도 희망은 있었다. 강화도로 두 대군이 종묘사직을 들고 피신하였으며 청의 전격적으로 전장의 방어군이 그래도 온존했다. 또한 남4도의 근왕병 역시 기대할만 했다. 병자년 당시 조선은 국력이 피폐했지만 전란의 기운 속에 꾸준한 준비로 대충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3만 4천 전체가 최정예병인 청군과 단순하 숫자비교는 무리지만 3배에 달하는 순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 자체의 병력도 1만2천이었다. 남한산을 포위한 청군을 오히려 안팎으로 협공할수도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희망일 뿐이었다. 점령하며 창성으로 침공해온 청의 동로군은 당아산성을 함락하고 영변의 철옹산성도 공격한다. 그리고 이들은 영변에서 부원수 신경원과 김자점을 토산에서 격파한다. 이에 평안도의 홍명구와 유림도 남한산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한다. 하지만 청의 요격을 피해 동으로 크게 우회하여 진군이 늦어졌고 강원도 김화에서 오히려 북상하던 외번 몽고부대와 격돌하여 궤멸당한다. 

 남은 것은 남부 4도의 근왕병뿐이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충청도가 먼저 움직였다. 충청 감사 정세규는 용인의 험천에 충청병사 이의배는 안성의 죽전 산성에 진을 친다. 이들은 청의 기세가 대단하여 단독으로 붙기보다는 전라와 경상의 병사와 합류하여 대군을 이룰 요량이었다. 하지만 청군은 험천의 군을 격파하고 이를 구원하던 이의배의 군사도 격파한다. 그리고 원정길이 이끌던 강원의 군사다 검단산에서 격파한다. 

 1만에 달하던 경상의 군사가 전장에 도착하여 쌍령에 진을 쳤다. 하지만 청군은 고작 300의 기병으로 이들을 격퇴한다. 사상자만 3천여명에 달할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 마지막은 전라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가장 먼 거리였던 만큼 전란후 13일만에 광교산에 북상한다. 광교산의 김순룡은 청군을 상대로 모처럼 승리를 거둔다. 청은 지휘관 양구리가 전사할 정도였으며 큰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화살과 양식 부족으로 전라군은 수원으로 피신하고 오히려 청에게 군마를 1140필이나 노획당하고 만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처럼 하4도와 황해, 평안도의 군사가 궤멸당하자 남은 것은 아직 남진하지 않은 함경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미원에 심기원과 합류하여 무려 2만 3천의 병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의 마지막까지 참전하지 않는다 청군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차례로 궤멸한 다른 군을 보았기 때문이다. 


4. 강화도 함락

청군은 1637년 2월 16일 강화도를 공략한다. 광교산 전투후 16일이 지나서였다. 강화도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상당히 넓은 면적의 해도이면서도 험준한 해안 지형과 넓고 깊은 수렁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거기에 임진년에 보여준 것처럼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청은 수군의 개념이 아예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런 강화도가 하루만에 함락된다. 왜였을까?

 조선의 강화도 방어전략은 해상에서의 저지였다. 강화도와 경기도 사이에는 염하수로가 흐른다. 이 수로는 조류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때문에 판옥선의 진군 및 주둔이 어려웠다. 또한 당시는 겨울로 강에 얼음이 얼어 있어 배로의 도하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조선군은 염하수로의 북쪽입구인 연미정과 남쪽 입구인 광성진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북쪽으로의 상류이 더 어려웠기에 남쪽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강화도엔 1600의 병력이 있었는데 600은 이미 다른 지역의 구원을 위해 나간 상태였다. 즉, 상륙을 방어할만한 혹은 상륙한 적을 상대할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닌 이야기다. 

 때문에 강화도는 청의 기습 상륙에 하루만에 무너진다. 강화도를 공격한 청의 병력은 3만으로 알려져있지만 이 병력은 청의 전군이다. 청은 강화도 공략에 44척의 배를 동원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그들의 병력은 3200정도로 추정된다. 청은 강화도 지형과 조수의 이치를 잘 깨닫고 갑곶진으로 기습 상륙했는데 여기엔 향화호인이 한 몫은 한것으로 추정된다. 향화호인은 귀화한 여진인으로 조선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정묘년부터 조선인들은 이들의 배신을 의심하였는데 병자년에 이것이 현실화한다. 향화호인들의 정보로 인해 청은 강화도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갑곶진으로 상륙한다. 반면 조수의 역흐름에 걸린 조선 함대는 제대로 진군하지 못해 이를 막지 못한다.


5.갑작스런 항복 권유와 신속한 철군

 이처럼 조선의 전황이 절망적이었음에도 청의 항복 조건은 매우 후했다. 인조의 출성과 척화신 2-3명의 박송이었다. 하지만 이 후한 조건도 조선에겐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하가 척화신이라 2-3명의 희생양을 마련하기도 어려웠고 오랑캐의 말을 믿고 출성했다 왕이 낭패를 볼수 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국 송의 휘종과 흠종은 금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죽었과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황이 좋지 못하고 남한산이 완전 포위되어 바깥으로부터의 소식도 끊기자 조선은 점차 저자세로 변해간다. 하지만 청은 인조의 출성을 끝까지 고집하며 오히려 회담을 거부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청이 빠른 화의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조선조정은 근왕군의 승리나 명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책의 저자는 홍타이지의 이런 태세전환이 다름 아닌 천연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절멸된 병이지만 천연두는 18세기 매년 40만의 희생자를 내던 무서운 병이었다. 천연두는 남부지역의 병으로 만리장성 이북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시절에 이르기까지 만주에는 만, 한, 몽 연합 거주가 나타난다. 특히 한족이 문제였는데 이들과 함께 천연두도 자연히 따라와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청은 천연두를 앓고 살아남은 숙신과 아직 감염되지 않은 생신을 구분하고 명 내지를 공략할때는 숙신들을 주로 투입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마찬가지 였는데 당시 서울엔 이미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전격전을 위해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침공시기로 정했지만 그 시기는 천연두가 창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홍타이지 어영 주변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빠른 태세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홍타이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오래머물지 않고 빠른 철군을 한다. 서울은 물론이고 어떤 중소도시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마중을 나온 조선의 관원들도 모두 피했다. 천연두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방역을 중심에 둔다면 이해가 가는 면이다. 

 항복 후 인조는 생각보다 후한대접을 받는다. 원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는 오랜 저항과 쿠빌라이라는 유력자를 알아보고 제대로 항복하여 부마국의 대접을 받았지만 인조의 조선은 의외였다. 홍타이지는 삼전도의 의례후 인조를 청의 주요 친왕들보다 더 높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 즉 2인자의 자리에 앉힌다. 조선에 대한 대접이었다. 이를 향후 청이 중원을 제패한 후 만든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생각보다 높은 위상을 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병자호란에 대해 여러 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특히,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청의 만문 사료를 많이 활용하여 객관적이지 못했던 부분의 새로운 퍼즐을 맞춰낸 느낌이다. 멸망 직전의 조선을 살린 것이 평소 조선 백성을 괴롭히던 천연두라는 사실이 재밌다. 과학기술이 절정에 달한 지금처럼 과거에도 최강국일지라도 감염병에는 맥을 못췄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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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30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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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도 더 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클림트 전을 했던게 기억이 난다. 한국에 온 진품은 일부고 주요 작품은 그냥 화면으로만 전시했던 기억이다. 지금보다도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였는데 클림트의 작품은 상당한 끌림이 있었다. 화려하고 그림을 정말 잘 그렸음에도 이상하게도 그림 속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풍경이 마치 이질적인 타일을 붙여놓은 듯 했다. 그리고 그 타일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이 많았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가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여성만 그렸는데 무엇이나 사랑이 고픈 사람이거나 사랑을 많은 받은 사람일거 라고 생각했었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갑자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마구 떠드니 당시 같이 갔던 사람은 무척 이상하게 여기며 말많다고 불편해했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구스타프라는 이름에 스웨덴일거라 생각했었다. 클림트는 1852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태어나 1918년에 죽었다. 그가 살던 시기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빈에서 살아간 클림트도 도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란츠요제프 1세의 치하에 있었다.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아들인 그는 전통주의자였다. 19세기 였음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입헌군주제가 아닌 직접 통치를 하였으며 전기와 자동차, 수세식 화장실도 거부할정도로 꼰대였다.  

 그래서 19세기 말의 빈의 분위기는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다른 나라와 무척 달랐다. 요제프주의와 비더마이어로 대표될수 있는데 요제프주의는 황제의 강력한 왕권과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예술사업 독력, 비더마이어는 이런 전제정치로 시민들의 정치적 무기력과 소시민주의, 정치적 체념, 카톨릭신앙심, 독일 특유의 순응주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매료가 결합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빈의 예술 역시 모더니즘이 판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전통을 중시한다. 

 클림트는 이런 분위기에서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금을 잘 다룰 수 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한데, 그는 어린나이부터 예술가컴퍼니를 구성하고 주어진 천정화 작업을 잘 수행하면서 좋은 편팡을 얻게 된다. 당시의 천정화나 그림들은 매우 전통적인 형식으로 클림트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 스타일로 변하자 그는 곧 같은 컴퍼니 사람들과 결별하게 된다.

 그런 클림트가 들어간 곳이 빈 분리파다. 빈 분리파는 모더니즘의 바람을 빈에 도입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빈 특유의 분위기처럼 인상파나 야수파보다는 장식 예술과 건축에 매료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1회 전시회는 아바가르드 예술이 전 유럽에서 외면과 경멸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당국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여러 민족을 병합하고 있어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문화 말살이라는 제국내 민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클림트는 1901년 완성한 유디트에서 처음으로 금박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전통주의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전통을 뛰어넘을 뭔가를 원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 여행으로 그 답을 찾아낸다. 1500년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제작된 라벤나 모자이크가 그것이다. 동로마제국의 모자이크 예술양식에서 그는 원형의 순수와 위대함, 그리고 금이라는 재료가 주는 영원과 무한함에 눈을 뜨게된다. 클림트는 거기서 평면성의 상징성을 발견하고, 평면자체가 오히려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새로움을 깨닫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가장 먼 과거를 향해 예술과 종교의 원형을 향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하에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탄생한다. 키스, 유디트, 물뱀1, 다나에, 베토벤 프리즘, 아델레블로그-바흐의 초상화들이다. 클림트는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워낙 많은 습작을 하며 시간을 두는 까닭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클림트의 다음 변화는 풍경화와 장식과 동양의 세계다. 1908년정도를 기점으로 클림트는 더이상 황금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문양과 모자이크 풍의 황금대신 인물은 그대로지만 그를 덮고 있는 상징과 문양이 동양적인 것으로 바뀐다. 동양적 문양과 색상이 인물을 뒤덮게 된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클림트는 이전에는 상당히 신비롭고 공허한 분위기는 나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빈에 주로 머물렀지만 일년에 두어달 가량을 아더 호수에 머물렀다. 자연히 아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건물이 항상 없었지만 이 시기부터 풍경화에 건물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클림트는 나이가 들며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집착한다. 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58세에 죽었는데 자신 역시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될거라는 공포와 집착이 있었다. 그는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했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같은 증상으로 죽고만다. 클림트는 자신이 살아간 오스트리아처럼 모순의 예술과 모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모더니즘을 추구했고, 수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한명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의 삶이 그림에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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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담겨 있는 사시사철 생태놀이
박항재.옥흠.박병삼 지음, 소노수정 그림 / 뜨인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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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을 목표로 자연물을 주로 이용하거나 생물의 습성을 토대로 여러가지 놀이를 하는 것이 생태놀이다. 도시에 살고,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도 아파트건물 같은 학교에 머무는 아이들에게 이런 생태놀이도 필경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이론적 토대는 플로러닝에서 따왔다. 플로러닝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물이 흐르듯 이어지는 놀이나 활동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4가지 동물의 특성에서 각 단계가 비유적으로 나왔는데 수달, 까마귀, 곰, 돌고래다. 

 1단계인 수달에서는 하루종일 어른이 되어도 장난을 치는 수달의 열정에 빗대 재미있고 활동적인 놀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마음을 만드는 단계다.2단계는 까마귀로 까마귀의 민첩하고 지적인 관찰력을 빗대어 오감을 집중하고 활용하는 놀이를 통해 감성을 높이고 관찰력을 기르는 단계다. 3단계는 곰으로 곰이 온몸으로 자연을 만나는 것이 비유해 자연을 몸으로 직접 느끼는 놀이나 활동을 통해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는 단계다. 4단계는 초음파로 서로 의사소통 하는 돌고래의 습성에 비유해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서로 나누는 놀이나 활동을 통해서 감동이 한층 깊어지고 유대감을 강화하는 단계다. 

 책은 이 4단계에서 몸과 마음을 열어요, 함께 알아봐요, 온몸으로 놀아요, 감동을 나눠요 의 4단계로 모든 놀이를 구성했다. 

 놀이도 놀이지만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과학적 설명도 많다는 것이다. 다람쥐, 청설모, 어치등은 도토리를 좋아한다. 타닌의 떨떠름함 맛 때문에 사람은 묵이나 쑤어야 간신히 먹지만 많은 동물들에게 도토리는 소중한 식량이다. 이들은 도토리를 땅에 묻고 보관하는데 땅속은 습도가 높고 온도도 높아 도토리가 싹 틔우기 좋은 여건이다. 또한 어치의 경우 자신이 보관한 도토리의 무려 70-90%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플라나리아는 생긴것과는 다르게 1급수에 산다. 플라나리아는 항문이 없고 입만 있는데 입이 머리 부분에 있는게 아니라 몸통부분에 위치한다. 그래서 먹이를 발견하면 몸통부분에서 긴 집게가 나와 먹이를 뜯는다. 현대의 공중급유기는 이런 플라나리아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공중급유기들의 기름 탱크는 몸통에 있으니 당연히 거기서 긴 집게가 나와 서로 연결하여 급유한다. 

 경기 고양 장항습지에는 말똥게와 버드나무 군락이 있다. 둘은 공생관계인데 버드나무 주변 생태계에서 말똥게가 먹이를 얻고 나무위로 오르거나 숨어 천적을 피신한다. 말똥게는 버드나무 밑에 굴을 판다. 그 굴의 크기가 공교롭게 버드나무 뿌리 굵기와 거의 맞다. 그래서 나무 뿌리까지 산소가 닿아 성장이 좋고 말똥게의 배설물이 거름 역할을 한다. 말똥게는 과거 주민들이 이를 삶아 먹으려 했는데 말똥냄새가 났다 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나비와 나방은 차이가 있는데 나비는 주로 주행성이고 나방은 야행성이다. 나비는 앉을 때 나비를 접는데 반해 나방은 날개를 그대로 펴고 앉는다. 나비는 더듬이가 방망이 모양이지만 나방은 빗살 모양이다. 

 책에 있는 놀이는 아이들이 꽤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다. 자연물을 손으로 느껴서 뽑아 무엇인지 맞추거나 포식과 피식 관계를 주로 착안하여 서로 잡고 쫓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 포식이란게 생각보다 힘들고 자연의 균형이란것도 몸으로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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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학교 공간 이야기
고은석 외 지음 / 북트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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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본 학교공간개선 책들은 사실 장밋빛 같았다. 책에 수록된 사진 하나하나가 정말 예뻤고, 이런 학교라면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만족하며 아름다운 교육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학교를 짓기 위해서 수면 아래서 열심히 그리고 처절하게 갈퀴를 휘저어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이 책에 수록되었다. 책 표지에는 교육청 추천도서인데 정말 처절하게 교육청을 비판한다. 

 아직 학교공간 개선이 어색하던 2017년 한적한 광주광역시의 작은 시골학교에 한 선생님이 학교공간 개선을 추진한다. 혁신교육감이 등장하고, 학교 공간에 대해서도 윗선에서 나름 떠들고 약속도 하던터라 기대에 부풀었다. 힘들게 선생님들, 학부모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 거의 교육기부다 싶은 금액으로 업체도 입찰한다. 이 모든걸 학교 선생님이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데 교육청이 어깃장을 놓는다.

 분명 사용자 참여설계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원하는 실과 교실 갯수를 물어보고 총액을 설정해버린다. 교육주체들의 의견이 반영된 주요 시설들도 안전을 이유로 관행을 이유로 법을 이유로 퇴짜놓아 버린다. 아마 지금 어른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일선 학교에 그네가 없다는 사실을. 대충 10여년 전인가 한 아이가 그네에서 놀다 다쳤고 그후로 안전을 이유로 학교에선 그네가 사라졌다. 그 뿐이 아니다. 십수년을 멀쩡히 있던 놀이터를 갑자기 안전진단을 했고 그 멀쩡한게 대부분 안전진단 불합격을 하자 반년 혹은 수개월을 펜스를 쳐놓고 아이들이 이용못하게 했다. 그리고 돈을 들여 기존 것과 거의 다를바 없는 새로운 놀이터를 구축했다. 이게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여튼 건축에서도 비슷했나보다. 벽돌을 흰색으로 하고 싶다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단가를 맞추느라 붉은 벽돌을 가져오고, 간신히 주무관을 가르치고 시선을 유도해놓으면 어느샌가 보직이 변경되어 다른 사람이 와서 다시시작하게 만든다. 교육장이나 장학사니 하는 사람들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그들을 비판하는데 이런건 정말 필요하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했다고 호되게 나무라고 비판해야 한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계적 균형이나 맞추고 앉아야 할까나.

 학교공간 개선에 있어 저자는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한다. 그 단계가 유용해보인다. 우선 학생 워크숍

1. 기억하자

-일상을 기억하고 학교를 들여다보기

2.탐색하자

-학교지도 표현하고 장소 소개하기

3.만들자

-내가 바라는 학교 전체 모습 구상하기

4.상상하자

-키워드 배치를 바탕으로 학교 공간 모형 만들기

5.공유하기

-우리가 바라는 미래 학교 이야기하기


교사 워크숍

1.학교 살펴보기

-학교에 대한 이미지, 우리 학교에 해당하는 단어, 교사들의 장소 인식 및 현황 해석

2.학교의 구조, 공간과 행위

-학교의 구조 파악, 우리 학교에서 원하는 활동과 공간의 해석

3.학교의 환경 비전과 요구

-우리 학교 기대공간과 공간 내 활용

4.교실 보기와 학교공간 구성

-학교 교실 활용 현황과 관련 영역 확인


학부모 워크숍

1.학교 일상의 기억

-학교에서 가장 기억나는 하루 표현하기, 학교 지향점 공유

2.학교 공간의 탐구

-교육 지향점에 따른 공간 키워드, 키워드가 담긴 학교 공간 이미지 표현하기

3.교육 공동체속 학교 공간의 지향점 찾기

-학교교육 공동체의 의미와 지향점, 교육 공동체의 구체적 역할 놀이

4.다시 만든 학교에 가기

-학교 공간 디자인 이슈 발견하기, 학교 필요공간 도출, 교실의 역할과 범위 논의


책은 학교 공간개선에 관한 책이지만 학교교육과정에 과한 논의도 깊다. 양자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근무한 학교는 분교였다고 다시 본교가 될정도로 무척 작은 학교였다. 그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 정말 많은 예술활동과 도전활동이 학교교육과정에 들어차있었다. 때문에 담임교사가 무엇을 할 여지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는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학교교육과정은 목표와 방향성만을 제시해야지 지나치게 촘촘하면 안된다고 한다. 

 또한 학교교육과정에 안식년도 필요하다고 한다. 첨 듣는 주장인데 신박하다. 모두가 과도한 교육과정에서 버리기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사실 다 필요해서 뭣하나 버릴게 없다. 이럴때 다 같이 한번 유예하는 안식년을 두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 번 안해보면 그 필요함과 필요없음에 대해 절감하지 않을까나. 

 마지막으로 재밌던건 학교 공간 개선 과정에서 남향건물에 대한 포기였다. 건축업체는 관성처럼 남향 교사건물을 디자인해왔는데 그리되면 아이들이 운동장으로의 접근성과 동선이 크게 퇴행하였다. 때문에 건물을 서향으로 바꾸어 동선을 확보했다. 또한 학교 교실이 남향일 경우 수업시간인 낯시간에 해가 강하게 들이쳐 하루종일 블라인드를 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남향이 가장 효과적인 겨울철 정작 학생을 방학이라 학교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참 좋았다. 또한 최근 학교공간 혁신에서 아이들의 운동장 및 숲속, 텃밭등으로의 접근성을 강조해 교실을 1층에 배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학교 아이들은 작은 학교 아이들이어서인지 1층 교실을 싫어했다. 높은 곳에서 학교의 풍경을 조망하고 싶어했고 그 결과 3-6학년 학생들은 2층에서 생활하게 건축이 진행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들 아파트에 살아서 익숙해서 그렇지 어릴적 단독 살땐 항상 높은 풍경을 그리워했다. 높은 곳이 주는 묘미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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