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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ㅣ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평점 :
10년도 더 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클림트 전을 했던게 기억이 난다. 한국에 온 진품은 일부고 주요 작품은 그냥 화면으로만 전시했던 기억이다. 지금보다도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였는데 클림트의 작품은 상당한 끌림이 있었다. 화려하고 그림을 정말 잘 그렸음에도 이상하게도 그림 속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풍경이 마치 이질적인 타일을 붙여놓은 듯 했다. 그리고 그 타일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이 많았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가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여성만 그렸는데 무엇이나 사랑이 고픈 사람이거나 사랑을 많은 받은 사람일거 라고 생각했었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갑자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마구 떠드니 당시 같이 갔던 사람은 무척 이상하게 여기며 말많다고 불편해했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구스타프라는 이름에 스웨덴일거라 생각했었다. 클림트는 1852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태어나 1918년에 죽었다. 그가 살던 시기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빈에서 살아간 클림트도 도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란츠요제프 1세의 치하에 있었다.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아들인 그는 전통주의자였다. 19세기 였음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입헌군주제가 아닌 직접 통치를 하였으며 전기와 자동차, 수세식 화장실도 거부할정도로 꼰대였다.
그래서 19세기 말의 빈의 분위기는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다른 나라와 무척 달랐다. 요제프주의와 비더마이어로 대표될수 있는데 요제프주의는 황제의 강력한 왕권과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예술사업 독력, 비더마이어는 이런 전제정치로 시민들의 정치적 무기력과 소시민주의, 정치적 체념, 카톨릭신앙심, 독일 특유의 순응주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매료가 결합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빈의 예술 역시 모더니즘이 판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전통을 중시한다.
클림트는 이런 분위기에서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금을 잘 다룰 수 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한데, 그는 어린나이부터 예술가컴퍼니를 구성하고 주어진 천정화 작업을 잘 수행하면서 좋은 편팡을 얻게 된다. 당시의 천정화나 그림들은 매우 전통적인 형식으로 클림트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 스타일로 변하자 그는 곧 같은 컴퍼니 사람들과 결별하게 된다.
그런 클림트가 들어간 곳이 빈 분리파다. 빈 분리파는 모더니즘의 바람을 빈에 도입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빈 특유의 분위기처럼 인상파나 야수파보다는 장식 예술과 건축에 매료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1회 전시회는 아바가르드 예술이 전 유럽에서 외면과 경멸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당국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여러 민족을 병합하고 있어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문화 말살이라는 제국내 민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클림트는 1901년 완성한 유디트에서 처음으로 금박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전통주의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전통을 뛰어넘을 뭔가를 원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 여행으로 그 답을 찾아낸다. 1500년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제작된 라벤나 모자이크가 그것이다. 동로마제국의 모자이크 예술양식에서 그는 원형의 순수와 위대함, 그리고 금이라는 재료가 주는 영원과 무한함에 눈을 뜨게된다. 클림트는 거기서 평면성의 상징성을 발견하고, 평면자체가 오히려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새로움을 깨닫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가장 먼 과거를 향해 예술과 종교의 원형을 향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하에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탄생한다. 키스, 유디트, 물뱀1, 다나에, 베토벤 프리즘, 아델레블로그-바흐의 초상화들이다. 클림트는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워낙 많은 습작을 하며 시간을 두는 까닭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클림트의 다음 변화는 풍경화와 장식과 동양의 세계다. 1908년정도를 기점으로 클림트는 더이상 황금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문양과 모자이크 풍의 황금대신 인물은 그대로지만 그를 덮고 있는 상징과 문양이 동양적인 것으로 바뀐다. 동양적 문양과 색상이 인물을 뒤덮게 된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클림트는 이전에는 상당히 신비롭고 공허한 분위기는 나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빈에 주로 머물렀지만 일년에 두어달 가량을 아더 호수에 머물렀다. 자연히 아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건물이 항상 없었지만 이 시기부터 풍경화에 건물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클림트는 나이가 들며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집착한다. 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58세에 죽었는데 자신 역시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될거라는 공포와 집착이 있었다. 그는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했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같은 증상으로 죽고만다. 클림트는 자신이 살아간 오스트리아처럼 모순의 예술과 모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모더니즘을 추구했고, 수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한명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의 삶이 그림에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