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지음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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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광대한 인구와 영토를 자랑하는 중화왕조와 강한 군사력을 갖춘 기병 위주의 북방 유목민족을 지척에 두고도 멸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해왔다. 이는 산과 강, 삼면이 바다라는 자연방어책(하지만 인도와 중국사이의 히말라야처럼 절대 못 넘을 만한게 못된다)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국방력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막아냈고, 고려는 요와 금, 원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그리고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수십년간 전쟁으로 단련되고 조총이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왜를 막아내었다.

 물론 참담한 패배가 없던 건 아니다. 고조선은 1년의 농성끝에 한에 왕검성이 점령되어 멸망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는 결국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한반도 혹은 만주에 기반한 우리나라 왕조를 멸망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침략국가는 수년 혹은 수십년 간의 인적 물적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국답지 않은 어이없는 패배가 있으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끝난 전쟁이며 왕이 포위되어 굴욕적 항복을 하고 수십만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는 대사건이었다. 한국의 역사에 이런 굴욕적 패배가 어디 또 있을까. 그런 병자호란의 패배를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청 태종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이 책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다. 


1. 전쟁 발발과 청의 전력

 정묘호란 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조선 역시 명과의 사대가 있었지만 후금의 군사력을 당해낼수 없었기에 상당히 맹약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조정에서는 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침략을 조심하고 방비를 강화하라는 교서를 변방에 내렸는데 이것이 그만 청의 사신단에 넘어가고 만것이다. 청은 이를 절화교서로 규정하고 조선이 맹약을 어긴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홍타이지의 칭제 사건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정묘호란), 자하르 정복, 그리고 과거 원황제의 옥새를 손에 넣고 이 업적을 바탕으로 칭제를 한다. 하지만 당시 청에 와있던 조선의 사신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홍타이지의 칭제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명의 최대 조공국인 조선의 이런 반항은 홍타이지 입장에선 자신의 칭제의 정당성을 상당히 부인하는 사건이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의지는 이로써 확고해지게 된다. 

 혹자들은 조선 침략을 명을 정벌하기 이전 후방을 정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과 명, 청의 지정학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하지만 정묘호란 이후, 아직 왜란의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이미 청의 후방을 공격할 능력과 의도가 없음을 청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명공격을 위한 후방 정리가 아닌 그 자체가 목표였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홍타이지는 조선 공격전 명의 후방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북경 일대에 대대적 침공을 가해 약탈을 감행한다. 

 병자호란이 조선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는 친정이다. 고대로부터 어느 왕조든 친정은 매우 큰 부담이 따르는 사건이다. 황제나 왕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적의 내지로 직접 들어가 친정하는 것은 조선정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조선정벌에 상당한 우선순위를 두었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청이 동원한 전력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절대 큰 나라가 아니었다. 국방력을 막강했을 지언정 인구는 130-240만정도로 명에 비하면 인구수나 경제력면에서 1%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라였다. 이중 청의 군대인 팔기만주의 남자 총인구수는 34만정도였다. 게다가 이중 21만은 자유민이 아닌 한인 출신의 노복으로 그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 결국 징병 가능 청의 총 인구수는 12만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은 절대적 패배를 강조하기 위해 청의 군사가 30만이거나 12만 8천정도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홍타이지는 그럼에도 조선 정벌에 무려 3만4천의 병력을 동원한다. 팔기만주와 팔기몽고가 1만 우전초하 1만, 명에서 항복한 천우, 천조병 2천, 외몽고병사 1만2천이었다. 총력전이었던 셈이다. 


2. 조선의 방어전략과 청의 공격전략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여진인의 강력한 군사력을 맛보았다. 1619년 심하천투를 통해 조선은 적과 평지전에서 조우하면 승산이 전혀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낮은 평지성의 공성 능력 역시 적은 매우 뛰어났다. 때문에 조선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적 침공시 기병이 점령이 어려운 산성으로의 입보였다. 조선의 방어선은 3중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황해도 방어선이었다.

 압록강은 너무 길기에 모든 지역을 방어할 수 없어 침공로로 예측되는 의주와 창성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전쟁발발시 이 지역 군사들은 백마산성과 당아산성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청천강 방어선은 안주와 영변으로 안주는 적이 의주로 침공할시, 영변은 적이 창성으로 침공할시 방어기점이 되었다. 안주성에는 평안병사 유림을, 영변의 철옹산성에는 부원수 신경원에세 수천의 정예병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 양지역은 서로 기각지세로 서로 위험할 경우 응원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마지막은 황해도 방어선으로 황주와 평산일대였다. 황주는 홍산 근처의 정방산성에 도원수 김자점에 평산지역은 태백산성이었다. 

 이런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년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둔것으로 정묘호란시 청은 주요 평지성들을 손쉽게 점령하였고 요충지에서 만난 조선군을 쉽게 격파하였다. 때문에 산성으로 피신하여 요충지가 점령당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 적을 불리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조정은 상황에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는게 전략의 골자였다.

 하지만 청의 공격전략은 이런 조선의 전략과 확연히 달랐다. 청은 정묘년과는 다르게 조선의 항복이 목적이었으므로 요충지의 점령에는 관심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도성을 포위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제 일 목적이었다. 또한 침공로 역시 한군데가 아니라 두곳이었다. 청은 의주와 창성 두지역으로 모두 침공한다. 하지만 의주로 침공한 부대는 빠르게 전격전을 감행한 반면 창성으로 침공한 부대는 요충지를 점령하면서 천천히 진군했다. 빠른 전격적은 보급로의 문제와 고립의 문제가 있으므로 양자를 병행해 약점을 보완하려던게 아닌게 생각된다. 하여튼 이런 청의 방식은 조선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킨다. 

 홍타이지는 선발대 300명을 상인으로 변장시켜 진군시켰는데 이들은 한양도성에 불과 침공 후 4일만에 도달한다. 이런 빠른 진군에 조선 조정은 겁을 집어먹고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한다. 강화도 파천에는 3-4일의 말미가 필요한데 이런 시간을 방어선들이 벌어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처음 도달한 선발대는 소규모였으므로 충분히 강화도로 파천이 가능했지만 청의 전광석화 같은 진군으로 혼란스럽게 도달하는 장계에 정신이 빠진 조선 조정은 그런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인조는 부랴부랴 남한 산성으로 입성한다. 물론 청의 포위망이 완성되기전 남한산성에 갇힐 것을 우려해 성을 나오려 하였지만 날씨가 이를 돕지 않았다. 이 처럼 전방 조선군의 산성입보는 이처럼 청의 전격전에 큰 도움이 되고 말았다. 

 계절도 문제였다. 만주에서 한양까지는 큰 여러개의 강이 있다. 압록강, 청천강, 예성강이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전격적은 위해 겨울까지 침공을 기다린다. 1월이 되어 강이 모두 얼자 청의 기병은 빠른 속도로 도하가 가능했다. 물론 1월이라고 강이 반드시 어는 것은 아니었지만 17세기는 전세계적인 소빙기로 무척 추웠고, 진군시기에 유독 추워 날씨가 청을 도왔다.  


3. 무너지는 조선군

물론 남한산에 갇혔어도 희망은 있었다. 강화도로 두 대군이 종묘사직을 들고 피신하였으며 청의 전격적으로 전장의 방어군이 그래도 온존했다. 또한 남4도의 근왕병 역시 기대할만 했다. 병자년 당시 조선은 국력이 피폐했지만 전란의 기운 속에 꾸준한 준비로 대충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3만 4천 전체가 최정예병인 청군과 단순하 숫자비교는 무리지만 3배에 달하는 순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 자체의 병력도 1만2천이었다. 남한산을 포위한 청군을 오히려 안팎으로 협공할수도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희망일 뿐이었다. 점령하며 창성으로 침공해온 청의 동로군은 당아산성을 함락하고 영변의 철옹산성도 공격한다. 그리고 이들은 영변에서 부원수 신경원과 김자점을 토산에서 격파한다. 이에 평안도의 홍명구와 유림도 남한산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한다. 하지만 청의 요격을 피해 동으로 크게 우회하여 진군이 늦어졌고 강원도 김화에서 오히려 북상하던 외번 몽고부대와 격돌하여 궤멸당한다. 

 남은 것은 남부 4도의 근왕병뿐이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충청도가 먼저 움직였다. 충청 감사 정세규는 용인의 험천에 충청병사 이의배는 안성의 죽전 산성에 진을 친다. 이들은 청의 기세가 대단하여 단독으로 붙기보다는 전라와 경상의 병사와 합류하여 대군을 이룰 요량이었다. 하지만 청군은 험천의 군을 격파하고 이를 구원하던 이의배의 군사도 격파한다. 그리고 원정길이 이끌던 강원의 군사다 검단산에서 격파한다. 

 1만에 달하던 경상의 군사가 전장에 도착하여 쌍령에 진을 쳤다. 하지만 청군은 고작 300의 기병으로 이들을 격퇴한다. 사상자만 3천여명에 달할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 마지막은 전라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가장 먼 거리였던 만큼 전란후 13일만에 광교산에 북상한다. 광교산의 김순룡은 청군을 상대로 모처럼 승리를 거둔다. 청은 지휘관 양구리가 전사할 정도였으며 큰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화살과 양식 부족으로 전라군은 수원으로 피신하고 오히려 청에게 군마를 1140필이나 노획당하고 만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처럼 하4도와 황해, 평안도의 군사가 궤멸당하자 남은 것은 아직 남진하지 않은 함경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미원에 심기원과 합류하여 무려 2만 3천의 병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의 마지막까지 참전하지 않는다 청군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차례로 궤멸한 다른 군을 보았기 때문이다. 


4. 강화도 함락

청군은 1637년 2월 16일 강화도를 공략한다. 광교산 전투후 16일이 지나서였다. 강화도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상당히 넓은 면적의 해도이면서도 험준한 해안 지형과 넓고 깊은 수렁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거기에 임진년에 보여준 것처럼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청은 수군의 개념이 아예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런 강화도가 하루만에 함락된다. 왜였을까?

 조선의 강화도 방어전략은 해상에서의 저지였다. 강화도와 경기도 사이에는 염하수로가 흐른다. 이 수로는 조류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때문에 판옥선의 진군 및 주둔이 어려웠다. 또한 당시는 겨울로 강에 얼음이 얼어 있어 배로의 도하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조선군은 염하수로의 북쪽입구인 연미정과 남쪽 입구인 광성진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북쪽으로의 상류이 더 어려웠기에 남쪽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강화도엔 1600의 병력이 있었는데 600은 이미 다른 지역의 구원을 위해 나간 상태였다. 즉, 상륙을 방어할만한 혹은 상륙한 적을 상대할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닌 이야기다. 

 때문에 강화도는 청의 기습 상륙에 하루만에 무너진다. 강화도를 공격한 청의 병력은 3만으로 알려져있지만 이 병력은 청의 전군이다. 청은 강화도 공략에 44척의 배를 동원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그들의 병력은 3200정도로 추정된다. 청은 강화도 지형과 조수의 이치를 잘 깨닫고 갑곶진으로 기습 상륙했는데 여기엔 향화호인이 한 몫은 한것으로 추정된다. 향화호인은 귀화한 여진인으로 조선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정묘년부터 조선인들은 이들의 배신을 의심하였는데 병자년에 이것이 현실화한다. 향화호인들의 정보로 인해 청은 강화도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갑곶진으로 상륙한다. 반면 조수의 역흐름에 걸린 조선 함대는 제대로 진군하지 못해 이를 막지 못한다.


5.갑작스런 항복 권유와 신속한 철군

 이처럼 조선의 전황이 절망적이었음에도 청의 항복 조건은 매우 후했다. 인조의 출성과 척화신 2-3명의 박송이었다. 하지만 이 후한 조건도 조선에겐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하가 척화신이라 2-3명의 희생양을 마련하기도 어려웠고 오랑캐의 말을 믿고 출성했다 왕이 낭패를 볼수 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국 송의 휘종과 흠종은 금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죽었과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황이 좋지 못하고 남한산이 완전 포위되어 바깥으로부터의 소식도 끊기자 조선은 점차 저자세로 변해간다. 하지만 청은 인조의 출성을 끝까지 고집하며 오히려 회담을 거부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청이 빠른 화의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조선조정은 근왕군의 승리나 명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책의 저자는 홍타이지의 이런 태세전환이 다름 아닌 천연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절멸된 병이지만 천연두는 18세기 매년 40만의 희생자를 내던 무서운 병이었다. 천연두는 남부지역의 병으로 만리장성 이북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시절에 이르기까지 만주에는 만, 한, 몽 연합 거주가 나타난다. 특히 한족이 문제였는데 이들과 함께 천연두도 자연히 따라와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청은 천연두를 앓고 살아남은 숙신과 아직 감염되지 않은 생신을 구분하고 명 내지를 공략할때는 숙신들을 주로 투입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마찬가지 였는데 당시 서울엔 이미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전격전을 위해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침공시기로 정했지만 그 시기는 천연두가 창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홍타이지 어영 주변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빠른 태세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홍타이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오래머물지 않고 빠른 철군을 한다. 서울은 물론이고 어떤 중소도시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마중을 나온 조선의 관원들도 모두 피했다. 천연두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방역을 중심에 둔다면 이해가 가는 면이다. 

 항복 후 인조는 생각보다 후한대접을 받는다. 원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는 오랜 저항과 쿠빌라이라는 유력자를 알아보고 제대로 항복하여 부마국의 대접을 받았지만 인조의 조선은 의외였다. 홍타이지는 삼전도의 의례후 인조를 청의 주요 친왕들보다 더 높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 즉 2인자의 자리에 앉힌다. 조선에 대한 대접이었다. 이를 향후 청이 중원을 제패한 후 만든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생각보다 높은 위상을 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병자호란에 대해 여러 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특히,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청의 만문 사료를 많이 활용하여 객관적이지 못했던 부분의 새로운 퍼즐을 맞춰낸 느낌이다. 멸망 직전의 조선을 살린 것이 평소 조선 백성을 괴롭히던 천연두라는 사실이 재밌다. 과학기술이 절정에 달한 지금처럼 과거에도 최강국일지라도 감염병에는 맥을 못췄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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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30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