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지음, 북타임 편집부 옮김 / 북타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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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묵은 세배를 하고, 연말에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비빕밥을 해먹던 풍습이 있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한참 전에 재미있게 본 영화 <우동>에서 보여주는 대로 일본은 우동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다.


그런 바탕에서 탄생한 것이 이《우동 한 그릇》일 것만 같다. 맛있는 우동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굳이 북해정을 찾은 가난한 가족들.

모르는 척 양을 조금 더 넣어 삶아준 무뚝뚝한 주인과 12월 31일이면 비워놓는 예약석 2번 테이블.


어느 늦은 저녁 풍경. 아이들 넷이 쪼르르 누워 잠이 든 곁에서 꼬박꼬박 졸던 엄마는 술이 얼큰해서 들어오시는 아버지를 맞아 양복을 받아 거신다. "여보, 국수 좀 삶아 줘."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부엌으로 나가 국수를 말아오시던 우리 엄마. 여름이면 시원한 오이 냉국에 겨울이면 뜨끈한 멸치국물 국수를 주로 내주셨으나, 가끔 속이 탄다 하시면 마당에 묻어놓은 김칫독에서 김치국물을 넉넉히 담아와 얼음이 아삭아삭한 김치말이국수를 정갈하게 차려내오시던 그 풍경. 가끔 혼자서 국수를 삶아먹을 때면 냄비 속에서 부글거리는 거품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다.


지금도 가끔 술을 마시다가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국수가 먹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면 "으이구! 누굴 닮아가지고!" 곱게 눈을 흘기시면서도 국수를 말아주시는 우리 엄마. 그 모습이 오늘 다시 찾은《우동 한 그릇》과 묘하게 겹친다. 다른 추억에 비해 음식에 관한 추억은 맛과 함께 기억되어서인지 더 오래도록 남는다. 북해정 우동을 먹던 그 가족들과 국수냄새 퍼지던 그 저녁에 대한 추억은 그렇게 닮은 셈이다. 이런 추억은 또다시 아들에게로, 조카들에게로 남아 행복한 한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구리 료헤이. 발음이 엉키기 쉬운 작가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니 굉장한 실례이겠으나 이렇게 멋진 동화를 쓰신 분이라면 이름만 불러도 용서해주실 것 같은 묘한 착각이 든다. 비단 <우동 한 그릇>뿐만 아니라 <산타클로스가 된 소년>이나 <켄보우의 행진곡이 들려온다> <하얀 카네이션> 등 모든 작품이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지녔다. 두고두고 보아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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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의 별 세트 - 전3권 푸른숲 어린이 문학
이현 지음, 오승민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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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상깊은 구절

식물들도, 동물들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똑같이 아름답고 소중하지.
그렇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주 독특해. 꿈을 꾸거든!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아이로봇 -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로봇이 인간이 될수 있을까 - 피터 케이브 지음 |남경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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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쨌거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재미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 이런 사람들이니까 멋진 동화를 쓰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모두 내일을 위해서라고, 내일을 위해서 지금은 모두 조금씩만 참자고 아이들에게 다그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현재를 즐기되, 내일은 좀더 즐거운 일들이 생길 거라고 믿는 희망적인 태도! 많이 고치긴 했으되 여전히 비관적인 부분이 10%쯤 남아 있는 내게는 엄청나게 부러운 일이다.

      2004년 1월 25일, 화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는 게 임무인 오퍼튜니티라는 지능형 로봇이 지구에서 파견되었다.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전자두뇌를 가진 로봇. 그리고 육년 째 착실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여전히 화성을 탐사하고 있다고 한다... '로봇 과학자 한스 모라벡은 인공 지능 로봇을 이렇게 불렀다. 마음의 아이들이라고, 인간의 마음을 물려받은 아이들이라고. 나로와 아라와 네다는 내 마음의 아이들이다. 내가 꿈꾸는 그 어떤 마음을 물려받은 아이들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이렇게 탄생한 NH-976 모델인 아라, 나로, 네다는 똑같은 모델이 세 대밖에 없는 명품으로 아시아계 인간 여자아이랑 똑같은 외모, 뛰어난 전자두뇌의 성능을 자랑하지만 각각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인간 엄마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로, 세계 최고의 로봇 회사 로보타 회장 피에르가 직접 키우는 아라, 도담이가 태어난 기념으로 도담엄마에게 팔려간 네다. 여덟 살의 외모를 가진 어린 여자아이들.
     세 아이들의 삶이 교차적으로 보여지는 게 아니라 한 권에 하나씩 할당되어 그들의 삶이 다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성이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로봇의 3원칙이 공개되는데 무척 실망스러웠다. 
     
    모든 인공지능 로봇과 컴퓨터에게는 반드시 로봇의 3원칙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 로봇의 3원칙은 아래와 같다.
    하나,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둘, 첫째의 경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셋, 첫째와 둘째의 경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거야 원. 이건 아이작 아시모프가 이야기한 걸 그대로 베껴왔구만!  짜증스러움이 치솟았다. 꼭 따라 해야만 하는 걸까? 새로운 걸 생각할 수는 없었던 거야? 혼자 작가에게 마구 퍼부어댔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흥분은 가라앉았다. 작가 스스로가 그곳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까닭이며, 이 3원칙을 그대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음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자유를 외치며 로봇의 별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좋게 말하면 찾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어디선가 본 듯한 것들이 춤추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로봇의 3원칙을 제거하는 데 사용된 노래는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 로봇들을 통제하는 슈퍼 컴퓨터의 이름도 '노란 잠수함', 로봇의 별을 운영하는 지도자는 '체'인데 베레모를 삐딱하게 쓴 모습은 딱 '체 게바라'를 연상시킨다. 지구와 달, 화성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책임지수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책임지수란 자신을 위해 돈을 얼마나 쓸 수 있느냐는 것으로. 알파인, 베타인, 감마인, 델타인으로 나누는 것은 역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닮았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에서 마지막 한 가지를 뺀 것이다. 게다가 곳곳에서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아, 물론 '비틀즈'나 '체'가 등장한 것은 향수를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재미있다. 돈을 쓸 수 있는 것으로 계급을 나눴다는 것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게 했지만 계급의 이름이 똑같은 것은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좀더 독창적이었다면 훨씬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투덜댔지만 한 자리에 앉아서 다 읽을만큼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과학 발전과 인간다운 삶의 적절한 균형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우리에게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옷자락 잡는 작가의 손이 느껴진다. 이것을 계기로 훌륭한 SF 문학이 마구 쏟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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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얼굴이 더 빨갛다
김시민 지음, 이상열 그림 / 리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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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바다

바다는
맨날 

미역국만 먹고 사네


봄 나무 - 폐교에서 


아이들 웃음소리처럼
보슬보슬
새순 매달고
 

그리운 입학식 열고 있네

 

참 예쁜 동시집이다.

그림이 글을 적절하게 뒷받침해주어 시를 잘 살려주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다가든다.

1부: 우리 학교에 놀러오세요

2부: 우리 가족과 똑같은가요?

3부: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

4부: 우리는 들꽃 친구

이렇게 나누었는데 각 부분마다 시의 맛이 달라서 참 좋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먹는 음식마다 감탄을 하게 되는 것 같은 운수 좋은 날이다.

  

 동시다운-이라고 말하면 참 우스운 말이지만 그래도 아이들 눈높이에서 바라 본 듯한 시를 말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바다>라는 작품은 한참을 보며 깔깔거렸다.
그래. 좀 물리긴 하겠구나.

이렇게 기분좋게 웃을 수 있는 동시도 있는 반면에 <새만금에서> 같은 시들에서는 생각하게 만드는 힘도 있어서 좋다.

내 주변의 일들 뿐만 아이라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아이들의 시선이 가 닿을 수 있도록 배려한 작가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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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순난앵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3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홍재웅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열린어린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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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녀의 작품을 굉장히 좋아하는 지라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2002년에 돌아가신 그분이 새로운 책을 쓸 리가 없다는 걸 잠시 잊고 덥석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던 <그리운 순난앵>.

 

 사실 이 작품은 1959년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가난하고 힘겨웠던 1900년대 스웨덴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책인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라스무스와 폰투스>나 <사자왕 형제> <에밀은 사고 뭉치>와는 너무나 달라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힘들었던 시절이라도 과거를 회상할 때는 누구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눈가는 그 순간을 더듬느라 먼 곳을 헤매는 표정이 되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작가가 그리는 먼 옛날이야기이다. 소박함과 정겨움은 잔뜩 들어있지만 강렬하고 힘찬 이야기 전개가 사라져서 전체적으로 흐물흐물한 느낌이 들었다.

 

 순난앵이란 스웨덴에 실제로 있는 마을 이름이기도 하지만 ‘순난’은 스웨덴어로 ‘남쪽의’ 혹은 ‘남쪽으로부터 오는’ 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앵’은 잔디와 풀이 많이 나 있는 풀밭 혹은 목초지, 초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쪽의 푸른 초원’이나 ‘따스한 바람이 부는 남쪽 풀밭’ 을 떠올리는 말이라고 한다.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순난앵’은 그래서 더 정겹게 느껴지긴 하지만 전설이나 설화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이야기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내가 많은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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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없는 세상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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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클로델은 <회색 영혼>에서 만나 본 작가였는데 짙은 회색과 우울, 추위 같은 것으로 무장한 듯한 작품이라 읽으면서도, 읽은 뒤에도 거북하고 힘들었다. 그런 그가 <아이들 없는 세상>에서 많이 밝아진 채 돌아와서 참 좋았다. 아무려나, 웃는 게 더 매력적인 건 인간 공통의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느낌도 잠시! 이야기는 모두 짧고 경쾌하게 끝나지만 묻어 놓은 고구마는 끝도 없이 나왔다. 요정 같은 건 믿지 않는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요정을 다룬 <요정이라는 힘든 직업>,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서까지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 결국은 책으로 도피하게 되는 <책 속으로 들어가 버린 소년>,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텔레비전을 신처럼 모시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메마른 가족을 다룬 <가족이란>은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생선이라 맛있다고 마구 집어 먹다가 가시가 걸린 것처럼 켁켁거리며 숨을 골라야 했다.

 

 그중에서 특히 표제작인 <아이들 없는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기에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버리니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는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사라진 것이지만 <아이들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스스로가 집을 버렸다. 물론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두 작품 모두 어른들에게 있다. 하나는 어른들끼리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서, 또 하나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맨날 싸우기만 하구, 우리 말을 드러주지두 안구, 우린 웃고 시플 때 웃을 수도 없구, 졸리지도 안는데 일찍 침대로 가야 하구, 침대에서는 쪼꼬렛도 몬 먹구, 이빨도 만날 따까야 하구. 이젠 정말 더는 못 참게써서 우린 떠남니다. 잘 이써요.

 

 이런 메모만을 남긴 채 아이들은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어른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지역인 마데라니 남쪽 크람발라 오아시스로. 어른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 있다니! 이거야말로 환상이다. 결국 어른들이 잘못을 뉘우칠 때쯤 돌아와 세상은 축제 분위기가 되고 아이들은 왕처럼 모셔지지만 씁쓸한 한 마디가 남았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잊어버린다는 것, 참으로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 무엇보다 자신도 어린아이였다는 걸 잊게 된다는 사실.

 

 그래서 어느 날 “아니 세상에, 얘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렇게 아이들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거다. 여기서 아이들이라 함은....로 되돌이표처럼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는 구조에 섬뜩해졌다. 점점 작아지는 글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크게 울림을 갖게 했다. 우리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하는 짓을 떠올리게 했으며 내가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했다.

 

 웃음 뒤에 씁쓸함을 감출 줄 아는 필립 클로델을 보고 있자니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의 작가 아지즈 네신이 떠오른다. 물론 그보다는 힘이 조금 딸리긴 하지만 앞으로 필립 클로델의 작품을 주목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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