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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없는 세상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필립 클로델은 <회색 영혼>에서 만나 본 작가였는데 짙은 회색과 우울, 추위 같은 것으로 무장한 듯한 작품이라 읽으면서도, 읽은 뒤에도 거북하고 힘들었다. 그런 그가 <아이들 없는 세상>에서 많이 밝아진 채 돌아와서 참 좋았다. 아무려나, 웃는 게 더 매력적인 건 인간 공통의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느낌도 잠시! 이야기는 모두 짧고 경쾌하게 끝나지만 묻어 놓은 고구마는 끝도 없이 나왔다. 요정 같은 건 믿지 않는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요정을 다룬 <요정이라는 힘든 직업>,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서까지 존재감이 없는 소년이 결국은 책으로 도피하게 되는 <책 속으로 들어가 버린 소년>,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고 텔레비전을 신처럼 모시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메마른 가족을 다룬 <가족이란>은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생선이라 맛있다고 마구 집어 먹다가 가시가 걸린 것처럼 켁켁거리며 숨을 골라야 했다.
그중에서 특히 표제작인 <아이들 없는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기에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버리니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는 아이들이 타의에 의해 사라진 것이지만 <아이들 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스스로가 집을 버렸다. 물론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두 작품 모두 어른들에게 있다. 하나는 어른들끼리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아서, 또 하나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맨날 싸우기만 하구, 우리 말을 드러주지두 안구, 우린 웃고 시플 때 웃을 수도 없구, 졸리지도 안는데 일찍 침대로 가야 하구, 침대에서는 쪼꼬렛도 몬 먹구, 이빨도 만날 따까야 하구. 이젠 정말 더는 못 참게써서 우린 떠남니다. 잘 이써요.
이런 메모만을 남긴 채 아이들은 미련 없이 떠나버린다. 어른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지역인 마데라니 남쪽 크람발라 오아시스로. 어른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 있다니! 이거야말로 환상이다. 결국 어른들이 잘못을 뉘우칠 때쯤 돌아와 세상은 축제 분위기가 되고 아이들은 왕처럼 모셔지지만 씁쓸한 한 마디가 남았다.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잊어버린다는 것, 참으로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 무엇보다 자신도 어린아이였다는 걸 잊게 된다는 사실.
그래서 어느 날 “아니 세상에, 얘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렇게 아이들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 거다. 여기서 아이들이라 함은....로 되돌이표처럼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는 구조에 섬뜩해졌다. 점점 작아지는 글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크게 울림을 갖게 했다. 우리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하는 짓을 떠올리게 했으며 내가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했다.
웃음 뒤에 씁쓸함을 감출 줄 아는 필립 클로델을 보고 있자니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의 작가 아지즈 네신이 떠오른다. 물론 그보다는 힘이 조금 딸리긴 하지만 앞으로 필립 클로델의 작품을 주목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