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나이즈드 네 복음서 - 개역개정
곽병국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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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이었다고 한다. 비종교인이지만, 가족 친지 중에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계시고, 큰 이모부께서 삼위일체에 관한 논문을 쓰신 것을 오래 전에 읽기도 했다. 최근에는 친구가 세례를 받았다.


 

외출한 김에 혜화동 성당 풍경도, 예수성심상도 보고, 매일 빛으로 달라지는 작품 같은 글라스화도 비신자답게 구경만 하며, 호흡을 골라보았다. 기도를 자주 하지만 - 이문재시인 덕분 - 신에게 바라거나 비는 일은 믿음이 없어서 못한다. 종교를 갖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일요일에 읽고 싶었는데, 늙고 고단하여 오늘 아침에 일독을 마쳤다. 어릴 적엔 베스트셀러라서 성경이 궁금했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분이라 예수를 존경했다. 이 책은 고맙게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를 나란히 배열해서 읽을 수 있게 구성되었다.


 

내가 관심 있는 예술의 3년 반의 공생애를 시간과 사건 순서대로 읽을 수 있으니, 예수 본인이 아닌 모두 다른 이들의 기록이지만 전체적인 흐름 파악에 다른 방식보다는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성경 본문을 편집하거나 순서를 바꾸지는 않았다.

 

종교인이 아니라 내게 성경은 늘 역사 기록처럼 읽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가 더디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럼에도 근대 국가와 시민 사회라는 구조와 명칭 이전에도, 누군가는 공동체와 공생애에 관한 개념이 확신 같아서, 그에 따라 살았다는 놀라움도 한결 같다.

 

태어나 성장하고 배우고 뜻을 세우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용감하게 살다 저항에 부딪히고 죽임 당하고 그 뜻을 귀하게 여겨 이어 받고 전하는 서사는, 무척 서글픈 반복의 역사이기도 하고, 그래서 희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민스럽기도 하다.


 

예수 이후에 태어난 많은 이들 중 내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분들도 유사한 가치를 믿고 실천하던 분들이 많다. 선례란 힘이 세고, 함께 걷고 싶은 길이 되기도 하고, 낯설고 두려운 삶의 표지판이기도 하다. 내 불안의 일정 부분은 몰입과 헌신이 필요한 믿음의 경험 부재에 기인할 지도 모른단 생각을 오래 했다. 최근에 세례 받은 친구가 내내 부럽다.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비록 그 의미는 다 모르지만. 섬세하게 배려한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일람도표를 그려 넣었다. 독자 읽는 독자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랜선 책모임을 종종 했지만, 성경 모임은 오래 전 영국에서 오프모임 이후에는 참여한 적이 없다.

 

아마도 팬데믹을 거치며 많아졌을 것이라 여긴다. 예수의 공생애를 복음서를 통해 다시 만나며, 의업에 종사하는 저자의 공적 삶에 대해서도,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 삶의 공적 역할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본다. 행동하지 않으면 다 무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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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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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보다는 휴일인 주중이 더 여유롭다. 왜 일까. 모든 (존재하는 지도 알지 못하는)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자 체험이기 때문일까. 어딘가로 흘러갈 듯 붕 뜨는 정신을, 쑥쑥 자란 바질과 딜이 착륙시켜 준다.

 

형언할 수 없이 맛있어서, 선 채로 딜을 다 뜯어 먹을 뻔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식재료는 감미료 없이도 달콤하다. 겨우 자제력을 동원해 토마토 양파 절임 한 가지 소스로 여직 버텨온 레시피를 드디어 변화시켜 본다.


 

사물화 되지 않기 위해, 생명 있는 존재처럼 유연하게 살아보려 했는데, 고정된 것들을 지키고 고집을 피우는 건 비교적 쉽고, 변화와 적응은 늘 고되다. 반응을 살피고 끌어내는 통화나 대화보다 걸러진 문서가 피로감이 덜하다.

 

인간의 언어는 죽은 언어이니 언어를 살아 있게 하라. 부서지고 조악한 언어들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들로, 끝없이 반향하는 언어의 그림자로 가득하게 하라.”


 

지금은 어떤 시절일까. 내가 안 보려하는, 못 보는 변화는 무엇일까. 도전과 실패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여되는 속박과 굴레일까.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는 다시 서고 싶지 않아도 삶은 계속될 것인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이 존재할까

 

뭔지 몰라도 정지돈의 글에는 늘 웃을 수 있다. 재밌다. 엉뚱하지만 엄청 웃기는 반 친구가 어느 시절 내게도 있었던 듯하다. 기억 못할 실없는 얘기와 행동을 반복하면서 지치도록 웃었던 한 때.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기 위해, 알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했다기보다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알려고 대화를 했다.”

 

지금이야 비슷한 일상을 살다가, 놀랍도록 지나버린 계절에 화들짝 놀라다가, 이러다가 순식간에 늙어 파사삭 사라지겠구나 싶은 단조로운 직조물 같은 삶을 살지만, 복기한 기억은 현실보다 다채롭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으면 시트콤 시나리오라도 쓰자고 했던 순간들도,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게 아슬아슬했던 위기의 순간들도, 지금 보기엔 무모한 모험 같은 선택도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그렇게 지치도록 오늘까지 살았다.



 

가장 놀랍고 재밌고 웃긴 건 이 소설들이 한편의 이어진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여전히 원근遠近에 따라 희극이자 비극이구나. 낯선 것들 투성이에, 이해불가하고, 기막히게 비인간적인 경험. 그래도 이번엔 현실이 이겼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도 그게 민주주의라기에, 절차가 그렇다기에, 투표로 선출된 자이기에, 그저 견디며 사는데, ‘수긍할 수 없다며 족족 거부권을 행사하는 괴랄한 이질적 풍경. 책에 머리를 묻고 잠시, 인생도 일상도 다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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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리커버 특별판) -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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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아닌 것들에 대해 생각할수록 인생으로 인한 모든 문제들에 회환이 쌓여간다. 고민이 될 때마다 무기력을 마주하는 난제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어 나 하나’, ‘오늘 하루’, ‘내 기억에 집중해본다.

 

20대는 세상과 싸우며 내 가치관을 확립하는 시기였고, 필요하면 그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동료가 필요한 일인지는 정확한 계산을 못했다. 지식도 경험도 적으니 기대와 믿음이 지나쳤다.

 

30대는 그렇게 만든 내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도 나와도 싸워야했다. 외압이야 저항도 무시도 쉬웠지만, 내가 끝없이 만들어내는 편견과 비겁함과 고집과 게으름은 대개 지고 마는 최강의 적이었다.

 

패배가 쌓여서일까, 그 이후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어 살아간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막 살아버린 건 아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라지 않았던 초능력을 발견했다. 평범한 일을 거르지 않고 어기지 않고 하는 능력.

 

젓가락은 두자루, 펜은 한자루…… 중과부적!’



알던 시들도, 새롭게 알게 된 시들도, 읽기만 했던 시들도, 이제 몸을 통과하듯 가까워지는 시들도 있다. 시 소믈리에가 함께 하는 책이니, 지친 날 예상 못한 배려와 서비스를 경험한 듯 위로가 된다.

 

물렁해진 내 머리를

땅땅땅 치는 소리


 

찰나의 모든 순간들을 포착하여 시를 만든 시인들 덕분에, 그때는 소중했던 지금은 더 애틋한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너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어떤 장면들에 항복하는 힘이 다 빠진 존재감이 좋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너무 아득하여 (...)


 

각자의 삶, 각자의 경험, 각자의 감상. 전하고 설명하고 나누고 권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인류는 늘 그렇게 나누고 함께 했다. 아직 포기와 좌절을 말하지 않는 이유에는 그런 분들이 버티고 계신다.

 

돌아보니 인생은 나를 돌봐준 이와 내가 돌볼 이로 이루어진 돌봄의 연속

 

그러니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일독 후 다시 표지를 오래 본다.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 앨리스 달튼 브라운Alice Dalton Brown의 작품이다. 어제 황혼은 이랬다고 선물 받은 사진을 본다. 온통 시()였던 시().


 

다 공부지요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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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맨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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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엔젤> 이후로 가와이 간지 작품을 오랜만에 읽는다. 물론 최초 출간은 2012년이지만. 데드맨이란 제목이 멋스럽지 않다고 느꼈는데, 몇 번의 반전이 이어지는지 거듭 짐작하고 틀리는 재미로 읽었다.

 

지금 이 시간을 놓치면 나는 영원히 내가 아니게 되고 말지도 모른다.”

 

의지적인 인물은 클래식한 매력이 있다. 나는 직업윤리도 강하고 헌신도 대단한 이런 캐릭터가 여전히 좋다. 그래서 내 기대와는 아주 다른, 내 입장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몹시 분하기도 한 결말이 아프고 외려 현실적이었다.

 

그 현장에는 감정이라는 게 없었다.”

 

대개 형사추리물은 형사 캐릭터의 매력을 많이 찾아내고 공감하며 시선을 맞추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피해자와 범인의 사연이 기가 막히고, 가해자가 내 기준에서는 최고형에 처해져야할 유형이라 자주 마음이 아릿했다.

 

적어도 언어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다만 이런저런 과거사가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일본어로 읽었다면 영리하게 배치한 언어와 어휘들의 묘미를 더 즐겼을 것도 같고, 외국어를 번역을 통해 이렇게 잘 전달하는 능력에도 감탄했다. 오래된 질문이긴 하지만, 우리는 정말 기억의 총합이고 언어는 존재의 증거와 같다.

 

죽으면 그 사람은 법률상 인간이 아니라 그냥 물체가 되죠. 그리고 시체라는 물체의 소유권은 유적에게 있죠.”

 

정교하게 공들인 장치에 한참 속아 즐겁게 휘둘렸다. 속임수가 얼마나 다양하게 많았던지, 촘촘하게 잘 만든 미로를 빠져나가는 듯 즐거웠다. 눈치를 챌 때까지 완전히 속는 경험은 유쾌하다.

 

당신이 대체 누구인지, 그건 당신 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예요.”

 

드디어 아조트의 뜻을 알게 되어 기뻤는데, 그 장치 역시...! 정성 가득 속여주어 감사하다. 일본어 단어 공부 - 동음이의어 - 를 하고 싶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언어를 작품 얼개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작가의 재치가 최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드라마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며 글을 줄인다. 다시 생각해도 그 가해자 놈은 일단 때려주고 감형 없는 형량으로 처벌하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시키고 싶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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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걷기 수업 - 두 발로 다다르는 행복에 대하여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유영미 옮김 / 푸른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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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행운이라고 생각한, 시간이 갈수록 고마운 이들, 일들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걷기 명상을 배운 것은 생존에 깊이 관련된 다행인 배움이었다. 스승은 열반에 드셨지만, 그 스승의 걷던 모습을 떠올리며 걷는 동안, 접히고 구겨진 나를 펴고 세운다.

 

수면시간이 적어 기분이 좋지 않은 토요일 아침, 가능한 일상과 현실에서 멀어지는 추리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정신의 균형을 맞춰보았다. 대개 짜증이란 표면적 감정 반응은 본질적인 삶과 죽음을 사유하며 꽤 다스릴 수 있다.


 

그리고 여름이 시작된 첫 주말에 가능한 많이 오래 걸어보았다. 전시회 내부에서도 걸었지만, 5월과 다른 초록 풍경을 새롭게 제대로 보고, 걸으면서 얘기해보고, 더위도 느껴보고, 땀도 흘리고, 그 모든 것이 살아 있어서 할 수 있는 생명반응이라 시간이 아쉽고 더 애틋해졌다.



 

죽음을 떠올리고 의식하며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득한 마음이 들면서 공허함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강렬한 자연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역시 바로 우리가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공기를 한껏 들이쉬어 폐를 부풀려본다. 호흡이란 의식하지 않아도 가능한 기능이지만, 그래서 짧고 얕은 호흡만 한다. 천천히 깊게 숨을 쉬며 걷는 것만으로 생명으로서의 내 존재와 다른 생명들의 존재가 몇 배나 더 인지에, 시야에, 들어온다.


 

주중의 일상과는 최대한 다르게 살아보는 주말, 해야 하는 일과 책임과 타인들과 맞춰야 했던 속도는 모두 일시 멈춤이다. 함께 걷는 동안에도 각자의 속도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수 있는 모두 다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자연이 허락한 예술행위 같다.


 

인간이 만든 것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가 자연이라면 어디를 걷더라도, 인간이 조성한 공원 안이라도, 계획하지 않은 자연을 반드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목소리가 앳된 저 아이들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아이들일지도 모르겠다.


 

겁쟁이에 속 좁은 분노쟁이지만, 밖으로 나와 걸으니 다른 존재들을 만나니, 엉켰던 기분도 칼날처럼 벼려지던 생각도 조율이 된다. 신경에 전원이 꺼지고 적당히 식어간다. 걱정도 불안도 이 순간에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몸의 움직임으로 인한 몰입flow은 치유Catharsis.


 

온통 목적지향적인 삶을 살던 때 만난 스승은, 이 책에 적힌 말씀대로, 내게 멈춤의 기술, 휴식의 기술을 그때 가르쳐주셨다. 걷기는 내게 호흡과 같다. 걷을 때마다 어울려 사는 법을 다시 기억해낸다. 고요하지만 멈추지 않는 삶을 마지막까지 살아보자고 다시 결심해본다.

 

대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걷기는 우리를 더 선하고, 더 온화하고, 더 인간적이며, 더 공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대자연 속은 아니지만, 걸은 시간만큼만 나는 더 인간이 된다고, 부러워하는 미덕과 가치에 한 걸음씩 가까이 간다고, 그렇게 믿고 걸어볼 것이다. 오늘도 걸었기 때문에, 나를 배려하는 타인의 표정을 알아보고, 낯선 이의 다정한 인사에도 무척 반갑고 기쁘게 웃었다.


 

마지막 이직이 될지, 퇴직이 될지는 아직 못 정했지만, 다음 떠남지금까지의 삶과 존재를 변화시키는의미이길, 오래 불화한 삶의 면면과의 결별이길, 오래 바라본 그 목적지이길, 뒤늦게 찾아낸 솔직한 욕망을 현실화하는 곳이길, 함께 걸을 자연이 더 많은 곳이길 바란다.

 

너무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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