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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주말보다는 휴일인 주중이 더 여유롭다. 왜 일까. 모든 (존재하는 지도 알지 못하는)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자 체험이기 때문일까. 어딘가로 흘러갈 듯 붕 뜨는 정신을, 쑥쑥 자란 바질과 딜이 착륙시켜 준다.
형언할 수 없이 맛있어서, 선 채로 딜을 다 뜯어 먹을 뻔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식재료는 감미료 없이도 달콤하다. 겨우 자제력을 동원해 토마토 양파 절임 한 가지 소스로 여직 버텨온 레시피를 드디어 변화시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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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화 되지 않기 위해, 생명 있는 존재처럼 유연하게 살아보려 했는데, 고정된 것들을 지키고 고집을 피우는 건 비교적 쉽고, 변화와 적응은 늘 고되다. 반응을 살피고 끌어내는 통화나 대화보다 걸러진 문서가 피로감이 덜하다.
“인간의 언어는 죽은 언어이니 언어를 살아 있게 하라. 부서지고 조악한 언어들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들로, 끝없이 반향하는 언어의 그림자로 가득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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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 시절일까. 내가 안 보려하는, 못 보는 변화는 무엇일까. 도전과 실패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인간에게 부여되는 속박과 굴레일까. 이제 새로운 출발선에는 다시 서고 싶지 않아도 삶은 계속될 것인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이 존재할까”
뭔지 몰라도 정지돈의 글에는 늘 웃을 수 있다. 재밌다. 엉뚱하지만 엄청 웃기는 반 친구가 어느 시절 내게도 있었던 듯하다. 기억 못할 실없는 얘기와 행동을 반복하면서 지치도록 웃었던 한 때.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기 위해, 알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했다기보다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지 알려고 대화를 했다.”
지금이야 비슷한 일상을 살다가, 놀랍도록 지나버린 계절에 화들짝 놀라다가, 이러다가 순식간에 늙어 파사삭 사라지겠구나 싶은 단조로운 직조물 같은 삶을 살지만, 복기한 기억은 현실보다 다채롭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으면 시트콤 시나리오라도 쓰자고 했던 순간들도, 어떻게 살아남았나 싶게 아슬아슬했던 위기의 순간들도, 지금 보기엔 무모한 모험 같은 선택도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그렇게 지치도록 오늘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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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랍고 재밌고 웃긴 건 이 소설들이 한편의 이어진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여전히 원근遠近에 따라 희극이자 비극이구나. 낯선 것들 투성이에, 이해불가하고, 기막히게 비인간적인 경험. 그래도 이번엔 현실이 이겼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도 그게 민주주의라기에, 절차가 그렇다기에, 투표로 선출된 자이기에, 그저 견디며 사는데, ‘수긍할 수 없다’며 족족 거부권을 행사하는 괴랄한 이질적 풍경. 책에 머리를 묻고 잠시, 인생도 일상도 다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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