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를 읽고, 습지를 걷다 - 선생님이 전해주는 인천대공원과 소래습지의 생태이야기
남기철 외 지음 / 좋은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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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wetland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읽고 공부를 한 적도 있는데, 기억을 떠올려보려니 텅텅 비었다. 환기되고 업데이트 되지 않는 공부란 흔적 기관처럼 남게 된다. 인천지역 습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새롭고 반갑게 읽고 배웠다

 

부지런한 친구가 김장 새우젓 사러 가는 연례행사로만 알고 있던 소래포구가 습지이자 생태공원이라는 것을 읽으며 내가 가진 정보와 이미지가 극도로 협소했단 자각을 한다. 푸른빛이 가득한 풍경이 멋지다.



 

식생과 동식물 모두에 관한 정보가 다양하다. 인류가 야생으로 남겨둔 것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인간 이외의 생명을 만나니 쓸쓸하고 불안한 기분이 많이 가벼워진다. 비에 가까운 습설이 내리는 창밖을 자꾸 보게 된다.

 

한 분도 아닌 다섯 명의 선생님들이 쓴 책이라서, 학습에 잘 활용 가능한 친절한 안내서 같은 구성도 있고, 성실하고 단정해서 기분 좋은 보고서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진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래 보기에 참 좋다.



 

이전에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사는 동식물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인간이 조성했지만 식생이 더 좋은 공원과 습지에는 더 많은 생명들이 있어서 무척 감격스럽다. 작은 생명들이 살아 있으니 인간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



 

인천대공원과 소래습지생태공원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훨씬 더 즐겁고 재밌게 읽고, 많은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듯하다. 충실하게 공부하려면 진지하게 기억하고픈 내용들이 무척 많다.

 

수업 시간에 이루어져도 좋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해볼 번거롭지 않은 활동 가이드가 있어서 매력적이다. 나무를 좋아하지만 나무 수피 탁본 뜨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떤 무늬를 만날지, 그 무늬만으로 나무 종류를 알 수 있는 지식에 이를지가 무척 궁금하다.



 

그곳에 살지도 않는 산천어들을 데려와서 풀어놓고, 괴롭히다가 죽이는 것을 우리는 축제라고 부른다. 다른 생명을 학대하는 연습을 사회가 공공연하게 시키는 셈이다. 그런 활동보다는, 알지 못했던 동식물에 대해 배우고, 관찰하는 느긋한 산책 같은 가족 활동이 여러모로 더 평화로울 것이다.

 

* 나는 책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관련된 내용을 가장 재밌게 읽었다. 나무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활동도 멋지다.

* 공룡 같은 곤충이라 자세히 보는 건 무서워하는 잠자리 중에서 나비 같은 물잠자리도 신기하다.

* 80억 가량이 사라져서 무서웠던 야생벌들에 관한 경고도 중요하다.

* 나문재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는 것, 고려가요에 등장한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 기후의 급속한 변화로 인한 철새의 텃새화 현상으로 인한 여러 문제도 배웠다.

* 도요새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니!



 

선생님들이 만든 책이지만, 교과서보다는 재밌는 동식물 이야기들 - 잉어가 100년이나 산다고? - 이 다양하다. 대공원이라서 참여할 활동도 적지 않다. 특히 염전이 있다는 점과 염생식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실험이 흥미롭다. 여러모로 반갑고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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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에디터스 컬렉션 16
조지 오웰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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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다른 번역과 판본으로 만나도 여전히 서늘하고 뜨겁게 놀라는 작품들을 쓴 존경하는 작가. 기분 좋은 우연처럼 아주 오랜만에 그의 작품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거듭 생긴다.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컬렉션 <카탈로니아찬가>는 사진들이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기억 속 조각들로 남은 문학을 새롭게 읽고 채우고 숙고해보는 의미 깊은 기회가 감사하다.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을 다루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2024년 지구에도 전쟁 상황과 확전 소식이 들려왔다. 현실로 인한 불안감이 문학이 전하는 비극보다 커서, 문학이 전달한 경고가 현실을 직시하게 해서 기분이 무거웠다.

 

영국 유학 중에 나는 한 명의 카탈로니아 출신 친구를 만났고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함께 보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적이고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에 대한 숙고가 없는 듯한 축구팀에 붙는 수식어들 - 스페인의 무적함대나 독일의 전차군단 등 - 이 무척 불편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 들고 죽이는 전쟁 대신 공을 뺏는 경기를 하는 것이 더 나은 문명이고 평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세기에 나는 그렇게 전쟁의 지난 과거의 방식이었다고, 다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게으른 낙관을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근래에 나는 인류 문명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만났다. 그래서 지난 역사의 기록으로 읽은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만난 것이 다행이다. 이제야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절감하며 읽어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점에서 문명은 퇴행한 듯도 하다. 전쟁의 이유와 분위기, 참전하는 이들의 태도는 현대의 전쟁과 다르고, 그 점이 우리가 도착한 문명의 현실을 더 잘 보여준다. 실패하고 패배했지만, 이상과 대의와 기강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는 저항이 부럽고 빛난다.

 

문명 생활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일반적인 동기 중 대부분, 즉 속물근성, 재물 욕심, 윗사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평범함 계급 구분도 돈으로 더렵혀진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사라졌다. (...) 누구도 타인을 소유하지 않았다.”

 

자신이 뭔가 낯설고 귀한 것과 점했음을 깨달았다. 냉담이나 냉소주의보다 희망이 더 일반적인 곳이었다. (...)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사기극의 상징이 아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를 호흡했다.”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고, 자본주의의 인적 자원이 아닌 사람다운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장면들이 그렇다. 그런 제언과 고민도 사라진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추구는 돈이 없으면 적게라도 쓰라고 속삭이는 소확행이 전부인가 싶어서.

 

물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건 다른 선택지 없이 전쟁만 남은 상황은 최악이다. 희생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죽고 죽이는 인류 문명의 방식이 멈추지 않은 것이라면, 2024년의 인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지켜낼 전선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본다.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 인간답게 행동하고 품위를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의심, 두려움, 불안, 감춰진 증오가 섞인 분위기는 왜, 어떻게 생겨나고 퍼지는가, - 조직, 자원, 자본 - 을 가진 세력들은 어째서 논쟁과 토론 대신 공작과 선전선동으로 상대를 죽이려드는가, 파시스트 세력은 어째서 손쉽게 기세등등해지는가.

 

역사와 문학의 경고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는 왜 참담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반복하는가. 파괴와 살상에 더해 탄소를 펑펑 배출하는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에 퍼부어지는 전쟁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학살을 2024년의 인류는 언제 멈출 수 있을까. 멈추지 못하면 지금도 매일 3천만 톤씩 녹아내리는 빙하로 인해 우리가 마주할 재앙은 무엇일까.

 

전쟁의 가장 끔찍한 면 중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 모든 구호와 거짓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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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내 마음 - 마음의 고통을 안고, 회복의 길을 간다
황정우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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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을 묻는 안부는 물리적 평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일 년 중 며칠을 정말 무탈하게 보내고 있는 걸까. 새해가 어김없이 시작되고, 새해를 핑계로 밝고 즐겁게 지내보려 했지만, 노력과 결심만으로 그런 상황이 마련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뇌는 상상 이상의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기분에 장기적으로 노출될 때 유독 취약해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멈춰 서거나 혹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으로 더 고통스러운 삶을 만들기도 한다.”

 

제목이 에고‘ego’이자 영리한 감탄사 역할도 한다고 생각해서, 쉽고 직관적인 웃음을 주는 책이 궁금했다. 저자는 심리치료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이자 겸임교수다.

 

셀프나 에고 같은 심리학에서 구분하는 이론적인 설명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사례와 사유로 이어지는 글이라 안심이 되고 무척 반가웠다. 이론 공부가 소용이 별로 없거나 관심이 없는 나이라서 더 그렇다.

 

살아 있는 한 헤어질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도, ‘두려움’**에 대해서도 가볍게 언급하고, 우리 사회가 겪은 공통의 경험 속에서 저자가 경험한 구체적 사실로 옮겨가는 방식이 구체적이고 실감이 나서 좋다.

 

* 미래에 대한 막연한 가정. 지속적인 막연함 자체가 고통이므로 불안은 곧 고통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 안 좋은 것에 대한 무기력한 감정. 누적되고 스스로를 더 옥죄며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단지 불안과 두려움의 반대가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쪽을 바라본다고 심리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경험에서 무엇을 배워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할까. 저자가 개인과 사회의 영역에서 모두 마련되어야할 점을 짚어주어서 공부가 되었다.

 

최근 물질주의, 경쟁주의, 성과주의로 아이들을 압박하는 것은 누구인가? 거기다 아이들에게 폭력적, 반사회적 문화 콘텐츠를 무분별하게 노출시키는 미디어의 파급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아이들에게만 사회적 통제를 강화한다면 그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다들 전혀 모르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역시 맞춰가며 사느라고 아픈 것일 텐데, 란 막막함도 들지만, 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반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고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성장 중인 아이들에 대한 처벌과 통제를 선택해야 한다면, 성장만하고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에 대한 통제 방법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생존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희망과 기대가 적을수록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그럼에도 생존은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어디로든 내보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도록.

 

물론 예전처럼 모든 정신질환이 격리와 치료를 요하는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저자도 예를 들었지만, 양극성 장애를 가진 헤밍웨이가 조증 상태에서 남긴 많은 작품들이 인류의 문학사를 채우고 있다.

 

각자의 에고가 다르듯이,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이후의 변화도 모두 다를 것이다. 다만 개인은 혼자가 아니라는 이해가 중요하다. 개인이 속한 사회가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인간은 환경 속의 인간으로 볼 때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과 환경은 상호 작용하고 변화한다.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극단의 이분법을 적용하였고, 더구나 (...) 비정상은 치료의 대상이라는 무모한 해법의 맹점에 빠져 버렸던 지난날의 전문가주의 (...) 고통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전인적 회복보다 의료적 치료에만 몰두하면서 환자들을 의료적 이유도 없이 오래 병원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 스스로 생존하는 능력마저 아예 퇴화시켜 버리는 시설화라는 또 다른 장애를 양산해왔다.”

 

변화는 지치도록 느리고 기쁘지 않은 소식이 새해에도 한동안 이어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의 회복탄력성***이 충분하기를 바란다.

 

*** 자신의 안녕을 지키고 손상이 있으면 다시 회복하려는 본능.

 

약자를 먼저 통제하는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이다. 성숙한 사회는 약자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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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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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친구들이 작빛따필성수퍼 이야기를 재밌게 나눠서 나도 얼른 끼어들고 싶었다. 가을빛을 닮았을지 모를 작은 빛이 겨울에도 필요한 빛일 거란 생각을 했다. 선물 중에서도 책은 모르던 세계를 건네받는 것이라서 아주 많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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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본인가 싶게 신기할 정도로 쉽고 빠르게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몇 번 가본 적 없는 내장산 입구에 어느새 도착해서 필성수퍼 앞을 오가며 읽는 기분이다. 문장이 너무나 생생해서, 남의 집 일상사를 투명인간이 되어 엿보는 묘한 기분이 들 정도다.

 

스릴서와 서스펜스 장르가 아님에도 대형마트가 생기고 난 후 필성수퍼의 운명과 가족의 삶이 어떻게 될지가 조마조마 아슬아슬했다. 몰입이 강한 탓에 배추를 절일 때는 일도 하지 않은 내 허리가 다 욱신거렸다. 욕하고 등짝 때리는 할머니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돌아누운 어깨에 눈이 시렸다.

 

내게 당연한 것들 중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 시간이 여전히 낯 뜨겁기 때문이다. 방송국을 엠비씨와 케이비에스로 부르던 것도 영어를 배우지 않은 분들에게는 얼마나 낯선 말이었을까. 한글과 숫자를 못 배운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영어만 조금 배워 떠난 유럽에서 낯선 문자와 말 속에서 살아야했을 때 비슷한 당혹감을 비로소 체험했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무탈한 일상이 어떤 노력으로 유지되는지를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일상 관리에 체력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마음이 버스럭거리고 정신이 팽팽해지는 긴장 속에서 태연한 모습으로 각자의 간절함을 껴안고 사는 모두의 모습이 애틋하다.

 

지금 느긋해 보이는 누구라도 내일 어떤 위기를 마주할지 모르고, 삶 자체가 어떤 약속도 보장도 없이 건너는 물길 같을 때도 많다. 위태로운 시간은 공통의 경험이 되기도 하고, 우리는 혼자인 것 같은 순간에도 서로 버티고 견디는 힘으로 서로를 돕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름방학 시위 시간에 나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어설프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럼에도 최소한 유상렬 선생님이 덜 외로웠겠구나 싶었다. 누군가를 최소한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 그를 덜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 쪽수의 힘이었다.”

 

상황은 더 나빠지는 것만 같지만, 잠시의 쉼 같은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은 자체로 희망이다. 먹먹한 시간을 묵묵하게,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치우며, 나아가지 못해도 물러서지 않는 모든 이들이 애틋하다. 다정한 말로 응원을 주고받고 싶은, 경건한 지옥을 함께 견디는 동료 같다. 그러니 누구도 누구에게 함부로 굴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착각이든 뭐든 간에 내 안에 희망의 기운이 꽉 찬 건 분명했다. 그런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친구들이 왜 그렇게 열렬히 책수다에 임했는지 모두 다 이해되는 멋진 작품이다. 내장산의 가을 단풍빛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흔들림이 작은 단단한 빛을 따라 걷는 모두의 무사 도착을 기원한다.

 

고운 가루로, 빛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것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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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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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의 기록을 확인하고 2015년이란 숫자가 낯설어서 괜히 놀랐다. 2023년에서 이어진 겨울을 지나가는 2024년의 어리둥절한 주말이다. 그동안 지나간 여름과 겨울을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뒤섞여 엉망이다. 어느 해의 겨울을 누구와 더불어 지나가게 될까. 유독 허기지는 저녁에 펼쳐 본다.

 

별 일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매년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무너진 이들, 아픈 이들, 문 밖에서 견뎌야 하는 작고 약한 생명에게 겨울은 다른 생존 조건이다. 서로 다른 상황을 기억하며 겨울을 지나가는 이야기를 읽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모습으로 그 추운 숲길을 혼자 걸어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자꾸 소환되어서이기도 했다. 단지 꿈이란 걸 알면서도, 어린 엄마가 감당했을 숲의 추위가 나는 걱정됐다.”

 

상실과 이별과 죽음이 있지만, 만남도 사랑도 삶도 여전히 있다. 시공간을 저마다의 행위로 채우는 삶이 가득하다. 허기진 상태로 읽기 시작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거의 찾아 먹지 않는 칼국수와 겉절이 김치가 먹고 싶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작품 속 는 엄마가 생전에 운영하던 식당을 이어나간다. 모두 태우거나 버리지 않은 엄마의 옷, , 비누, 로션이 반갑다. 서둘러 떠난 이들의 짐을 모두 치워버리는 일이 나는 늘 의아하고 불편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동안에는 시공간에서 살지만, 죽은 후에는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이야기 속에서 산다. ‘에게 강아지 정미도, 동생 미연도, 미용실 아주머니도 이웃 노파도, 식당 손님들도 있어서 엄마가 부재한 풍경이 덜 외롭고 더 오래 따뜻하다.

 

부모(모부)없이 살아본 적 없는 자식으로서, 거의 매일, 문득 어느 순간에라도 이별이 닥칠 수 있다는 꾸준한 불안을 절감하며 사는 중년으로서, 사별과 후회와 남겨짐은 이상하게도 포악한 허기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무엇으로라도 상실을 채워야 그 힘으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듯이.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태어났지만, 두 분은 그렇지 않으니 겨울에 떠나시지 않으면 좋겠다. 고통이 심한 병으로 고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고 믿는 내가 그 믿음 만큼 잘 보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을 불시에 황망하게 잃은 모든 분들이, 그 겨울을 지나지 못하고 계신 모든 분들이, 일면식이 없어 추억을 나눌 수는 없지만, 기억하고 잊지 않고 함께 겨울을 지나가려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조금의 위안으로 삼아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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