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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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친구들이 작빛따필성수퍼 이야기를 재밌게 나눠서 나도 얼른 끼어들고 싶었다. 가을빛을 닮았을지 모를 작은 빛이 겨울에도 필요한 빛일 거란 생각을 했다. 선물 중에서도 책은 모르던 세계를 건네받는 것이라서 아주 많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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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본인가 싶게 신기할 정도로 쉽고 빠르게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몇 번 가본 적 없는 내장산 입구에 어느새 도착해서 필성수퍼 앞을 오가며 읽는 기분이다. 문장이 너무나 생생해서, 남의 집 일상사를 투명인간이 되어 엿보는 묘한 기분이 들 정도다.

 

스릴서와 서스펜스 장르가 아님에도 대형마트가 생기고 난 후 필성수퍼의 운명과 가족의 삶이 어떻게 될지가 조마조마 아슬아슬했다. 몰입이 강한 탓에 배추를 절일 때는 일도 하지 않은 내 허리가 다 욱신거렸다. 욕하고 등짝 때리는 할머니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돌아누운 어깨에 눈이 시렸다.

 

내게 당연한 것들 중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 시간이 여전히 낯 뜨겁기 때문이다. 방송국을 엠비씨와 케이비에스로 부르던 것도 영어를 배우지 않은 분들에게는 얼마나 낯선 말이었을까. 한글과 숫자를 못 배운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영어만 조금 배워 떠난 유럽에서 낯선 문자와 말 속에서 살아야했을 때 비슷한 당혹감을 비로소 체험했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무탈한 일상이 어떤 노력으로 유지되는지를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일상 관리에 체력의 대부분을 사용한다. 마음이 버스럭거리고 정신이 팽팽해지는 긴장 속에서 태연한 모습으로 각자의 간절함을 껴안고 사는 모두의 모습이 애틋하다.

 

지금 느긋해 보이는 누구라도 내일 어떤 위기를 마주할지 모르고, 삶 자체가 어떤 약속도 보장도 없이 건너는 물길 같을 때도 많다. 위태로운 시간은 공통의 경험이 되기도 하고, 우리는 혼자인 것 같은 순간에도 서로 버티고 견디는 힘으로 서로를 돕고 있을 지도 모른다.

 

여름방학 시위 시간에 나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어설프게 서 있기만 했다. 그럼에도 최소한 유상렬 선생님이 덜 외로웠겠구나 싶었다. 누군가를 최소한 외롭지 않게 해주는 것. 그를 덜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 쪽수의 힘이었다.”

 

상황은 더 나빠지는 것만 같지만, 잠시의 쉼 같은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은 자체로 희망이다. 먹먹한 시간을 묵묵하게,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치우며, 나아가지 못해도 물러서지 않는 모든 이들이 애틋하다. 다정한 말로 응원을 주고받고 싶은, 경건한 지옥을 함께 견디는 동료 같다. 그러니 누구도 누구에게 함부로 굴어선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착각이든 뭐든 간에 내 안에 희망의 기운이 꽉 찬 건 분명했다. 그런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친구들이 왜 그렇게 열렬히 책수다에 임했는지 모두 다 이해되는 멋진 작품이다. 내장산의 가을 단풍빛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흔들림이 작은 단단한 빛을 따라 걷는 모두의 무사 도착을 기원한다.

 

고운 가루로, 빛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것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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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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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의 기록을 확인하고 2015년이란 숫자가 낯설어서 괜히 놀랐다. 2023년에서 이어진 겨울을 지나가는 2024년의 어리둥절한 주말이다. 그동안 지나간 여름과 겨울을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이 뒤섞여 엉망이다. 어느 해의 겨울을 누구와 더불어 지나가게 될까. 유독 허기지는 저녁에 펼쳐 본다.

 

별 일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매년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무너진 이들, 아픈 이들, 문 밖에서 견뎌야 하는 작고 약한 생명에게 겨울은 다른 생존 조건이다. 서로 다른 상황을 기억하며 겨울을 지나가는 이야기를 읽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모습으로 그 추운 숲길을 혼자 걸어가던 엄마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자꾸 소환되어서이기도 했다. 단지 꿈이란 걸 알면서도, 어린 엄마가 감당했을 숲의 추위가 나는 걱정됐다.”

 

상실과 이별과 죽음이 있지만, 만남도 사랑도 삶도 여전히 있다. 시공간을 저마다의 행위로 채우는 삶이 가득하다. 허기진 상태로 읽기 시작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거의 찾아 먹지 않는 칼국수와 겉절이 김치가 먹고 싶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작품 속 는 엄마가 생전에 운영하던 식당을 이어나간다. 모두 태우거나 버리지 않은 엄마의 옷, , 비누, 로션이 반갑다. 서둘러 떠난 이들의 짐을 모두 치워버리는 일이 나는 늘 의아하고 불편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동안에는 시공간에서 살지만, 죽은 후에는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이야기 속에서 산다. ‘에게 강아지 정미도, 동생 미연도, 미용실 아주머니도 이웃 노파도, 식당 손님들도 있어서 엄마가 부재한 풍경이 덜 외롭고 더 오래 따뜻하다.

 

부모(모부)없이 살아본 적 없는 자식으로서, 거의 매일, 문득 어느 순간에라도 이별이 닥칠 수 있다는 꾸준한 불안을 절감하며 사는 중년으로서, 사별과 후회와 남겨짐은 이상하게도 포악한 허기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무엇으로라도 상실을 채워야 그 힘으로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듯이.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겨울에 태어났지만, 두 분은 그렇지 않으니 겨울에 떠나시지 않으면 좋겠다. 고통이 심한 병으로 고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고 믿는 내가 그 믿음 만큼 잘 보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雨水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을 불시에 황망하게 잃은 모든 분들이, 그 겨울을 지나지 못하고 계신 모든 분들이, 일면식이 없어 추억을 나눌 수는 없지만, 기억하고 잊지 않고 함께 겨울을 지나가려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조금의 위안으로 삼아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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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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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언제 죽을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할 일을 마치고 마무리하고 인사도 하고 사과도 하고 감사도 하고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건 더 복잡한 생각을 품은 채로 더 고단하게 살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만약 생의 마지막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온다면, 남은 시간 죽음은 제게 무엇을 물을까요. 새해에 생각해보기 좋은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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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의료란 삶의 끝자락에 나타나는 다양한 증상, 특히 통증을 완화시켜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돌봄의 의학이다. (...) 완화의료자를 흔히 안락사 시켜주는 의사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완화의료는 오히려 안락사를 막아준다. 통증이 없어지고 증상이 좋아지면, 환자는 죽음을 찾아가는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투병, 극복, 완치라는 적극적인 방식도 기쁜 일이긴 하지만, 모든 질병에 해당되는 방식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상황, 그런 시기에도 가능한 돌봄을 이야기합니다. 당사자의 마지막이 존엄하고 이별이 덜 고통스럽고 아프게 돕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이 좋아한다는 것으로 나아가기란 어렵습니다. 반갑지 않고 싫은 일이지요, 죽음이란. 되돌릴 수 없는 생의 단 한 번, 영원한 이별이니 좀 더 존엄하고 좀 더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현대의학은 죽음 직전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통증을 거의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 현대의학의 진수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할 때 통증을 없애주는 것이다. 죽음을 상상조차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런 희망적인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하지만, 완화의료에서 의미하는 바는 때론 수년 동안 지속되는 마지막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 통증 조절은 더 중요해집니다. 더구나 기대수명이 늘어나는 시절에는 두려움도 커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지구 역사상 이렇게 오래 사는 인류는 우리가 처음이다. 죽어감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죽음이 힘들었다면, 준비되지 않은 노년 역시 춥고 고달프다. (...) 백 세 시대에 누구나 걱정하는 것은 늙으면 아플까?”일 것이다.”

 

퇴직하고 가능한 직업 중에 완화의료 관련 일도 있는지 관심이 생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공감과 연민에 과한 업급은 무척 중요한 내용으로 읽힙니다. 타인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려면, 자신을 소진시키지 말고 제대로 이해하고 꾸준히 도울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겠습니다.

 

나는 자신을 돌보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살필 수 있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환자에게는 고통을 이해해주고, 의미 있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피할 수 없는 죽음, 가능하면 충분히 살다가 좋은 죽음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이 모두 대비할 수 없는 일이니, 삶과 죽음 모두 충분히 존중하고 돌보는 사회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두 다른 삶 속에서 자신만의 지향과 노력이 더해지기도 해야겠지요.

 

좋은 죽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흰 머리카락이나 주름살같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 죽음에 이르러 무엇인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차곡차곡 더께가 되어 얻는 삶의 결과물인 셈이다. (...) 저마다 주어진 삶을 잘 녹여내야만 누릴 수 있는 우리의 마지막 축제이다.”

 

새해라서 더욱 사유하고 고민하기 좋은 주제였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물을까요. 질문과 대답을 더 오래 생각해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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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속삭임 - 제2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보름달문고 93
하신하 지음, 안경미 그림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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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좋아하는 물리학 전공자이고 칼 세이건과 <코스모스>의 오랜 팬이다. 그래서 20대에 생긴 별명이 별먼지 그리고 우주먼지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재밌다.)

 

귀 기울여 듣고 싶은 멋진 책 제목에 첫 단편은 [반짝이는 별먼지]이고 책과 함께 우주복권도 도착했다. 여러모로 몹시 설렌다. 아이들에게 넘기기 전에 먼저 읽어보고 싶었다.

 

1

 

말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지는 게 세상이지. 지금까지 50년이나 기다렸단다. 나는 이제 곧 오로타로 가게 될 거야.”

 

할머니가 등장하는 여행자숙소, 설정을 파악하자마자 울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SF라는 착장을 하고 지독한 그리움을 우주라는 막막한 공간에 투사하는 서러운 이야기를 동화처럼 풀어내었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지. 별먼지처럼.”

 

생멸生滅이란 손 쓸 도리 없는 냉혹한 법칙 같은 일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매달려보고 오래 그리워하는 일뿐이다. 그래도 혼자 남겨 두지 않은 다정함이 안심이 된다. 아이들을 이런 세상에 두고 떠날 생각이 두려운 어른 독자에게도 위안이 된다.

 

내 몫의 여행을 떠날 때가 왔구나.”

 

2

 

이끼류에 대한 짧은 공부를 하고 난 뒤, 오랜 생존의 역사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다. 동시에 포자로 번식하는 균류에 대한 무섬증도 조금 생겼다. 특별한 악의가 있다는 상상(모함)이 아니라, 이전 존재를 분해하고 지운다는 역할이 놀라운 만큼 두렵기도 해서 그렇다. 두 번째 단편의 전개와 장면이 그런 내 느낌을 다루는 소재라서, 사랑의 이야기라는데 나는 두렵기도 쓸쓸하기도 했다.

 

3

 

달은 점점 지구로부터 멀어져 언젠간 지구의 궤도를 벗어날 거라고 한다. 하지만 달은 아직 나를 따라다니고 점점 더 세게 끌어당긴다. 밤에 떠오른 환한 달을 보고 있으면 엄마가 다가와 내 등을 슬슬 문질러 준다. 그러면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을 맞곤 했다.”

 

평범한 가정의 풍경 같았는데, SF라는 걸 잠시 까먹었다가 호되게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더 늘어나는 것이 좋기 만한 일인지 또 생각이 많아진다. 뭐 고민한다고 막을 수도 바꿀 수도 없을 것 같지만.

 

기억을 가져가길 원해서 지우지 않았어요. 달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때까지 전원을 억지로 끄지 말아 주세요.”

 

달에 대한 이끌림을 이런 결말로 마무리하는 작가의 현실 어딘가의 고발 르포 같은 문학이 놀랍고 서럽다. 구매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된 인류 문명을 생각한다. 관계도 그렇게 된 지 이미 오래일까. 사랑의 수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는지, 안녕이란 인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4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한 수성과 금성이 먼저 타올랐다. 그 뒤로 지구를 따라 돌던 달이 폭발했고 그 조각들이 지구로 쏟아졌다. 머지않아 지구는 물론이고 화성과 목성도 곧 사라질 것이란 뉴스가 쏟아졌다.”

 

지구 종말의 풍경은 영화라도 보고 싶지가 않다. 우주가 궁금하고 반하기도 했지만, 우주를 오래 들여다보면 언제나 무섬증과 소름이 돋는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우주 공간은 지구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산소와 탄소와 수소, 칼슘과 황, 염소 등으로 만들어졌어. 거기에 구리, , 규소가 약간 들어가 있지. 인간은 지구와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 쉽게 말해 인간의 몸은 흙과 같은 성분이라고 할 수 있단다.”

 

우주 공간을 떠돌며 점점 더 기계화되고 컴퓨터와 의식만 남은 존재가 되는 이야기 속에서 종이책을 잠든 가족에게 읽어주는 장면이,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 잡은 손길 같아서 또 훌쩍거렸다.

 

나에게 책 읽어 주기는 우리가 꼭 다시 만나서 서로의 촉감을 확인할 날이 올 것을 약속하는 시간이었다.”

 

생명을 가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은, (있다면) 무엇일까. 얼마나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사용하고 준비해야할까.

 

아주 짧은 순간 느꼈던 감각의 기억들이 이 우주선 안에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이번 생에 나는 결국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에 실패해서 아무 것도 극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평생을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제 십대인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좀 더 친구가 많은, 친구 같은 세상이기를 바라니까, 떠날 날까지 뭐라고 하며 살아야겠지.

 

온 우주가 우리의 친구였던 것처럼, 우주 또한 우리를 친구로 여겨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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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클래식 그래픽 노블
조지 오웰 원작, 피도 네스티 지음, 강동혁 옮김, 염승숙 해설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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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는 상당히 어두운 톤의 그래픽이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크기가 일정한 컷이 단정한 방식이라서 주제처럼 진지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여전한 매력이 있다. 나처럼 조지 오웰 책을 만화로 읽을 생각을 못 해본 독자들에게도 너무 낯선 느낌이 없어서 좋다.



 

예전에는 좀 더 SF적 상상력과 문학으로 마음 편히 만났다면, 지금은 무척이나 서글프다. 사회의 문제와 비밀을 먼저 알아챔 사람이, 변화를 위해 애썼지만 실패하고, 저항을 그만 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국 지배 대상인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는 결과라니. 나대신 사랑하는 이를 고문해 달라는 내용은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지독하게 아프다.

 

그를 마음 편히 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훨씬 더 약하고 비겁하게 굴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고 배신과 변절을 강요당하고 망가졌을지 너무나 슬프기 때문이다. 억울함 대신 죄책감으로 원망과 고발 대신 기록도 없이 사라져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 얘기를 먼저 했지만, 지배대상은 기억과 언어다. 인간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이루는 것들을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어떤 지배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그래픽이라서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서늘해진 경고의 메시지를 품은 문학이다.

 

새 언어의 목표는 생각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라네. 우리는 결국 사상범죄를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만들 거야. 사상범죄를 표현할 단어가 사라질 테니 말이지.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단어로 표현되겠지. 혁명이 완수되는 건 언어가 완벽해질 때야.”



 

이튼스쿨을 다닌 조지 오웰 자신이 말했듯이* 사립학교에서 옥스퍼드를 거쳐 지배계급이 되는 영국의 초엘리트들은 전문 지식보다 정치적 언어유희를 더 중시하는 태도를 배운다. ‘옥스퍼드 유니언이라는 토론 클럽에서는 지배계급의 말솜씨를 훈련시켜 정치무대로 내보냈다. 이 패턴은 영국 현대사 전반에 걸쳐 반복됐다.

 

* “어떤 형태로든 과학은 배우지 않았다. 정말로 너무 무관심해서 자연사에 관한 관심조차 꺾일 지경이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며 어떤 세상을 살게 되는지를 그래픽으로 가시화된 문학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가능성과 경험 모두 두렵고 무섭다. 더 위험한 공포 영화는 없다. 피로하고 지쳤다고 조금 더 안주하고 외면하고 싶을 때 떠올린다면 목덜미가 서늘해질 경고다.

 

1984년은 지났지만, 우리가 안주하는 어느 순간에도 1984의 풍경은 다시 도래할 수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구호는 낡지 않았다.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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