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가난 - 그러나 일인분은 아닌, 2023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온(on) 시리즈 5
안온 지음 / 마티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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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여러 장 찍었고 줄도 여러 장 그었고 필사도 여러 문장을 했다. 내가 모르는 가난을 배웠으나, 이 기록은 특수한 상황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삶은 모든 면에서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학교는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 가르쳤지만, 사회로 나온 내게 기회는 숨어 있었고 평등은 마음속에만 사는 단어였다. 삶을 비관하는 방법을 스무 개 이상 배워서 스무 살이 된 것 같았다.”

 

질병도 가난도 행복과 불행도 사회적 이슈여야 한다. 단기적이고 편협한 시선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일반성 남용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개인적 과실로 치부되고, 개인적 책임으로 귀결된 가난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선언문과 같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

 

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나는 많이 놀라고 자주 부끄럽고 깊이 깨우치며 배웠다. 사회적 약자의 입지가 예산 전면 삭감이라는 미래를 망치는 행위로 점점 더 좁아지는 시절에, 사랑을 설파하는 종교의 주종국에서 벌이는 전쟁 범죄에 참혹한 시절이다.

 

가난은 이유 없는 벌이다.”

 

분해서, 떨리더라도 말해야만 하는 것이 세상엔 많다. 젠더와 가난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더 함께여야 한다. 속지 않기 위해 배우고 할 수 있는 실천을 한다. 말보다 글보다 행동이 존재를 더 명확하게 규정하고 설명한다. 성장이 문제가 아니라 분배가 문제라고, 그 물줄기를 막고 빼돌리는 이들을 고발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먹는 일을 누군가의 목숨과 맞바꿀 수는 없어서 더는 쿠팡프레시를 이용하지 않는다.”

 

가난의 이야기가 두꺼워지길, 다른 가난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이고 뭉치길,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알아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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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듣는다
루시드 폴 지음 / 돌베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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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보드랍고 말간 함박눈 같은, 루시드 폴의 음악 같은, 표지의 책이 도착했다. 기분이 말랑해진다. 모두가 듣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아니라도 모두가 목소리를 가졌고 모두가 서로를 듣는다고 생각해본다. 귀를 기울여 읽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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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을 전공하고 나서 오랜 친구들은 내게 세상이 어떻게 달라 보이냐고 물었다. 신비로운 모든 것이 제거된 세상이냐고.

 

무지개가 파장이 다른 빛의 산란이며, 협소한 인간의 시각에 보이는 스펙트럼이라고 해서 무지개가 싫어지지 않는다. 심장을 울리듯 깊이 닿는 세상 모든 존재의 고유 진동수가 공기 매체를 건너 온 전하의 떨림과 울림이라고 해서 설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를 울리고, 함께 떨리며 살아간다. (...) 그것은 음악이자 춤이다. (...) 공연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너무 자주 너무 많은 문장들에서 멈추고 떨려서 조금 조금씩 읽었다. 그만큼 연휴가 길어지고 기뻐진 느낌이 좋았다. 떨림과 울림을 통해 음악을 전달하는 저자의 문장은 피아노의 현이, 현악기의 활이 기록한 음표처럼 아름답다.

 

음악은 세상의 떨림을 전하는 길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들을 때, 우리는 모두가 함께 춤을 춘다. (...) 우리는 모두가 음악의 일부이며 전부다.”

 

나는 그가 전하는 음악을 문장 속에서 듣다가 창밖의 눈처럼 어딘가를 오래 떠돌기도 하고, 추위를 잊고 잘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한참 쳐다보며, 집 밖의 다른 소리들에 마음을 기울여보기도 했다.


 

그의 과수원에서 음악을 소리비료로 들으며 자란 나무와 귤을 탐내며, 오랜 친구가 보내온 제주 감귤을 갈랐다. 세상의 많은 소리들이 윤회를 거쳐 이렇게 아름다운 빛의 실체로 내게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향기도 음악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극단은 대부분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인간은 극단적으로 단단한 물질을 극단적으로 날카로운 도구로 다뤄 극단적인 소리를 만들어낸다.” <Doloroso>*

 

* 라틴어 고통스러운’. 루시드 폴이 출품한 오브제 작품 제목. 앨범 <Being with>에 수록.

 

진귤나무와 협업한 멜로디 <Moment in Love><Dancing with Water>에 실려 있다. 나무가 만든 곳, 나무가 아니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음악, 나무가 준 멜로디를 인간을 질서로 다듬은 결과물. 책 속에서 그의 음악을 배운다. 음악가로서 그가 자리매김한 장소와 관계를 본다.

 

분류하고 구분하고 경계하고 격리하고 차별하고 죽이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매일 외로워서 죽어간다. 차분하게 쓰였지만, 낡은 인과와 질서와 형식과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는 담대한 선언문 같다. 나는 조용히 크게 놀랐다.



 

그렇게 무언가가 되어버리는것이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도 되지 못하는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무슨 흐릿한 망상 속에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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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va Slare and her family of four 

make beautiful beach art 

inspired by nature in Dev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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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3 소설 보다
김기태.성해나.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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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겨울이 왔다. 한파와 함께 도착했다. 이제 겨울이라는 듯 일 년에 4번 계절의 변화를 일깨워주는 반가운 조우다. 표지가 푸르스름하고 서늘해서, 그 주말이 길기를, 연말도 길기를 바랐다.

 

잠도 자고 싶었던 가장 좋아했던 오래 전 도서관 창가 자리를 떠올리며, 그것도 안 만들고 뭐하고 살았나 싶은 집에서, 가만히 책을 열었다. 작품이 하나 끝날 때마다 책을 놓고 창을 닦으러 가지 않기 위해, 얼어붙을 듯 차가워지는 창밖 풍경만 가끔 엿보았다.

 

고장이란 보통 내부와 외부의 요인이 호응하여 발생하지요. (...) 사회적 부조리를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곽이라는 '배운 사람'의 사고 회로가 이대로 괜찮은지 질문하는 게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젊음은 버겁기도 하고 예민해서 우울해지기도 쉽지만, 그렇기 때문에 현미경 슬레이트에 올리는 표본처럼 현실을 잘라내어 가차 없이 드러내는 일도 가능하다. <소설 보다> 작품들은 그렇기 때문에도 소중하다.

 

공감과 흥미를 갖춘 소재와 주제를 충분한 소설적 재미를 갖춰 전하는 작품들이라서 모두 호흡을 끊지 않고 읽었다. 겨울의 서늘함을 걷어낼 듯 이야기의 힘이 세다. 복잡한 기분이 들고 생각이 많아지니 좋은 작품들이다.

 

밉다가도 좋고 사랑스러워지는 인간을 그리자. (...)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할 때가 많고 간혹 염오할 때도 있지만 (...) 인간에 대한 어렴풋한 애정이 저를 지탱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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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전해 준 것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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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시간이지만, 희고 투명하고 말간 포근포근 흰 눈 같은 위로가 더해지면 더 좋다. 큰 숨이 쉬어지고 어깨에 힘이 빠지고 하루쯤은 세상사 다 잊고 일단 쉬어보자 싶은 기분이 든다.

 

비로소 연말 같은 날이 왔다. 아주 작고 가벼운 책이라 아깝지만 그래서 어여쁜 책을 가만히 펼쳐 본다. 나른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새와 날개와 노래의 이야기여서일까, 호흡 속 공기가 모자란 듯 살짝 멍하게 기분이 유영한다.


 

새를 무서워한다. 진화계통을 보니 생존 공룡이 조류하고 해서 혼자 납득을 하고 나니 무섬증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새에 무지해서 책 덕분에 왕관 앵무와 회색 앵무에 대해 찾아보았다. 오래 전 아버지가 새장 속에서 기르던 새들도 잠시 떠올랐다.

 

인간은 새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짓도 하고, 수많은 새가 충돌로 죽임 당하는 건물도 많이 만들었다. 슬픔을 겪은 새들이 모인 책 속 세계에서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새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인간이 전쟁 중이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동식물도 전쟁에 휘말린다.

 

인간은 자신들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슬픈 새 야에 씨가 전하는 다정함, 평화, 행복이라는 사명을 가진 새의 날개를 상상하며, 인간이 오래 전부터 하늘을 올려다보고 기원하던 많은 것들을 성탄절에 다시 떠올려본다. 오늘도 중단되지 않은 예수가 태어난 곳의 전쟁을 생각해본다. 누구나 가진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절이 아프다.

 

네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지 나무에겐 나무의, 돌에겐 돌의 말이 있는 거야.”


Olga Kvasha, contemporary Ukranian painter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전하고, 누군가는 희망이 된다. 기적 같은 우연으로 생명으로 태어나 사는 일에 대해, 사명vocation과 소명calling에 대해 막연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본다. 나뭇잎 소리도 새의 날개바람도 느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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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말린 날들 -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서보경 지음 / 반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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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한국 에이즈 이야기책이 나왔다. ‘앞줄에 선 사람들’,‘먼저 휘말린 사람들의 목소리. 이 책을 읽는 경험 속에서 휘말린 후 나는 살고 싶은 어느 미래에 기착할 것인지 궁금하다. 장애도 질병도 감염도 모두 경험이 아닐까. 그러니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까.

 

인간은 바이러스에 감염한다’. (...) 서로 휘말린다. 감염은 인간과 바이러스 모두의 속성이자 양자가 함께 겪는 일이다.”

 

이 책을 통해 감염이라는 것에 대해서 새롭게 배우고, 현상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과학 지식을 따라가며 인간의 생명 현상의 일부로서, 사회적 존재의 상호작용으로서 감염을 살필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 감염에 따르는 불편과 고통은 여전하겠지만, 불필요하게 더해지는 괴로움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안도감이 든다.

 

우리의 몸은 지금 당장 직접 닿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감염이라는 작용이 매개하는 생명의 의미망 속에 늘 휘말리고 있기 때문이다. 몸으로 우리는 들이마시고, 만지고, 맛보고, 삼키고, 내뿜고, 그러므로 서로 드나든다. 서로의 몸에 가닿는다. (...) 서로 휘말리고 있다.”

 

근시안적인 사회적 비용을 이유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못한 반응이다. 감염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면, 감염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증명이나 자격이 될 수도 없다. 즉 감염한 것이 죄를 짓거나 수치심을 강요당할 일도 아닌 것이다.



 

무감염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찾아 예비하는 것이다. 그 일에 먼저 감염한 이들의 목소리가 꼭 필요하다.

 

건강은 그 무엇에도 감염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때, 즉 육체의 청결함과 순수성, 완벽성에 대한 강박적 환상 속에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것들과 휘말린 상태를 얼마나 어떻게 감수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오로지 효과로서 등장할 따름이다.”

 

다중 억압의 역사를 살아간 이들을 기록한 이 책에는, 부정적인 온갖 말이 덧붙여지고 한 순간에 난폭하게 분류되고 경계되고 차별받고 혐오와 폭력과 살해를 겪은 아프고 고된 시간이 가득하다.

 

질병보다 낙인과 더 싸울 필요가 없는, 숨거나 도망쳐야 할 존재가 아닌, 진단이 두려운 선고가 아닌, 해당 질병의 발현을 서로 이해하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감염체가 아닌 사람을 보고 공동체의 일로 인지하는, 그런 방식으로 건강과 질병을 다루는 사회를 지향하며 기록한 귀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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