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머리 민음의 시 319
박참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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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보기는 다 보았다.

아니, 노안에 안 보이는

글자가 더 많았던 듯도 하고

물리적으로 안 보여주는 글자도 적지 않았고

줄그어 가린 것, 지워진 것도 있었으니

보았다고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커다란 눈의 결정처럼

누군가의 체온에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 버릴 듯

연약하고 다정한 시도

어디 볼 테면 봐 보라고

웅크린 실루엣만 보여주는

시도 있었다.

세상엔 내가 못 읽는 시,

지금은 못 읽는 시가 있다는 걸 잘 알아서

추천한 친구를 원망하는 맘은 전혀 없다.




 

그저...

다 보고 나니

시인은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염려되었다.

 

슬프다,

선별되기 전 온갖 자극으로부터

전해진 신호들처럼

일견 난삽해보이는

크기와 종류와 두께와 번짐을 달리하는 활자들.

01의 데이터가 아닌

시의 언어들이

금방 베인 손마디처럼

예리하게 아프다

 

* 정신머리: ‘정신을 속되게 이르는 말.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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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K-포엣 시리즈 36
송경동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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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시카고 도심 빌딩 사이 작은 틈바구니에

때 전 모포 한 장을 둘러쓰고 있던

내 또래 흑인 사내 하나와

그가 껴안고 있던 작은 아이들 둘

멈춰 선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그들의 아득한 저녁 [세계의 중심]

.

.

영웅도 겁쟁이도 되지 않겠다고 했던

미얀마 시인 켓티는

202158일 쿠데타군에 끌려간 다음 날

살해당한 채 노상에서 발견되었다

 

쿠데타군은 그의 시신에서

심장을 떼어내고 버렸다

켓티는 생전에 그들은 머리에 총을 쏘지만

혁명은 심장에 있다는 걸 모른다고 썼다 [AB]

.

.

기운 내세요! 라는 오래된 갑골문자

거룩한 것들은 왜 모두

아프거나 가난한가 [눈물 겨운 봄]

.

.

이 모든 종말과 파멸의 주범은

(...)

진실과 오랫동안 비대면해온

인간 스스로이다

우리가 끝내 우리의 유한한 삶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영원한 무지에 대해 인정하고

한없이 소박해지지 않는 한

 

도미노처럼 쓰러져가는

세계의 재난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파국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대면의 세계]

.

.

“...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자. 그런 말은 또 한 번 써줘요.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면 안 됩니다.” - 조세희 선생님의 전언

.

.

밑줄 그을 문장보다

부둥켜안아야 할 일이 많았고

미문과 은유는 쓸 틈 없이

직설의 분노만 새기며 살아왔던

내 삶의 서재는 [내 삶의 서재는]

.

.

이런 걸

자기 검열이라고 한다지

이러다가 사람이 미치고

이러다가 사람들이 알아서 체제에 순응해간다지

이러다가 언론출판결사표현의 자유가

모든 자율과 창의가

맹탕이 되기도 한다지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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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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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하나에 한 권 이상의 책이 담긴 책편지, 아무리 아껴 읽고 싶어도 멈추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해방의 풍경에 엉엉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설레고 두렵고 기대되고 망설여지는 책 펼치기.



 

..........................................

 

손에 쥔 건 비록 앙상한 글 몇 편일지라도 애를 쓴 그 순간순간이 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출발지가 어디이든, 책을 통해 삶을 해석하고 삶에 비친 서로의 존재를 통해 배우는 공부는 넓어질 수밖에 없다. ‘르포작가로 불리는 은유 작품의 시선이, 페미니즘, 장애와 질별,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 가난과 비정규직 노동, 사회적 참사 등으로 널리 도착하는 것은 잠에서 깬 몸이 기지개를 펴듯 자연스럽다.

 

슬픔은 위험한 감정입니다. (...)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되죠.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았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죠.”

 

말하고 쓰고 듣고, 떠오른 생각을 붙들어 다시 쓰고. 은유 작가는 그렇게 변화하며 독자들도 바꾸어나간다. 갇히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일도 일종의 해방, 내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명료해지고 어휘가 느는 일도 해방이다. 개인의 해방은 나를 바꾸는 기능으로 먼저 작동하겠지만, 그런 개인들이 나눈 기록들은 사회 해방의 동력이 되지 않을까.

 

세상은 안 바뀌는 거 같지만 제가 바뀌었거든요. 저도 세상의 일부이고 적어도 제 몫만큼은 변했잖아요.”

 

명칭은 달라져도 사회가 가하는 압력과 삶이 지닌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버티고 따져 묻는 대신, 인생 되는 대로, 좋은 게 좋은 거라, 정신 놓고 사는 게 따뜻하고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토하는 건지 먹는 건지 모를 태도로 과식하는 일도 돈벌이가 되는 세상이니, 외면하고 도망갈 구석들은 의외로 많을 지도 모른다.

 

그게 싫은 이들,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들은 지키고 싶은 것 - 나 자신이든 다른 무엇이든 - 을 지키기 위해 알아야 한다. 변화가 지키는 것이라면 바꿀 것들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배울 수 있으니, 읽고 쓰기라는 훈련은 필수다.

 

누구나 한계와 제약 속에서 쓰죠. 그래야 한계에 갇힌 인간의 삶을 위로할 테고요.”

 

어떤 책을 읽은 것인지를 고민하며 읽다 보면, 글과 글 쓰는 이에 대한 판단이 생긴다. 작가를 전혀 모르고도 재밌고 좋은 글을 만나는 행운도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좋은 삶을 사는 좋은 작가가 좋은 글을 쓰는 일이 더 많다. 질문과 고민이 많은 독자라면 삶에 대한 시선과 문제의식이 선명한 글이 좋은 것이 당연하다.

 

이 작은 책을 오래 읽고 싶어서, 필사를 많이 했다. 필사한 문장들만 다시 읽어보았다. 조급한 기분으로 불안한 생각들로 매일 살아가지만, 지름길도 비법도 없다. 채워 넣은 지식도 좋은 글도 내 안에서 숙성되지 않으면 내 것으로 소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러 밤을 다시 이 책을 펼쳐 보게 될 것이다.

입춘이 지났다. 함께 살기 위한 미래를 만드는 씨앗을 뿌리자.

 

기어코 바깥을 보게 만드는 문장들. ‘더 이상 그렇게 살 필요 없어같은 위대한 말들. 혼자만 알고 있으면 반칙인 말들을 널리 내보낸다. 해방의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 중견(中堅) 작가: 나는 가운데(), 굳어지는 것()도 싫다.” -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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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 노인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다. 실버 센류 모음집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 포푸라샤 편집부 지음, 이지수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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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 수 중

여든여덟 수의

센류* 걸작 모음집

 

추천대로 실컷 웃을 거라 기대했는데

한편마다 마음속에 눈물이 졸졸졸

심장인지 위장인지

속이 쓰리고 아프다.




 

... 내가 지금은

웃을 여유가 없구나 싶다....

양친께 보여드리려 하는데

두 분은 어떻게 느끼실지...

 

그래도 비상금 시에는 풋,

꼭 찾아 내셨기를

바란다.



 

* 센류: 일본의 정형시 중 하나. 5-7-5,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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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같이 읽기 - 벨 훅스의 지적 여정을 소개하는 일곱 편의 독서 기록
김동진 외 지음, 페페연구소 기획 / 동녘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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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를 만나고 기억하게 된 계기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제대로 된 입문서를 쓰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를 누구보다 잘 알아야하니 그의 사상도 실천도 신뢰하고 존경한다.

 

이 책은 벨훅스 사상 지형도를 알게 해 줄 거란 기대를 한다. 언급된 저작들을 모두 읽기 전이지만 폭넓은 안내를 통해 이해하고 읽는 것도 좋은 공부법이라 생각한다. 먼저 일독하고 책모임을 만들어 재독하면 더 좋을 책이라 무척 기대된다.



 

...................................

 

오래전에 쓰인 그의 문장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인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 되살아났고,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지닌 일곱 명의 각기 다른 관점은 벨 훅스의 글을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안내해주는 서로의 등불이었다.”

 

벨 훅스가 21세기 여성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처럼 등장하고 연결되는 내용에 에세이 모음집인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모르는 이들의 경험이 내 삶의 어느 시기와 조우하며 상기되고 다시 아픔을 전하는 읽기라서 특별히 더 좋았다. 그땐 언어로 구체화하지 못한 감정과 생각을 글로 만나는 일은 치료와 회복의 과정 같기도 하니까,

 

이론은 지적 유희나 호기심 충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상처와 고통을 주는 이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치유의 역할을 한다고. 이론은 개인의 경험과 서사에서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론은 고통에 언어를 부여한다. (...) 이론은 상처에서 만들어지고, 상처는 이론으로 언어를 얻고, 언어는 말과 글이 되어 힘을 얻는다.”

 

이 책은 벨 훅스의 사상서가 아니라 같이 읽기이니, 다양한 방식의 기록물로, 마치 수백권짜리 시리즈처럼 나오면 좋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계속계속 같이 읽는 사람들의 기록이 쌓여 벨 훅스의 사상도 독자들의 삶도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고 입체적인 대화처럼 만들어 가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두근거린다.

 

날카롭고 따스하며, 이상을 그리지만 또한 매우 현실적인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나에게 그는 매번 지쳐도 다시 돌아가게 하는 그곳, 페미니즘 그 자체였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 답을 모르는 단계, 해법을 현실화시킬 방법을 모르는 단계... 살아가며 직면한 문제를 다루는 일에는 여러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니 이미 배운 것들, 물려받은 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가모장같은 말에 속지 말라고. 실제로는 갖지 못한 힘을 소유했다고 상상하는 그런 마음이 오히려 현실에 대항해 싸울 가능성을 자꾸 줄인다고. (...) 그 신화가 여성들에게 허울뿐인 가짜 권력과 자부심을 강요하면서, 정작 성차별에서 해방해줄 여성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불필요하다고 믿게 했음을 (...)”

 

모르는 이들의 삶이지만, 이미 알고 있는 제안과 고민과 사유와 통찰과 제안들을 자주 만난다. 사회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일이라면, 그에 맞는 방법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기록을 만들고, 목소리들을 연결하고, 삶을 연대하고, 그렇게 변화시키고, 다음 세대에게 분투의 결과인 유산을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

 

언제 몇 명이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같이 읽기모임을 만들어서 다시 읽고 싶다. 읽으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새로운 같이 읽기 기록이 생기면, 또 다시 같이 읽고 싶다. 읽고 배우는 것이 저항의 기본이자 출발이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유쾌하고 다정한 출발신호가 되기를 바란다.

 

벨 훅스의 책들을 읽고 그가 주는 메시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각자의 자리에서 혹은 연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과 질문으로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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