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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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500권의 저술을 남긴 천재라고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역사선생님은 그를 '아마데우스'의 모짜르트에 비교하며 자신은 이런 천재에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열정은 있으데 능력이 바춰주지 않는 쌀리에르에게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그당시 정약용은 천재적인 능력 덕분에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고 알게 되었다. 과연 그럴까? 정약용은 천재이기에 5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 명쾌한 해답을 들어보자.

 

  1. 그의 공부법에는 어떠한 비결이 있었을까?

  문심혜두! 지혜의 구멍이열리지 않는다면 만권의 책을 독파한다한들 않읽은 것과 같다!라는 다산의 지적은 나의 폐부를 찔렀다. 정독보다는 다독을 추구하는 나였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책을 잡고 언제까지나 고민하지 않았다. 재빨리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이해를 제대로 할 때만이 진실로 그 책을 읽는 보람이 있다! 다산의 지적은 나의 독서법을 반성케했다.

  그의 독서법(저술법)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이 책을 읽다가 새롭게 깨달은 점을 메모해둔다는 것이다. 이를 한데 모았다가 분류를 지어 책으로 묶어낸다. 메모의 중요성을 일찍이 들었지만, 귀차니즘과 그 실효성에 의문을 품었기에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산의 500여권 저술의 힘이 바로 이 메모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부터 메모를 시작했다. 서평을 쓰는 지금 이 메모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불취하문(不恥下問)이라 했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수취로 알지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다산이 실천하고 있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주인 노파에게서 배운 일화는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에 매몰되어 있는 당시 조선의 선비들에게 노파는 여자를 차별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씨앗이고 어머니는 땅인 셈이지요. 씨를 뿌려 땅에 떨어 뜨리는 것은 크게 힘든 일이 아니지만, 땅이 양분을 주어 기르는 일은 그 공이 몹시 큽니다."라며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한다. 그러자 다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선구라고 할만한 노파의말에 다산이 진심으로 감복한 것이다. 남자보다 비천하다는 여성에게 다산이 여성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어느 누구와도 토론하고 싶어했다. '어린 시절 티격태격하던 것 처럼 싸워보자'라는 다산의 편지글은 지금의 '하브루타' 학습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토론수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유대인 교육의 핵심인 '하브루타'를 다산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 전통을 우리는 왜? 잃어버렸을까?

  다산은 귀양지에서 '과골삼천'의 모습을 보였다. 책을 읽고 저술하느라 복사뼈 살이 세번이나 구멍이 났다. 그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 자리를 사랑했다. 일상득취법! 그것은 귀양지 생활을 이겨낸 힘이었다. 나무를 심고 연꽃을 연못에 기르며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다산초당을 만들었다. 얹혀살고 있는 다산은 자신의 집처럼 초당을 꾸미고 주인처럼 살고 있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임제스님의 말을 그가 실천하고 있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지기 보다는 지금의 현실속에서 주인이 되어 당당히 자신의 학문세계를 닦아가는 그의 태도가 그의 진정한 공부법의 비결이었다.

 

2. 다산에게 대한 오해와 편견

  다산은 잘알려져 있지만, 너무 잘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편견으로 가득한 사실들도 많다. 다산이 '기기도설'을 보고 거중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알려져있다. 일부 사람들은 거중기가 특별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미 '기기도설'에 나와 있기에 그걸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라고 다산을 깎아내린다. 그러나 다산은 거중기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기기도설'의 원리를 이용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전혀 다른 거중기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다산의 위대성이다. 핵심원리를 취득하여 제2의 창조를 하는 모습 그것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어떤 사람은 정약용이 주자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그를 성리학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를 좀 안다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할때, 나는 별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였다. 주자 절대주의에 빠져있는 교조적 조선사회에서 주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다. 자신의 죽음을 부를 수 있는 현실에서 대놓고 주자를 비판할 수 없다. 그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했다. '인'에 대한 입장이 주자와 달랐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얇은 지식으로 다산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산에 대한 많은 오해와 편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다산이 혼자서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점과 그에게는 제자가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다산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한 소치였다. 다산은 그의 저술에 아들들의 힘을 빌리기도 했으며, 직접 외가쪽의 아이들을 모아다가 가르쳤고 그들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자 자신의 저술작업에 참여시켰다.

  이들 제자중에서 황상이라는 제자가 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다. 황상과의 첫만남은 참으로 인상 깊다. 황상이 자신은 둔하고 앞뒤가 막혀있으며 답답한 성격이라고 말하며 문사를 공부하라는 다산의 권유에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다산은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다. 네게는 그 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라는 말로 황상을 감복시켜 학문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고 황상은 다산이 죽어서도 그를 잊지 않는다.

  그뿐이아니다. 18년 동안 날마다 저술만 하다보니 복사뼈가 세번이나 구멍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어 황상을 감복시키기도 했다. '과골삼천'의 모습!! 이를 보고 학문을 게을리할 제자가 있었을까?

  다산의 저작은 다산학단의 집체 활동의 결과물이다. 다산은 저술의 총 기획자였고 제자들은 자료를 모으고 발췌했으며 이를 편집했다. 그러면서 이들 제자들의 학문수준도 높아졌다. 황상을 비롯한 이청, 이강회 등의 제자들이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다산이 다시 등용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제자들의 학문적 업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 부분이 다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질 때! 다산의 위대성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라, 누구든지 노력하면 따라갈 수 있는 길임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것이다.

 

3. 조선 중화법!!

 다산은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앞선 것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바로 조선 중화법이다. 그렇다고 우리것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변화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다산의 학문정신이다. 개방적이면 주체성이 없고, 주체적이면 자기것을 고수하여 타국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산은 이 극단을 취하지 않고 뿌리를 조선에 두지만, 외부의 장점을 받아들여 변화를 추구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산에게서 배워야할 학문하는 모습이다.

  순수와 참여의 논쟁이 있었다. 어찌보면 대가들의 논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현실을 직면할 용기없는 작가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논쟁이라 생각된다. 현실을 떠난 문학이 문할일 수 있을까? 다산은 당시 조선 사회를 고발하는 다양한 문학 작품을 남겼다. '애절양'을 비롯해서 수많은 시들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조선의 민초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 결과 '목민심서', '흠흠심서'와 같은 대작들이 나온 것이다. 잊지 말자! 현실에 뿌리밖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단지 말장난일 뿐이다.

 

4. 잡상

  다산은 글쓰기 방법도 알려준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물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예화를 들라고 한다. 이것은 이덕일의 글쓰기와 정확히 맥이 닿아있다. 이덕일의 평전과 타인물의 평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인물에 대한 막연한 왜침만을 부르짖는 평전들과 달리, 이덕일은 다양한 예화를 통해서 그 인물을 드러낸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다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기췌마법' 즉, 기미를 분별하고 미루어 헤아려라라는 다산의 말을 통해서, 그가 혹시 한비자를 읽은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기미를 제대로 헤아리라는 말은 한비자에 있는 내용이다.  무오년(1798) 겨울에 돌림병이 서쪽 길을 따라 퍼졌다. 나이든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그는 황해도 배천의 강서사에 가서 화문석을 사오게 했다. '칙사'가 오는 것도 아닌데 왜? 화문석을 사오게했을까? 얼마후, '황제가 붕어하여 칙사가 왔다.' 그는 서쪽에서 온 돌림병에 노인들이 죽어나가자, 나이가 80이 넘은 황제가 무사할리 없다고 판단하고, 칙사가 올 것을 예상하고 화문석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이다. 기미를 살펴 앞으로의 일에 대비한다는 한비자의 당부를 다산은 실천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탁월한 재판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가만을 공부했다면 보일 수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며 그 바탕을 마련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오래보아야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다산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우를 이 책을 통해서 바로잡게 되었다. 다산은 천재이기 보다는 노력하는 학자였다. 혼자 공부하기 보다는 여러 사람이 팀을 이루어 집단 연구를 통해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노련한 기획자였다. 그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면 우리가 어떠한 교육과 학문연구를 해야하는지 방향이 보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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