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기는 (중국) 후주(後) 사람이다. 광종 7년(956) 광종을 책봉하는 사신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 때문에 고려에 머물렀다. 쌍기의 병이 낫자, 광종은 그를 만나고 매우 흡족히 여겼다. 광종은 그의 재주를 아껴, 후주 황제에게 관료로 삼겠다는 글을 올렸다. 광종은 쌍기를고려의 관리로 발탁했다. 1년도 되지 않아 문병, 각종 대내외 문서 작성 책임자)을 맡겼다. 당시에 너무 과중한 대접을 했다는 여론이 일었다. 광종 9년(958) 쌍기는 과거제도를 시행할 것을 건의했으며, 그는 여러 번지공거(知, 과거 고시관)가 되어 시(詩). 부(賦)·송(頌)·책(策)을 시험 - P84
과목으로 삼아 인재를 선발하고, 후학들의 학문을 권장했다. 이로써 고려에서 학문을 숭상하는 기운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광종 10년(959) 후주에서 시어(御)로서 청주(淸州) 수령으로 있던 쌍철(哲)이 아들 쌍기가 광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후주) 사신 왕금(王)을 따라 고려에 왔다. 광종은 그를 좌승(佐丞, 3품)으로 임명했다. 그 뒤의 일은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사> 권93, 쌍기 열전. - P85
왕조 건국 당시 여러 신하들 가운데 원래 노비를 소유한 자는 제외하고, 그 밖에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자는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돈을 주고사서 노비를 삼았습니다. 태조는 일찍이 포로 노비를 해방하여 양인으로삼고자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겼습니다. 60여 년이 지났지만 소를 제기한 자가 없었습니다. 광종 때에 처음으로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려 하자, 공신 - P93
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으나 간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목왕후(大穆王后. 광중 비)가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광종은 듣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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