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8.15 해방 직전인 8월 10일경이었다. 장소는 혜화동의 남상일(南相) 씨 자택이었다. 그는 당시어느 통신사의 사장이었는데, 몽양과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거기서 조동호를 위시해 이강국, 최용달 등건국동맹의 대물급이 출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몽양이 신뢰하는 아지트임을 알았다. 나에게 말한 것은 "인간관계를 정리해보게"라는것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각계각층 인명의 정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방 후에 등장 배치될 인명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단 무엇보다 친일파는 배제하고 유능하고 청결한 (흠결이 없는), 우선 중앙부터, 이어서 전국에 달하는 독립운동에 공로가 있는 인물의 명부를만드는 것이었다. (...) 몽양이 알고 있는 것은 1923~1929년까지로당시 서대문감옥에 빽빽이 들어차 있던 제1, 제2, 제3(ML당), 그리고 신간회의 광주학생대회사건, 간도공산당의 폭동에 관련되어 연행되었던 무리 등의 인명과 그 인품을 내가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천추 8월 10일경 건준 활동 시작 - P57
A우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조선에무정부상태가 이어질 것을 걱정했는데, 민중의 안녕질서를 어떻게지킬 것인가가 제1의 목적이었다. 나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의 정황과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독립의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해방된 기쁨과 동반해 흥분하게 되면 무질서한 폭동도 일어날 우려가 다분했기에, 날짜는 분명히 기억할 수 없으나 확실히 13일에 경무국장을 중심으로 최고재판소의 검사장, 헌병대장등 치안 관계자의 회의를 소집해 그 대책을 토의했다. 거기서 당시조선 민중 사이에 명망이 높고, 과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도, 그리고나도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고, 내가 평소 씨의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 씨에게 치안 문제를 위탁하게 되었다. 그래서 8월 15일에 씨를 총독부에 초빙해,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과 동시에 치안 문제에 대해 책임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원등유작 - P60
해방 직전 당시 여운형은 분망해서, 때때로 엔도 류사쿠(조선총독부정무총감)로부터 호출이 있으면 회합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8월15일 아침, 또한 엔도로부터 전화가 있어서 몽양은 엔도의 관사에 갔다. 그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방송을 나는 남상일의 자택에서 들었다. 때는 왔다. 나는 준비를 완료해서, 후에 몽양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계동의 임용상의 옛 저택(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의 작은 서양식 건물로 출근했다. -이천추 - P61
조선 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응락을 하였다. 즉(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8월, 9월, 10월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 훈련과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 -8월16일 휘문중에서 여운형 연설 - P72
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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