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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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많이 보는 다큐가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속의 생존경쟁에 지치고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고픈 존재들을 위한 다큐다. 내가 살고 싶은 대자연 속에 집을 짓고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면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나날들을 상상한다. "나는 자연인이다" 속의 자연과 자연인은 천국에 살고 있다. 그들을 괴롭히는 생존투쟁도 없고, 자본의 구속도 없다. 여유와 행복만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는 "나는 자연인이다" 속의 자연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전통사회를 소개했다. 이 책의 '전통사회'는 무리사회 혹은 부족사회를 뜻한다. 국가 성립 이전의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는 원시 부족사회를 낭만적으로 생각한다. 공동 생산 공동 분배하는 평등한 사회이며, 일정시간 사냥을 하고 여유롭게 나머지 시간을 즐기는 낭만의 시대로 생각한다.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유발 하라리는 원시 사회를 이상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든 교수는 낭만적 원시 부족사회는 없다고 말한다. 

  한예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게 머슼켓총과 군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감자가 전해지자 대규모 머스켓 전쟁이 발발했다. 피지섬에도 머스켓 총이 전해지자 폭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평화로운 원시 부족사회는 환상이다. 그들 사회는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부족간의 전쟁이 빈발했다.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은 한정된 식량을 두고 더욱 치열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작은 전투에 총이 전래되자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했다. 평화로운 무리사회 혹은 부족사회는 없었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향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직접 가보지도 않은 원시시대를 원시 공산사회로 미화했고, 루소는 평화로운 원시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자유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맺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원시 부족사회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현대인에 의해서 발견되어지자, 그들은 원시 부족사회의 삶을 청산하고 문명사회에 적응하려했다. 왜일까?

  부족전쟁이 식민 정부의 강압적인 개입으로 종식되자 부족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부족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를 인구비율로 비교해보면, 현대 전쟁의 사망자 비율보다 부족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비율이 많다. 잦은 부족전쟁은 부족사회보다 현대 문명사회를 더 행복하게 여기게하는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뉴기니 고원지대의 아위야나족 남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삶이 더 나아졌다. .... 아침에 일어나 화살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없이 집에서 나와 소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20쪽


  국가가 없다면 개인은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홉스의 지적은 자연상태를 평화로운 상태로 가정한 로크나 루소보다 더 현실적이고 타당했다. 폭력의 독점은 개인간의 폭력을 줄였다. 그러하기에 혼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제3세계 민중들은 독재자에게도 복종했던 것이다.

  원시 부족사회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번째로 관계 획복에 촛점을 맞춘 사법체계를 들 수있다. 학교 현장에서 학폭이 법정에 까지 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교사에게 민원을 제기하고 고말을 남발하는 학부모도 있다. 모든 것을 '법대로 처리'하려는 얄팍한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팍팍하게 말들고 있다. 학교폭력이 벌어지면 해당 사안을 처벌에 촛점을 맞춰 진행하다보니,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의 관계회복은 이뤄지지 않는 비극이 발생한다. 

  부족사회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는 뉴기니에서는 사법적 처리도 이뤄지지만, 관계 회복을 위한 가해자의 노력과 피해자의 용서가 선행된다.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지적했듯이, 관계회복에 촛점을 맞춘 부족사회의 전통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사법적 처리와 함께 피해자가 원한다면 관계회복을 위한 절차를 사법부가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 특히, 학교 현장에서 학폭사안에 대해서는 상담교사의 도움아래 관계회복절차라 이뤄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둘째, 전통적인 뉴기니 사회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멀리한다. 마푸크는 재봉틀을 사서 부족민의 찢어진 옷을 수선해서 돈을 벌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친척들이 마푸크의 이기심을 나무랐다. 옷은 무료수선하고, 마푸크의 결혼식때 신부값을 지원하는 다른 방식으로 댓가를 지불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사례를 한가지 더 들자면, 뉴브리튼 섬의 카울룽족 아이들은 바나나 먹여주기 놀이를 한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놀이를 하며자란 카울룽족 아이들은 이기심보다는 공동체 의식을 더 중요시한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는 친구를 이겨야 내가 1등급을 맞을 수 있는 경쟁구조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한학년에 2명 이상의 교사가 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은 타반 선생님은 힌트를 주었는데 우리는 왜? 주자 않느냐며 항의한다. 물론, 확인 결과 타반 선생님은 힌트를 제공한 적이 없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친구를 딛고 일어서야한다는 경쟁심을 가르치는 우리 교육 현실이 개탄스럽다. 함께사는 세상을 만들기 보다는 타인을 딛고 내가 일어서는 삶을 살려하지 않을지 무척이나 염려스럽다. 

  셋째, 원시 부족사회의 노인 우대문화가 부럽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유교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사라진감이 든다. 물론, 원시 부족사회라고해서 무조건 노인을 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한정된 식량자원을 아끼기 위해서 노인을 유기하거나 죽이는 원시 부족사회도 있다. 그러나, 노인의 지식이 생존에 유용했던 원시 부족사회에서 노인은 존중받을 수밖에 없다. 

  친가에 나이드신 어머니가 있고, 처가에 연로한 장인어른이 있다. 노부모를 봉양해야하는 상황에서 여러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난다. 나의 어머니에 대해서 효를 행하라고 아내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인 효를 강요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를 봉양해야한다. 날로 노쇠해지며 치매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를 어찌 모셔야할지 눈물만이 흐른다. 

  넷째, 이중언어의 중요성이다. 원주민들은 보통 4~7개의 언어를 한다. 혹은 1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도 있다. 좁은 지역에 다양한 언어가 있는 뉴기니에서 이중언어 생활은 당연한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원주민 언어를 보호하고 이중언어 생활을 하는 것이 치매를 예방할 뿐만니라 원주민집단의 안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자신의 뿌리가 되는 언어를 무시하고 타언어를 열심히 배우자는 주장은 아니다. 


  "원주민 소수집단 중에서도 문화와 언어를 원형대로 유지한 집단들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사회복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적다."-596쪽


  오스트리일리아 원주민 중에서 전통적인 부족언어를 배운 원주민은 문화적으로 단절된 원주민보다 약물을 멀리하는 경향을 띤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영재교육 연수를 갔을 때, 뇌과학자분이 유대인의 예를 들면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정체성을 세울 뿐만 아니라 뇌발달에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라없는 유대인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저력은 역사와 언어를 잃지 않으므로서 뿌리뽑힌 민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또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 뇌발달을 위해서, 타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의 책은 언제나 우리에게 통찰력을 준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된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의 벽돌책을 열심히 읽는지도 모른다.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는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서도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냐 협조적이냐를 따지는 건 헛수고일뿐이다. 어떤 인간 사회에나 폭력과 협조는 동시에 존재하며, 환경에 따라 하나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233쪽


  그렇다. 성선설과 성악설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교육되었고 어떤 환경이 생애 초기에 제공되었느냐에 따라서, 자원의 희소성과 위협적인 국가가 이웃하느냐 등에 따라서 폭력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고 협조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의 세계 질서는 폭력적인 인간을 만들고 있을까? 협조적인 사람을 만드록 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는 나의 마음에 심오한 화두를 던진다.







ps.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책에도 아쉽지만, 옥의 티가 있다. 


  "히틀러와 일본 조차 소련과 미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그와 동시에 소련과 미국을 공격했다." -205쪽


  "일본 조차" 미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했다는 재레드 다이아몬든 교수의 지적을 잘못된 것이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 때 미국에 기습 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의 전형적인 전쟁 수법이 이른바 '선빵필승'이다. 선전포고 없이 먼저 공격한 후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후포고라고 해야하까?

  근데, 251쪽에는 진주만 기습을 "선전포고 전에 행해졌기 때문에 미국인들에게는 기만적인 잔혹행위로 여겨졌다."고 섰다. 205쪽의 서술과 배치된다. 물론, 205쪽 서술이 잘못된 것이다.


'어제까지의 세계'에는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문장도 소개되있다. 


  "종교는 억압 받는 사람들의 한숨이고, 비참한 세계의 심장이며, 영혼없는 상황의 상황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482쪽


  종교가 구원의 사다리이기보다 민중을 착취하는 지배자의 도구 혹은 그 지배자 자체일 때 마르크스의 종교에 대한 정의는 유효하다. 현재의 한국 종교에 이 정의가 유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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