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에서 배우는 禪의 지혜 -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이 전하는 선사들의 가르침, 개정판
윤홍식 지음 / 봉황동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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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상사' 강의를 들으며 화두를 처음 접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화두를 접하며 '불교는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편견을 더욱 견고화 시켰다. 그러던중,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화두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강신주가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집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강신주는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이상 펴내지 않았다. 화두에 관한 갈증이 높아갈 때 윤홍신의 책을 집어들었다. 과연 윤홍신은 나의 갈증을 풀어주었을까?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를 읽으며 가장 인상에 남는 간어는 '반조선'이다. 조선에 반역한다는 뜻일까? 아니다. 화두를 통해서 수행하는 방법에는 화두선과 반조선이 있다. 화두선이 선문답을 제3차의 입장에서 묻고 의심하며 화두를 풀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반조선은 스님의 대답을 듣고 곧장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윤홍신은 간화선이라고도하는 화두선 또한 반조선의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화두선만을 알던 나로서는 반조선은 더 어렵다는 선입견이 몰려왔다. 그러나, 윤홍신의 반조선은 화두를 어렵게 풀지 않는다. 강신주가 서양 철학의 개념을 이용해서 화두를 풀었기에 읽으면서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윤홍신의 반조선은 너무도 쉽게 설명하여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홍신이 풀이한 화두 중에서 '세존, 침묵의 설법'이 가장 인상적이다. 세존께서 법좌에 올랐다. 세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나무방망이를 쳐서 설법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 화두를 읽으며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생각났다. 음악에 조회가 있는 사람들은 존 케이지가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음을 '4분 33초'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비움이 있어야 새로움을 채울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홀에서 음악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가 소음이라는 이름을 붙이 소리들이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세존도 자신의 설법으로 가득 채워야할 장소를 비우셨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침묵을 듣도록하였다. 침묵의 설법으로 우리의 내면을 직시하고, 세존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릇은 비워 있어야 쓰임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귀를, 우리의 생각을 비울 때 진리로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오조, 어느 것이 진짜 몸인가'에 대한 풀이도 인상적이다. 윤홍신은 이 화두를 풀이하기 위해서 '유설이혼기'라는 글을 소개한다. 장감이라는 청년이 천녀라는 여인과 도망가서 아이를 낳는다. 천녀가 마음의 병을 앓자, 장감은 장인집에가서 그간의 일을 설명한다. 그런데, 장감의 아내 천녀는 장인 집을 떠난적이 없단다!! 천녀는 모든 힘을 잃고 5년 동안 방에서 앓고 있었다. 장감이 아내를 데로오자 두 천녀는 하나로 합쳐졌다. 혼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죽으면 땅으로 사라진다. 천녀의 혼백은 장감을 따라 갔지만, 육신은 집에 남겨져 있었다. 마치 뇌사에 빠진 것처럼.... 

  그렇다면 혼백과 육신 중에서 누가 천녀일까? 이러한 이분법적 질문이 잘못이다. 혼백과 육신도 천녀이다. 나의 손과 발이 나이듯이 말이다. 온전한 천녀는 육신과 혼백이 분리되지 않은 천녀이다. 

  그런데, 윤홍신은 의외의 설명을 한다.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 수 있는 자라야, 죽은 뒤에도 자유자재로 의생신을 나투며 온 천지의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이 진정 혼백의 주재권을 장악하고 지수화풍을 자유자재로 모이고 흩어지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398~399쪽


  지수화풍을 자유자제로 모이고 흩어지게 한다니?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다니? 정말 쌩뚱 맞다는 생각이든다. 도교의 도사들이 도술을 부릴 수 있다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혹세무민을 저지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21세기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사 혹은 사이비 종교인들이나 할 것 같은 표현을 불교 서적에서 읽으니 못내 불편하다. 



  화두에 대한 갈증에서 읽기 시작한 책을 내려 놓았다.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쉽게 풀어쓴 윤홍식의 반조선이 묵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강신주의 책을 읽기 전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강신주의 화두 풀이를 듣기 전에 화두에 관한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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