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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 - 돈과 타협으로 국방력을 대신했던 나라의 최후 ㅣ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21년 11월
평점 :
전통왕조들은 역사를 거울에 비유했다. 송나라 시기 쓰여진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거울 감자가 쓰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이 성리되고 나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성립되었지만, 역사를 우리의 현재를 비추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유효해 보인다. 강정만 교수의 중국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는 무척 재미있다.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에 이어서, '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을 집어들었다. '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비춰줄까?
1. 송나라 백성은 행복했는가?
'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에는 백성을 위해서 전쟁보다는 굴욕적인 항복 혹은 강화를 선택한 사례가 많이 나온다. 남방의 10국 중에서 가장 긴 71년 동아 국가를 유지해온 전류가 세운 오월은 백성을 생각해서 송나라에게 나라를 바쳤다. 전쟁으로 백성을 고달프게하지 말라는 선왕의 유지를 마지막왕 전숙이 존중한 결과였다. 그러나, 전숙은 회갑잔치에서 갑자기 죽는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책에 전숙의 갑작스런 죽음에 어떠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적혀있지 않다. 백성을 위해서 전쟁을 피해서 나라를 송나라에 바친 결과는 군왕에게는 행복하지 않았다.
송나라 역대 황제 중에서 3대 송 진종은 치욕적인 '전연의 맹'을 맺었다. 천자로 자처한 중국 한족의 황제가 요나라에게 굴욕적인 세폐를 바치며 평화를 얻었다. '중국사개설'에는 이를 송나라가 요나라의 맹공을 잘 방어해내서 이후 100여 년 동안 평화를 누렸다며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반면 여타의 중국사책에는 이를 굴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에는 "돈으로 산 '평화'는 그 후 100여 년 동안 송나라 번영의 밑바탕이 되었으나, 송나라로 하여금 지나치게 문치주의에 빠지게 하여 국방력을 약화시킨 후과를 낳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평화를 돈으로 산것은 맞지만, 이것은 송나라가 '지나치게 문치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서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송나라는 태조 조광윤 때부터 문치주의에 빠져들고 있었다.
돈으로라고 평화를 사서 백성들을 편안하게하고 싶은 송나라 황제들은 이후에도 전쟁에서 패하면 돈으로 평화를 샀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했을까? 강남 개발을 하면서 부유해진 송나라에게 30만 냥이라는 돈은 많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정도 돈으로라도 평화를 살 수 있다면 당시를 살았던 지배층과 백성들은 행복할 수 있다. 적어도 당시만은.....
그러나, '전연의 맹' 이후, 송 진종은 봉선의식에 빠져 백성들을 무리한 부역에 내몰았다. 재정낭비는 심해졌다.
송나라 역사 전체를 살펴보자. 송 태조 조광윤 부터 송 인종 조정 시기 까지의 백성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휘종 이후의 송나라 백성은 불행에 빠져든다. 송 휘종 조길은 정치보다는 문화 예술에 심취하여 '북송육적'에게 국정을 맡긴다. 북송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메기 효과(Catfish effect)'라는 말이 있다.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영국 시장까지 운반하기 위해서 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풀오 놓는 것이다. 청어는 살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로인해서 살아있는 청어를 영국 시장까지 들여올 수 있었다.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백성들을 혹사 시켜, 영토를 넓히고 송나라를 위협하는 오랑캐들과 대결하는 길을 피하고,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고 국가의 안정을 보장 받기 위해서 돈으로 평화를 샀다. 메기가 사라지자 청어가 쉽게 죽듯이, 쉽게 평화를 얻게 되자, 송나라 황제는 환락과 아닐함에 빠져들었다. 결국, 북송의 두 황제, 송 휘종 조길과 송 흠종 조환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간다. 희종은 금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도 자신의 부인 현숙황후 정씨에게는 능욕을 당하고도 자살하지 않는다며 책망을 했다. 부국강병의 힘들길을 피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는 쉬운 길을 택한 북송의 마지막 모습이다. 돈으로 평화를 샀더라도, 그 평화가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끊임 없이 군사력을 키우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현명함을 갖지 못한 댓가이다.
2. 현명한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송나라 역대 황제 평전'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어진 황제와 어진 황태후, 탁월한 예술 군주가 등장한다.
송 인종 조정은 어진황제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며 관용을 베풀어 '인종성치'의 시대를 열었다. 인종이 이렇게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친어머니 신비는 먹고 살기 위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법적 어머니 유황태후도 비천한 가문 출신이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친어머니 이신비의 존재를 알았다. 얼마나 가슴아팟던지 며칠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대성통곡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조선시대 연산군 처럼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종은 어진 황제가 되었다. 산책을 하다가 시종들이 물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알고 갈증을 참고 내전으로 돌아오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자신이 시종에게 물을 가져오지 않았음을 질책하면, 시종은 처벌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 갈증을 참았던 것이다.
인종은 어찌하여 성품이 이리도 인자할까? 물론, 성품은 타고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종의 비천한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 그를 인자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친어머니와 법적 어머니가 모두 빈천한 가문 출신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황제인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출신이었기에,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으며,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균역법을 비롯한 많은 법들을 만들었다. 송나라 인종도 조선시대 영조도 자신의 어머니가 빈천한 출신이라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그들을 어진 지도자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인종의 법적 어머니 유황태후는 어진 황태후로 역사에 남았다. 그녀는 천한 출신으로 인종의 생모 이신비의 몸을 빌려 인종을 출산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여황제의 꿈을 꾸기도 했다. 물론, 선을 넘을 뻔하기도했다. 무측천이 조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대신에게 조칙을 반포하는 '무후임조도'를 신하들의 충언을 듣고 버리기대했다. 천자의 어가인 '대안련'을 타려다가 신하 노종도가 충언을 하자 황태후의 가마로 갈아탔다. 인종의 생모 이신비가 죽자 궁궐 밖에서 후궁의 예로 장례를 치루려 했다. 그런데 재상 여이간이 충언을하자, 이신비를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뤘다. 그로인해서 인종이 황제로 즉위해서 유씨 일가를 멸족시키지 않았으며, 유황태후를 어머니로 모셨다.
그녀가 어진 황태후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야망이 없어서가 아니다. 무측천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녀도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충신들의 간언에 귀기울이며 스스로 그친줄 알았다. '도덕경' 44장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했다. 그녀는 측천무후 처럼 스스로 멈출줄 몰라서 자식을 죽이고 후대에 비난을 받는 불행을 겪지 않았다.
탁월한 예술 군주 송 휘종 조길은 북송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황제이다. 근대 문헌학자 섭창치는 "도교를 숭상한 송휘종은 청의를 입고 금나라에 굴욕을 당했지만, 예술 분야에서는 천고의 제일가는 천재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탁월한 예술가는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조선시대 연산군도 시와 예술을 사랑했던 군주였다. 화려한 전각을 짓고 음악과 시를 즐겼던 그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폭군이다. 휘종과 연산군, 두사람은 예술을 사랑한 군주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백성을 따뜻하게 보살피기 보다는 자신의 예술적 흥취를 충족시키기에 관심이 많기에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없는 것일까?
나의 이 질문은 좀 옹졸해 보이기도하다.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도록 했던 세종은 절대음감을 지녔다. '여민락'을 직접 작곡했던 세종은 조선시대는 물론,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 제일가는 현군이다. 조선 세종은 문화예술을 사랑했지만, 백성의 고닮픔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국강병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농업생산력을 높이고자 '농사직설'을 편찬했으며, 노비에게도 산후 휴가를 주도록했다. 최윤덕과 김종서로하여금 4군과 6진을 개척하도록했다. 탁월한 예술가가 탁월한 군주가 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예가 드물다. 만능천재가 흔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그러하기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라고 조언하는 것이 아닌가! 휘종과 연산군이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면 그들은 탁월한 예술가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히도 군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삶도 백성의 삶도 고닮프게 만들었다.
송나라를 주름잡았던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하는지 생각해본다.
저자 강정만은 송나라를 '중국식 민주주의가 꽃피운 시대'라고 평가했다. 관료들이 황제를 끊임 없이 견재하고, 황제는 이를 존중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말한다. 대학에서 송대를 '황제 독재체제가 완성된 시기'로 배웠기에 상당히 낯설었던 평가였다. 이러한 낯섦은 송나라의 역대 황제의 인자한 모습을 보면서 해소되었다. 제도적으로는 황제 독재체제가 완성되었지만, 그들은 독재권력을 마음껏 휘두르지 않았다. 신하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렸다. 물론, 이것이 문치주의의 나약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군주의 인자함을 잃지 않은 송나라 황제의 인품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북송시대를 지나, 여진족과 몽골족의 등살에 기를 펴지 못한 남송 시대를 접어들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송도종 조기 부터 시작하여, 송공제 조현, 송단종 조하, 송소제 조병에 이르는 황제들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멍청했다. 왕조 말기, 연이어 무능하고, 어린 황제의 등극은 간신들이 발화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이 밀려왔다. 연이어 혼군과 폭군이 들어서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