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박노자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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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아버지가 소작농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본다. 트로츠키는 따스한 아버지가 왜? 소작농에게는 가혹하게 대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탐구한다. 트로츠키의 결론은 아버지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체제가 아버지를 가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아버지를 소작농에게 잔인한자라고 매도하지 않고 러시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찾아내는 트로츠키의 모습이 경이롭다. 러시아 출신 박노자도 트로츠키와 비슷한 점이 많다. 유대인이며, 러시아 출신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며 그 구조적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트로츠키와 박노자가 닮은 점이다. 박노자가 본 '러시아 혁명사'는 무엇인가 다른점이 있으리라 기대된다. 박노자의 안내로 '러시아 혁명사'를 감상해보자. 


1. 성장은 폭력의 다른 이름인가?

  아직도 박정희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으면서도 개발도상국 시기의 고도성장을 기대하며 박정희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장"은 신의 은총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빠른 경제 성장은 박정희만 이룬 것이 아니다. 스탈린도 강력한 계획경제 정책을 통해서 미국과 세계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는 국가로 소련을 만들었다. 스탈린은 빠른 공업화를 위해서 농촌을 희생했다. 농민들의 잉여를 수취하기 위해서 법률로 곡물 가격을 낮추는 적곡가 정책을 펼쳤고, 이를 통해서 농촌의 잉여를 산업에 투자했다. 농촌을 희생해서 공업화를 이루는 모습은 박정희의 개발정책과 너무도 유사하다. 박노자는 스탈린식의 적색 개발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복지에 신경썼었면, 박정희의 백색 개발에서는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우리가 노동 3권을 보장받으며 노동운동을 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식민지를 희생시켜가면서 경제 개발을 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식민지가 없었던 주변부 국가들은 내부의 농민을 희생시켜 산업화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충직한 박정희의 추종자로 살다가신 아버지가 사실은 박정희의 백색 개발 정책의 희생자였었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스탈린 시기는 경제 성장과 함께 대규모의 숙청이 함께 이뤄졌다. 스탈린 시기를 암흑의 시기로 기억하고 혁명을 일으켜야하는 소련인들은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을 꿈꾸기 보다는 출세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고 박노자는 지적한다. 이것이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인가! 자신의 정적을 비롯해서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총살시키거나 시베리아로 보낸 스탈린 집권기가 출세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시기라니! 박노자는 "스탈린 체제의 대량 총살은 대량 출세의 다른 이름이었"다라고 지적한다. 68만명의 간부가 숙청된다면 다른 68만명이 그 자리를 채우며 고속 승진의 기회를 잡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탈린의 후계자 니키타 후루쇼프가 노동자 출신으로 고속 성장한 것을 들 수 있다. 숙청과 고속 출세는 동전의 양면이었었다. 자신이 숙청당하지 않는다면 숙청의 열풍은 기회의 열풍이었다. 박정희 시대도 비슷할 것이다. 유신시절 유신 정우회는 대통령에게 잘보이면 국회의원이라는 떡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자리였다. 박정희 정권에게 잘보인다면 달콤한 떡고물들을 얻어 먹을 수 있다. 자신이 저임금 저곡가 정책의 희생작 아니고,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고 박정희 독재에 순응한다면, 아니 더 열심히 추종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떡고물들을 핥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암흑기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기였다. 

 

  "성장이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고, 폭력의 사회적 명분 또한 성장이었지요"

  "성장을 약속하는 보수적인 리더에게 몰표가 나오는 이유도 짐작 가능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표를 던지는 이들은 양극화의 희생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164쪽


  성장과 출세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수반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이 있어야했다. 독재정권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일어서야한다. 성장과 출세라는 욕망은 참으로 대단하다. 자신의 몸이 타는줄도 모르고 불길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인간은 성장과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그리고 그 시기를 추억한다. 


2. 박노자는 공산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는가?

  박노자의 그들을 읽어보면, 대한민국에 대한 찬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유튜브 속의 외국인들이 한국을 대단한 나라인 것 처럼 찬양하지만, 박노자는 대한민국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런 박노자가 아련하게 추억하는 시절이 있다. 소련 공산당 시절을 추억하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비판보다는 그래도 그때는 추억이 있다며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물질적 풍요는 누리지 못했지만, 문화 공연을 볼 수 있었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추억한다. 농촌의 공동체가 자신이 살던 도시에 살아 숨쉬고 있었기에 공동체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추억한다. 

  박노자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공산혁명'이라는 미련을 박노자는 벗어던지지 못한 듯한 인상을 이 책 곳곳에서 받는다. 프랑스의 공산당이 체제내에 안주하면서 혁명의 시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 편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조정함으로써 혁명의 기회를 없애버렸다고 서술한다. 심지어 "한국을 비롯해서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21세기의 아시아에 또 다시 공산주의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기 까지한다. 

 박노자가 대한민국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읽으면 한국사회의 아푼 곳을 찔린듯, 움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박노자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지금 붕괴되어 없어진 공산사회가 아닌지 의문이들 때가 많다.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테러를 당하고 머리 수술을 받기 직전의 트로츠키가 한말이 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당은 올바르다."!! 트로츠키는 자신을 죽이려하는 스탈린의 당을 부정하지 못했다. 도그마에 갖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는 눈뜬 장님있었다. 박노자가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치유할 대안으로 제시하는 공산주의라는 환상은 트로츠키가 벗어던지지 못했던 공산당에 대한 환상과 같은 것은 아닐까?

  중국 CCTV에서 만든 '대국굴기' 소련편에서 레닌은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박노자는 "레닌은 작은 데서 성공했지만 큰데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권력을 잡았지만, 그가 꿈꾼 이상적인 사회는 만들지 못했습니다."라며 레닌에 대해서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박노자는 한세기 동안 이뤄진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미련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노자가 어린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싶은 욕망이 크기 때문일까?


  1914년 8월 4일 독일 의회에서 전시 공채 발행안 투표에서 독일 사민당은 단 2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박노자는 이를 두고 "독일 사민당이 자국의 노동자를 도살장으로 내몬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쟁이라는 비상시에 "NO"를 외칠 것을 요구하는 박노자! 그러나 "NO"를 외칠 수 없는 나약한 우리들!! 박노자의 글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그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도록한다. '러시아 혁명사 강의'라는 책도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미련을 벗어던지지 못한 박노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없다. 우리 사회를 정글 속 야만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논리로 사용할 수는 있어도, 결코 우리 사회가 공산사회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점이 박노자와 내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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