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도태된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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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중국역사를 편식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즐겨 읽고, 춘추 전국시대의 고사를 인용한다. 그러나,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중국 역사에 대한 편식은 나또한 예외라 할 수 없다. 대학에서 중국사 강의를 들으면서도 교수님의 전공인 당나라와 송나라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웠지만,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배우지 못했다. 중국사 불균형은 한국사를 공부할 때 빈틈이 생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된다.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는 시기이다. 결국, 명,청시기에 대한 이해 부족은 한국사 이해에 한계를 가져왔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도 마땅한 책을 못찾던 차에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을 만났다. 청나라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가 보자. 


1.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들

  중국사의 특징은 빠른 전성기를 맞이하고, 곧이어 빠른 노쇠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누르하치는 여진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며 명나라를 위협한다. 이시기 조선은 임진왜란의 전란에 휩싸인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조선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누르하치의 군대가 조선에 온다면, 일본군은 많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으로서는 행운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누르하치의 지략과 인품을 알고 나서 나의 생각을 180도 달라졌다. 그는 탁월한 지략과 리더십을 겸비한 인물이다. 만약 그가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면, 조선의 문약함을 알았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보다는 조선을 먼저 정벌하여 이를 발판으로 명을 공격하는 전략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의 역사가 200년으로 단절되고, 여진족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을 것이다. 변발과 문자의 옥을 비롯한 갖가지 사상탄압이 우리땅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었을까?

  청나라의 전성기는 현엽 성조 강희제에서 시작하여 윤진 세종 옹정제를 거쳐 홍력 고종 강희제시기에 절정에 달한다. 일명 강건성세라고 불리우는 기간 동안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개척한다.(원나라는 중국사로 보기보다는 몽골의 역사로 보아야한다.) 

  세명의 황제 중에서도 강희제는 단연 돋보인다.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정성공 세력을 굴복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도량이 넓은 것은 조선에 배푼 그의 호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숙종 23년(1679) 조선 팔도에 대기근이 돌았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시체가 도성에 산처럼 쌓였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조선의 상황은 매우 안좋았다. 숙종은 청에 중강에서 무역시장을 열게해달라고 간청했다. 청나라의 쌀을 사서 조선 백성의 굶주린 배를 채워보겠다는 말이다. 강희제는 달랐다. 성경(심양) 창고에서 5만석을 선박으로 운반하여 조선 백성을 구제했다. 이 사건이 있기 이전 강희제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강희제를 패륜 황제로 그렸다. 사냥을 하면서 서민의 아녀자를 겁탈하는 천하의 패륜아로 묘사했다. 조선 선비의 옹졸함과 강희제의 도량이 너무도 대비되는 부분이다. 그러했기에 조선의 북벌은 실질적 북벌이 아니라, 정신 승리 차원의 북벌일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는 강희제 시기의 전성기를 이어간 황제이다. 악종기에게 반란을 사주한 증정을 직접 심문하며 논리적으로 증정을 굴복시켰다. 증정의 '지역적 중화'에 대항해서 옹정제는 '문화적 중화'로 맞섰다. 그리고 이를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다. 그럼 증정은 죽였을까? 옹정제는 증정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증정을 앞세워 반청지식인을 색출하고 청의 충실한 '개로' 만들어 그를 한껏 이용해서 여진족의 중국지배를 합리화했다. 그러나, 증정의 스승 여유량은 부관참시하고 그 일족 중에서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살해하였다. 냉면제왕 옹정제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섬득한 사례이다. 

  냉면제왕 옹정제도 불노장생의 허황된 꿈을 꾸었다. 그는 급작스럽게 죽는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서 다양한 설들이 분분하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설은 불노장생하기 위해서 복용했던 단약이 그의 명줄을 줄였다는 설이다. 수은, 납, 주석을 비롯한 다양한 중금속을 섞은 단약을 섭취하고 죽은 옹정제를 보면서,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풀한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라는 말을 했다. 불노장생의 허황된 꿈을 쫓다가 죽은 중국의 역대 제황들의 사례를 통해서 영민한 옹정제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불로장생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더 빨리 저세상으로 갔다. 

  청나라가 빠른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고, 연이어서 훌륭한 황제가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가의 적장자 계승법을 고집하지 않고, 태자밀건법(저위밀건법)으로 다음 황제를 지명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유조를 적어 건청궁 '정대광명'편액 뒤에 적어 두고 황제가 죽으면 이를 열어보아 차기 황제를 세우는 방식이다. 그렇다보니, 탁월한 황제가 연이어서 배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옹정제 이후에 태자밀건법이 실시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인터넷 백과에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도광제 함풍제가 이 방법으로 등극했다고 적혀있다. 하여튼, 이부분은 추후에 더 탐색해봐야할 주제이다.) 능력에 기반한 계승방법은 청나라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강성할 것으로 보이던 청나라도 건륭제 집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쇠퇴의 모습들이 드러난다. 


2.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한 황제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를 모범으로 삼아 통치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강희제가 그러했던 것 처럼 자신의 통치 철학을 집권 내내 보이지는 못했다. 그의 집권 중반기에 등장한 화신을 너무도 총애하여 국가를 병들게 했다.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가 집권하고 화신은 가산을 몰수 당하고 목이 베어져 죽게 된다. 그의 집에서 나온 재물이 청나라가 15년 동안 거둬들이는 세금과 맞먹었다고 하니 화신이 저지른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화신을 처벌하고 개혁을 시도한 가경제와 같은 황제가 등극했는데, 왜? 청나라의 쇠락을 막지 못했을까? 더욱이 가경제는 검소함을 추구하였으며, 본인이 모범을 보이려 노력했다. 이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 강정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경제는 화신 한 사람만을 대역죄로 몰아 처벌하고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죄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부패한 관료 조직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20쪽


  그렇다. 건륭제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건륭제의 보호 속에서 갖가지 폐단을 일으킨 화신만을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뿌리 깊은 적폐세력을 통치자의 덕만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과거 군사정권에 빌붙어서 떡고물을 먹고 있던 적폐세력인 기레기들을 이용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하는 현실을 보며,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복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흔히들, 윗사람이 덕을 베풀고, 예로써 교화시킨다면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제왕에게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꾀가 필요하다. 덕과 예로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만민이 예의와 염치를 알때이다. 적폐세력들에게는 예의도 염치도 없다. 가경제가 옷을 기워입어도, 가경제 앞에서만 옷을 기워입을뿐, 사리사욕을 챙기는 적폐세력의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경제의 우유부단함은 적폐세력에게 이용만 당할 뿐, 서서히 쓰러져가는 청제국을 바로세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경제의 아들 도광제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도광제는 관군으로 위장한 임청의 반란군 70여명이 황궁을 기습했을때, 친히 금위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했지 않은가? 그뿐아니라, 그는 반란군 두명을 조총으로 직접 사살하기도했다. 

  태자밀건법에 따라서 가경제가 붕어하자, '정대광명' 편액 뒤에 보관된 밀지를 열었다. 예상대로 면녕을 황태자로 책봉하라는 내용의 조서가 발견되었다. 면녕 그가 바로 도광제이다. 문무를 겸비한 도광제는 충분히 과단성 있는 개혁을 시행하지 않을까? 문무를 겸비한 그도 가경제를 닮아 인자하고 검소했으나 우유부단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짠돌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근검절약했지만, 청제국은 날로 쓰러져갔다. 결국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청제국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도광제의 아들 함풍제는 어떠했을까? 청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함풍제는 난세를 이겨낼 그릇이 아니었다. 그도 개혁을 하려는 듯했으나, 보통의 군주에 불과했다. 통치의 스트레스를 호색과 아편으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다.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못난 군주에 불과했다. 지도자의 무능은 만백성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결국 2차아편전쟁이 일어나고 베이징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서 유린당한다. 청제국의 영광스러운 나날들도 역사속에 사라져갔다. 



  청나라는 우리에게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나라이다. 오만한 조선 선비들에게 힘을 과시한 청나라이기에 우리는 청제국에 대해서 애써 무관심했다. 효종의 북벌이 실행되었다면 성공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기도한다. 그러나, 효종이 북벌을 한들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강희제 시기에 과연 청제국이 호락호락 무너졌을까? 태자밀건법이라는 탁월한 제도로 연이어서 훌륭한 황제가 등극했다. 청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넓혀서 지금의 중국인들에게 선물로 남겨주었다. 

  그러나, 태자밀건법으로 능력있는자가 황제가 되었지만, 황제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인물이 줄어들면서 태자밀건법이 청제국의 쇠약을 막지는 못했다. 보다 과단성있고, 보다 주도면밀한 자가 황제가 되어 개혁을 했어야만했다. 검약을 솔선수범하는 보통의 군주가 거대한 청제국의 쇠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청제국은 우리에게 보다 넓은 인력풀 속에서 탁월한 능력있는 자를 리더로 선택해야만 제국의 쇠약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과연 우리는 청제국이 걸었던 쇠락의 길을 걷지는 않는지 반문해본다. 

  강정만 교수의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은 무협소설을 읽는 듯이 재미있다. 제목이 딱딱하여 어려운 논문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읽어보라. 얼마나 재미있는지 강정만 교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을 것이다. 출판사가 제목을 매력적으로 다시 짓는다면 판매부수가 두배로 뛰어오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청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은자. 머리를 식힐겸 가볍게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ps. 555쪽에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이때 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라고 적고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러일전쟁 이후로 수정해야한다.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은 있었으나,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을 막았다. 


괜찬은 사료 몇개를 소개한다. 


224쪽 (강희제가 조정 대신에게) 오삼계는 오래 전부터 역모를 획책하고 있는 자이오. 서둘러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큰 우환이 될 것이오. 철번을 윤허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윤허하지 않아도 역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차라리 지금 선수를 쳐서 제압하는 편이 낫소" 

461쪽 '엄색루치이배국본소'(도광제 시기) 국가의 많은 은자가 낭비되는 까닭은 아편 판매가 증가하기 때문이며, 아편 판매의 증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아편을 피우지 않아 아편 판매가 감소하면 서양 오랑캐의 아편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엄한 벌로 다스리려면 먼저 아편을 피우는 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하옵니다. 황상께서 조서를 내리시어 금년 모월모일부터 내년 모월모일까지 1년 동안 아편을 끊는 기간을 반포해주시기를 신은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렇게 하면 아편 중독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아편을 끊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494쪽(함풍 2년) '봉천토호격포사방유'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니 내말을 분명히 들어라! 천하는 하나님의 천하이지 오랑캐의 천하가 아니다. 의복과 음식은 하나님의 것이지 오랑캐의 것이 아니다. 자녀와 인민도 하나님의 것이지 오랑캐의 것이 아니다. 만주족 오랑캐들은 잔혹한 성질을 함부로 부려 중국을 혼란에 빠뜨렸는데도, 천하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중국의 백성들은 모두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고 오랑캐처럼 행동하면서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다. 지금 중국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중구에는 중국의 형상이 있는데도 중국인은 만주족 오랑캐으 변발 명령에 복종하여 긴 꼬리를 몸 뒤에서 질질 끌고 다니고 있다. 이는 중국인을 개돼지로 변하게 했다. 중국에는 중국의 의관이 있느넫도 오랑캐는 정대(청조 때 관직을 구별하는 모자의 꾸밈새)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오랑캐으 의복과 원숭이의 관을 쓰게 하여 우리 조산의 의복과 면류관을 파괴했다. 이는 중국인에게 우리의 근본을 잊게 하였다. 중국에는 중국의 윤리가 있는데도 예전에 거짓되고 요망한 가자 황제 강희가 만주족 관리 한 사람에게 한족 가정 열집을 관장하게 하여 중국 여자들을 마음껏 강간하게 했다. 이는 중국인을 모조리 오랑캐 종자로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다."

505쪽(장개석 왈) "예날에 홍수전, 양수청 등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동남 지방에서 일어나 만주족 청나라와 싸웠다. 그들의 원대한 포부와 위업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으며 태평천국은 갖자기 망했지만, 그 민족 사상의 발양은 역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584쪽(선통제 퇴위 조서) "민군이 봉기를 일으켜 여러 성에서 호응하자, 중국 전체가 들끓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특별히 원세개에게 명령을 앤려 민군 대표와 대국을 토론하고 국회를 열며 국가의 체제를 공고적으로 결정하게 했다. (중략) 지금 전국 인민들의 마음은 대부분 공화정으로 기울었다. 남방 각 성의 인민들은 앞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북방의 여러 장수들은 뒤에서 공화정을 주장하고 있다. 인심의 향방이 천명임을 알아야한다. 나 또한 청조를 건국한 애신각라 성씨의 존귀함과 번영을 지키는 일 때문에 백성의 감정을 무시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595쪽 (청조 귀족 출신,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자 희흡이 부의에게 보낸 전보) "황상께서는 조종의 발상지인 만주로 돌아오셔서 대청제국을 다시 건설하셔야합니다. 재난에 빠진 백성을 구하시고 우방국 일본의 지지를 받고 먼저 만주를 통치하신 후에 다시 중원을 도모하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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