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침략론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3
현명철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베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금지불을 거부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한일갈등은 아베의 경제전쟁 선포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베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 정통 극우파들의 세례를 받은 아베는 다시 한번 '정한론'을 펼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이다. '메이지 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론'이라는 책을 꺼내들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 일본인의 이중적 한국관

한일간에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해서 한국수출을 금지하고, 한국에 대한 혐한 방송을 매일 송출하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국민은 일본 관광을 자제하고, 일본 물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아카바 가즈요시 일본 국토교통상은 "우리 정치인들도 한일 우호를 위해 대화해야 합니다.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은인의 나라입니다." 라는 말을 한일문화축제에서 했다. 한국에 대한 경멸적 말을 하고, 심지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 경제는 되살아난다는 망언을 하는 극우파들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발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혼네''다테마이'라는 일본의 이중성을 이해해야한다. 그들이 하는 다테마이를 듣고 그들의 혼네라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는 조선에 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외교 표면에 나타난 적례를 기반으로 한 교린관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을 이으려는 대외평창론이었다."-16

 

일찍이 요시다 쇼인도 일본의 '고사기''일본서기'를 읽으며 신공황후 시기의 '위대한' 일본을 재현하기를 소망하지 않았던가! 지진과 화산폭발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섬나라 사람으로서, 대륙으로 나가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러한 본능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1천년 이상 칼이 지배해온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날것으로 드러낸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숨겼다. '통신사'!! 믿음으로 소통하는 사절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통신사를 맞이면서도 사쓰마번을 비롯한 서남부 다이묘들은 '조선 정벌'이라는 혼네를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관은 쓰시마번도 마찬가지였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자,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교린관계를 '구폐'로 멸시한다.

 

"원래 세견을 약속한 것은 차래지식(嗟來之食, 업신여기며 주는 음식)을 받는 것으로 일시적 구급지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다년간 영지 회복을 꾀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하여 조선에 기대지 않고서는 국력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관례가 생기어 외국에 번신의 예를 취하여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개절치합니다. -1868, 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봉답서

 

조선의 교린정책에 따라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던 쓰시마번이 "수백년간 굴욕을 받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최근 쓰시마섬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받지 않는 가게와 숙박업체가 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한국인 관광객의 도움으로 쓰시마섬의 경제가 지탱되는데도 그들은 한국인을 싫어한다. 한국인 관광객이 뚝 끊기자, 지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며 중앙정부에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혼네다테마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할 수도 없으며, 일본인을 이해할 수도 없다. 역사는 이를 말해준다.

 

 

2. 정한론의 뿌리

정한론의 뿌리를 캐어본다면, 멀리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임나일본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정한론을 다시 수면위로 끌어 올린 것은 에도 막부 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겁이 많고 게으르며 유약한 한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할에 들어갈 것입니다. 일본이 양이를 단행하면 그들(서양)의 불만이 조선을 향하게 되어, 조선을 (침략하여) 교두보 삼아 일본 각 지역을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쓰시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큰일입니다. (중략) 서양 오랑캐가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 책략을 세워 신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 200여 년의 화교(신의로써 조선을 원조한다는 뜻)로 복종시키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때는 병위를 보내야 합니다. -"오시마가 문서"'어원서사'-59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전쟁을 선택했다. 임진왜란도 내부 다이묘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이킨 전쟁이다. 쓰시마번도 서양세력의 침략이라는 충격속에서 쓰시마번이 살아 남기 위해서 조선 침략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익선''주권선'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쓰시마번주의 글에서 묻어나고 있다. 주권선인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서 조선이라는 이익선을 차지해야한다는 논리는 이미 에도막부 시기부터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일본의 본능 속에 대륙으로 진출해야한다는 신념으로 잠재해있었을 뿐이다.

일본이 '정한론'을 주장한 직접적인 이유를 우리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국교 수립을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172

 

우리 교과서에 보이는 이 서술이 사실은 일본측의 주장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고 깜짝 놀랐다. 조선이 왕정복고를 알리는 쓰시마 번의 대수대차사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정한론'이 발생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현명철은 주장한다.

 

"18692월 대수대차사 서계가 조선 조정에 보고 되어 논의되고 있을 때였으며, 받아들이지 말라는 지침이 동래부로 내려오기 전이었다. 동래부가 대수대차사 서계 등본을 보고한 것은 1869년 정월 29일이며, 조정(예조)이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동래부에 전달한 것은 18692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일본에서 등장한 조선 침략론은 조선이 대수대차사 서계를 거절한 것과는 상관없음을 알 수 있다."-84

 

실사구시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연 그러한지 탐구한 다음에 사실을 믿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의 어리석은 외교정책으로 '정한론'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을 했다. 정한론은 일본의 서계를 받지 않은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네속에 침잠해있다가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3. 강화도조약에 대한 평가

강화도 조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대부분 일본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에 의해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명철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조일수호조규는 수많은 갈등과 대화가 결실을 맺은 것임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쓰시마 번을 매개로 이루어진 양국의 대화가 일본의 정권 교체와 집권 과정을 통해 드디어 정부 간의 대화로 변모한 것이다. 단순히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여 맺은 조약은 아니었다."-158

 

과히 충격적인 주장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폐번치현을 결정한다. 이로인해서 기유약조는 붕괴된다. 조선이 입항절차를 엄중히 관리하던 왜관은 언제 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한일간의 최전선이 된다. 이 시기부터 조선과 일본과는 새로운 외교관계가 정립되어야했다. 이 시기 일본과 조선 사이에 기나긴 줄다리기가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에 대한 서술을 무시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일본배 운요호가 포격을 하면서 조약체결을 강요했고, 이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대한 현명철의 날카로운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맺어지는데 운요호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며, 이후, 강화도조약이 일본의 경제침탈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짧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현명철은 그의 책 마지막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주체적인 역사 서술만이 실패로 나타난 사건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159

 

일본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들여다본다면, 우리의 역사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패배의 역사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면, 그는 타인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속에서 우리가 일본여행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소비를 하지 않아야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들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서 끊임 없이 주장되어온 '정한론'의 역사를 직시한다면, "No Japan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로보고,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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