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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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독립운동은 교육에 집중된 것으로 타국과 비교하기가 힘든 특별한 사례이다.' '세계 독립의 역사'를 쓴 알파고 시나씨의 말이다. 우리의 독립 운동사가 무장투쟁이 아닌, 교육운동에 지나치게 치중했다는 주장 자체가 동의하기 힘들었다. 청산리 대첩부터 1930년대 한국 독립군의 대전자령전투와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전투를 알파고 시나씨는 알지 못하나 보다.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사는 지나치게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학생들도 공부하기 힘들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덕일이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이덕일은 나의 기대에 부흥해주는 책을 내주었을까?

 

1. 강자의 정의만이 정의인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1988년 10월 16일 지강헌이 일가족을 인질로 잡고 언론에 한말이다. 감옥을 탈옥한 지강헌의 한국 사법체계,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리며, 자신의 한맺힌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었나보다. 지강헌의 절규는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도 목도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는 전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이뤄졌다.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나치 전범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극동군사재판에서는 제대로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양의 히틀러인 히로이토를 살려주고 일본의 통치 협조를 받아내는 거래를 맥아더는 해낸다. 백인만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는 장면이다. 미국의 이익앞에 약자의 정의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니,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에반해 일제에 의해서 백인 포로를 감시했던 한국인 B, C급 전범들은 가혹한 처벌이 이어졌다. 극동군사재판에서 중요시여겨진 것은 백인에게 가해진 고통이었다. 약자인 아시아인의 고통에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힘없는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이덕일은 이 무거운 주제를 서론 '식민사관 재등장의 역사적 배경'에서 담담하게 서술했다. 이 책은 제1부 아나키즘 독립전쟁사와 제2부 한국 독립전쟁사의 몇 장면 보다 서론이 강력한 인상을 주는 책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여러 이유중에 하나를 이덕일은 서론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2. 조선인 아나키스트의 불꽃같은 삶

  아나키즘하면 '의열단'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회영과 이상룡 선생을 떠올린다. 그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사상을 조명하면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는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만든 자치조직 경학사와 부민단은 상호부조의 아나키즘의 이상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이덕일은 서구 사상의 맹목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이상룡 선생의 사상을 바라보지 않느다. 아나키즘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동양의 고전에서 강조하는 대동사상과 유사점이 많다. 동양 고전 사상에 바탕을 둔 이상룡 선생의 생각이 서양의 아나키즘과 일치했기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고 이덕일은 보고 있다. 즉, 서양의 사상을 우리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장점은 흡수하되 단점은 단점대로 인식하고 비판했던 이상룡 선생의 사상은 '대학'에 " 好而知其惡하며, (고로 이지기악하며), 惡而知其美者가 (악이지기미자가) 天下에 鮮矣니라"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지만 그 나쁜 점을 알고, 싫어하지만 그 아름다운 점을 아는자가 천하에 드물다.'라는 뜻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서양사상에 매몰되어 서양사상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탄탄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

  서양사상을 자신의 주체적 관점에서 소화해서 받아들인 사람은 이상룡 선생뿐만 아니라 이회영 선생이라는 분도 있다. 특히 '양명학의 대동사회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도 일방적 서구문물의 수용을 추구하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사상적 기반위에서 서구의 사상을 수용했다. 사상의 변화는 어느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내적 성찰과 교류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양명학과 아나키즘의 관계에 주목한 이덕일의 주장은 탁월했다.

 

3. 독립운동사의 몇장면

  이덕일은 '한국 독립전쟁사의 몇 장면'이라는 주제로 5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 '독립 전쟁사'라는 말보다는 '독립운동사'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몇장면을 보며 들었던 단상을 적어본다.

  첫째, 높아져가는 고종에 대한 실망감!! 을 들수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고종이 새벽까지 잔치를 벌이며 놀다가 새벽 4시~7시경에 침소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보고 반신반의했다. 설마, 아무리 망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정도이기까지 했겠는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정환덕의 '남가몽'을 인용해서, "고종이 침소에서 낮 12시 전후에 나오니 백관의 조회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끝나버린다."라는 문장을 소개하며 고종의 자질부족을 지적했다. '매천야록'뿐만 아니라 정환덕의 '남가몽'에서도 고종의 모습이 확인된 것이다. 고종에 대한 실망감은 분노로 이어졌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수신도 제대로 못하는 존재가,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둘째, 아관파천의 목적을 어떻게 파학해야할까? 이덕일은 황현의 '매천야록'을 인용하며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대문"에 입헌 정치 체제 수립을 막기 위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일제가 조선을 이때 보호국으로 만들려했으며,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자신도 일제에 의해서 암살당할 수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선교사가 가져온 통조림으로 연명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아관파천은 일제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고종을 일방적으로 자질이 부족한 왕으로 평가하려는 이덕일의 주장에는 동조하기가 힘들다. 고종도 일제에 저항하며 왕조를 유지하려 노력한 인물이다.

  셋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의 주장에 따르면, 전력상 일본은 청나라를 따라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일제가 청나라를 이길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은 일본의 치밀한 전략과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를 일본승리의 원천으로 꼽는다. 패배주의에 휩싸인 늙은 제국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존재에게도 어이없는 도주를 일삼는다. 반면, 일제는 정신병적 광기에 휩싸여 돌격앞으로를 감행한다. 전체주의의 광풍에 휩싸인 일제의 모습은 두렵기까지하다.

 

 

  이책은 이덕일이 여러 논문을 묶어 책으로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서론, 본론, 결론의 서술구조가 논문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들게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덕일 특유의 필력이 살아있다. 술술 읽히는 쉬운 문장들과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필력이 살아 있다. 그럼에도 제목이 '한국 독립전쟁사의 재조명'임에도 불구하고 항일 무장투쟁사에 대한 서술이 없고, 아나키스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사의 몇몇 장면을 소개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덕일이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정리한 책을 펴내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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