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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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 많은 사람들을 철학으로 입문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사람!! 오랜만에 그의 책을 펼쳐들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쪄나? 하는 두려움과 떨림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강신주가 제시한 48개의 만만치 않은 주제들을 강신주만의 필법으로 재미있으면서도 쉽게 풀어냈다. 철학을 설명하면서 철학적 용어에 얽매이지 않고, 뇌과학을 비롯해서 인지 생물학 등 다양한 인접 학문의 언어를 활용해서 철학의 문에 쉽게 들어설 수 있도록 안내했다. 금새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떨림은 환희로 바뀌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밀려왔다. 각 장을 읽고, 잠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강신주만의 매력에 빠져드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신주만의 매력! 그곳에 빠져보자!

 

1. 사랑을 철학하다!

  누구에게는 사랑이 쉬운 일이겠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용기도 부족했고, 사랑의 방법도 기술도 서툴렀다. 미국의 MIT 같은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의외로 연애에 어려움을 느껴 이를 코칭해주는 학원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현대사회에는 생겨났다. 연애 전문 칼럼리스트까지 생겨나며 그의 책을 사서 읽던 추억까지 생각난다. 사랑! 하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랐고, 그랫기에 너무도 실수가 많았다.

 

  "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할때, 상대방도 나를 강제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서로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나의 자유로운 선택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고, 상대방의 자유로운 선택을 나도 존중해야한다. 그럴수록 사랑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아진다. 불안도 따라서 높아진다. 서로를 존중하며 진정한 인격체로 대하며 상대방의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때로는 사랑이 집착으로, 스토커로 변하기 까지한다. 너무도 어려운 사랑! 연애! 이기에 내가 결혼에 성공한 것은 어쩌면 경이로운 기적일수도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 쌕스 로봇이 출현했다. 로봇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대, 어는 설문조사에서는 로봇과 사랑을 나눌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18세~34세의 사람들 27%가 "로봇과 사랑할 수 있다."라는 응답을 했다. 로봇은 나를 거부할 수 없기에, 거부당할 걱정을 하지 않으며 로봇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상대방과 나를 서로 이해하고 따스하게 보듬어 주어야하는 의무감이 '어려운 인간'을 사랑하기 보다, '편리한 로봇'과 사랑하려는 유혹을 느끼게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사랑은 숙명적인 것이고, 로봇과는 숙명적 만남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우연적 만남에 의해서 이뤄지는가? 숙명적 만남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일까?

 

  "2000여 년 서양 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주류 철학자들은 전자의 입장을 표방했다. 플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은 의미란 미리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현대 철학자들 대부분에게 있어 의미란 우발적인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발성의 존재론을 위하여-

 

  운명적 사랑을 믿는 순수한 여성들이 많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운명적 만남이 이뤄질 것이며, 운명의 상대가 자신에게 나타나 주기만을 기대하며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려한다. 이러한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숙명적 만남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 아직도 혼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그 혹은 그녀의 인생에는 '운명적 만남'이 태생부터 운명지어지지 안았던 것일까? "사랑은 우연인가, 아니면 숙명인가?"라는 강신주의 질문에 "사랑은 만드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 받고 싶다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나서야한다. 사랑은 우연히 주어지지도 않으며, 숙명적으로 던져지지도 않는다. 사랑은 용기있는자가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우연을 가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숙명'이라는 단어를 빌려 사랑을 만든다. '운명적 만남'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혼 정보회사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인간은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 사랑은 어떠한 방법이뤄 만들어가야할까? 강신주는 '장자' 지락편의 '바닷새 이야기'를 소개한다. 바닷새를 사랑한 노나라 임금이 바다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해주고, 맛있는 고기와 술을 주지만, 바닷새는 슬퍼하다가 결국 죽어버린다. 자신만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녀는 매몰차게 이를 뿌리친다. 그녀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사랑을 강요할때, 그 사랑은 집착이되고, 그 사람은 스토커가 된다. 결국은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내야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떠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녀를 놓아주어야할까? 그리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야할까?

  20대의 풋풋한 젊음이 느껴지던 시절!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떠나 더 행복해질 수있다면, 그녀를 떠나보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너무도 가진것이 없고, 너무도 못난 나 자신을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깨달았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내 곁에 있을때, 행복하게 하자고... 이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행복하게해줄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을 따를 것인가? 나의 사랑을 그녀에게 강요할 것인가? 라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그녀의 사랑과 나의 사랑을 하나로 녹여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서로 다름이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받아들일때 진정한 사랑은 완성된다. 진정한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녀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너무도 늦게 알았다.

  진정한 사랑의 느낌은 무엇일까? "쇄락(灑落)"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고 말하고 싶다. "쇄락'과 "광풍제월"이란 무슨 뜻일까?

 

  "(쇄락) 이는 한여름 무더위에 텁텁하기만 한 마당에 물을 뿌렸을 때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의미한다." 

  "깊은 밤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멈추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질 때, 맑게 빛나는 달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광풍제월'이다."-쇄락의 경지-

 

  "'쇄락'은 딱딱하게 막혀 정체된 '고체'의 상태와 대립되는 마음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이기도하다.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녀가,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사랑을 강요한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소나기의 상쾌함을 느끼려면,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맑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려면, 고체상태가 되어버린 나의 마음을 말랑말랑한 부드러움으로 바꾸어야한다. 나를 그녀의 틀에 맞추거나 그녀를 나의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기보다 그녀와 내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딱딱한 고체에서 말랑말랑한 액체로 바꾸어야한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사랑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내곁에 있을때,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때, 깊은 밤 오랫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마침내 내려 상쾌함을 선물할 것이다.

 

2. 삶을 철학하다.

  대학시절, 나를 유난히 쫒아다니며, 교회에 나올 것을 부탁하는 여자후배가 있었다. 토론과 논쟁을 좋아했던 나는 그 여자 후배와 여러차례 종교에 대해서 논쟁했다. 그 논쟁 중에서 인상에 남는 말이 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지 용서해주시기에 지금 잘못해도 주일에 교회에 가서 회계하면 되요."

과연 그럴까?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어짜피 용서해주실 것이기에 지금 잘못을 해도 된다. 평일에 죄를 짓고 주일에 용서를 빌면 된다. 라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을까? 그리고 인간에게 지은 죄를 인간에게 용서받지 않고, 신에게만 용서를 받는다면, 그 용서는 유효할까? 여자 후배의 말은 나에게 많은 의문만을 안겨주었다.

 

  "서양의 스피노자, 그리고 우리의 동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유 전통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문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신이란 바로 나의 생명력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수많은 난제들, 고통들이 있다. 이 고통을 이겨내려 많은 사람들은 특정종교에 의지한다. 그중에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가 되기도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약한 생각은 광신도라는 위험한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강신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히결하는" 정신을 "인문정신"이라 말한다. 그래, 나의 삶에 주인으로 살자! 나의 한계를 직시하고, 나의 힘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할때, 나는 인문주의자가 될 수 있다.

 

  "수인사 대천명(修人事 待天命)"(제갈공명)

  "진인사 대천명(盡人事而待天命.)"(남송의 유학자 호인)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생각하다.-

 

  신을 믿으며 노력하지 않는자보다는 자신의 일을 힘써한 후에,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자.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謀事在人 成事在天) 동양철학의 합리주의는 괴력난신에게 의존해서 헛된 욕망을 표출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에 끌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느냐?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는 일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라캉)"-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

 

  수많은 학생들이 부모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은 약 20여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한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자신의 욕망보다 부모라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부모의 욕망을 거부하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킨다. 판사가 되어 부모의 욕망을 대신 채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다가, 집을 나오거나, 학교를 자퇴하기도한다. 어쩌면 너무도 자신의 욕구를 잘 알기에 벌어지는 비극이기도하다. 현명한 자녀는 자신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만,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어리석은 자녀는 부모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다가 부모의 노예로 살아가며 일생을 마친다. 진정 자신의 소망이 자신이 원하는 소망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어야한다. 주체로 산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알에서 깨어나가 위해서 독수리는 몸부림쳐야한다. 그 몸부림은 현명한 몸부림이어야한다.

 

3. 관계를 철학하다.
  결혼식 청첩장이 오면, 나의 결혼식에 온사람의 청첩장인지를 먼저 확인한다. 결혼과 같은 커다란 행사를 거치고 나면, 인간관계가 한바탕 정리된다. 결혼식에 온 친구와 오지 않은 친구로 나누고, 오지 않은 친구는 축의금을 전한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로 나눈다. 그중에서 축의금 조차도 전하지 않은 친구는 나의 주소록에서 삭제한다. 특히, 바쁜 일정을 쪼개서 친구의 결혼식에 찾아가 행복을 빌어주었는데도, 오지않은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생각했다. 일종의 강한 배신감이 불어닥쳤다.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 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선물의 가능성-

  우리가 주고 받았던 대부분의 선물이 사실은 뇌물이었다. 축의금도 어느새 뇌물이 되어버렸다. 줄때부터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는 뇌물이었다. 받는 이에게는 갚아야할 빚이되었다. 선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부터는 축의금의 액수도 상한선이 생겼다. 정말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지난날 사회 초년병 이었던 나에게 따뜻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던 정년퇴임하신 선생님에게 약소한 축의금이라도 넉넉히 드리고 싶었다. 그때는 봉투에 축의금을 더 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때 축의금은 선물이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을 뇌물에서 선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본래 의미가 퇴색해버린 것은, 비단 선물만이 아니다. 예절도 또하나의 뇌물이 되어버렸다. 

  "공자의 눈에는 동방예의지국에는 맹목적인 예절과 제도만이 있을 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감수성과 애정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 그것이 예의 출발이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굴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강자의 섬세함이 진정한 예이다.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렸던 적이 있다. 말라리아는 잠복기가 약 1년쯤된다. 그것도 모르고 열이나고 오한이 생기니, 감기약만 먹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몸이, 갑자기 오한에 고열이 생겼고, 병원에서 닝겔도 여러번 맞았다. 그런데, 버스에서 오한에 고열이 났다. 나의 앞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할머니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에게는 아픈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찌하겠는가? 나의 상태를 설명할 것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자리를 양복할 것인가? 

  뇌물이 되어버린 선물을 구제하고, 맹복적인 껍데기만 남아있는 예절을 되살릴 방법은 없을까? 나에게 솔직하자! 당당하게 나의 삶에 주인이 되자! 축의금도 선물도 내가 상대방에게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만큼만 표현하자. 그리고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자! 나는 그를 축복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상대방이 존경할만하며,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감사의 예의를 표하자! 그러나 그가 권위로 굴림하려하며, 나를 아랫것들로 본다면, 그에게는 최소한의 예만 표하자! 돼지에게 예의를 표해보았자, 돼지는 그것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를 모른다. 내가 아프더라도 상대방이 좋은 대접을 인격을 갖춘자라면 최선의 예의를 표하자, 그러나 노력으로 얻지 않은 '나이'를 무기로 나에게 예절을 강요한다면, 깔끔히 무시하자! 그것이 그를 배려하는 예절이니까...

 

4.  세계를 철학하다.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어느 관료가 "민중은 개, 돼지 인다."라는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먹고 죽은 아이를 어떻게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냐며 기자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타인을 개, 돼지로 보는 사람! 그런사람이 이 나라 교육정책을 세우는 교육부에 있었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서 누구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

 

  우리는 외부의 파동에 동요하지 않는 자를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철학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관념을 뒤집어 엎는다. 나의 내면을 고요히 잠재우고, 외부의 세계에 열려있어야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어찌 참다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사람은 '불인'한 사람이다.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구의역 아이를 보면서 나의 자식처럼 아파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인'한 사람이다. 한의학에서는 손과 발의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되면, '불인'하다고 표현한다. 온 세계는 하나의 우주이다. 나의 몸이 하나의 작은 우주이듯이, 세계도 하나의 커다란 우주이다.

 

  "성인에게 있어 자신과 모든 타자는 하나의 몸으로 묶일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범위만큼이 나의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호가 '만물일체'라고 묘사했던 경지이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하나의 몸으로 본다.'는 뜻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리는 죽은 다리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타인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타인은 죽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살아있는 모든것에 대한 감수성-

 

  '논어'에 맹무백이 공자에게 "자로는 인한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인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자로가 어떠한 사람인지 다시 물었더니, 공자는 "천승을 낼 수 있는 제후의 나라를 유로 하여금 그 군대를 다스리게 할 수 있으나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염유와 공서적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공자는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자들의 탁월한 능력은 알아보았지만, 그가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기는지, 더 나아가 세상 만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지를 스승인 자신도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인한가? 인한가? 우리는 너무도 불인한 사회를 살아왔다. 눈물이 안나와서 오랫 동안 눈을 깜박이지 않으면서 억지로 눈물을 흘리는 못난 리더를 모시고 살았다. 인한 사람을 알아보기가 그리도 힘들었던 것이다. 인한 사람을 리더로 뽑고 나서야, '인한 삶'을 선택하나냐, '불인한 삶'을 선택하느냐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 나를 철학하다.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아간다. 학생들 앞에서는 당당한 교사의 '페르소나'를, 딸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 '페르소나'를, 아내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의 '페르소나'를 쓰고 산다.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페르소나와 맨얼굴-

 

  그런데, 한국인은 유독 페르소나에 집착한다. 때로는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바라보기도한다.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을 용기가 없어 언제나 페르소나에 갖혀산다. 이제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자신의 맨얼굴이라 생각하기도한다. 이럴때, 강신주를 만나며, 김어준을 만나며 자신이 벗어 던지지지 못한 페르소나를 과감히 벗어던진 그들에게 열광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때로는 그들을 흉내내기도 했다. 대중 강연에서 강신주는 가면을 벗어던지라 말했다. 페르소나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처방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듯,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를 쓰고, 때로는 모든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타인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때로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며,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면,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모습은 무엇일까? 이지의 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무릇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략)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이지) -개처럼 살아가지 않는 방법-

 

  사회의 갖은 압력과 폭력에 상처받지 않고,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모습이었다. 현대 사회의 각종 정신병리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자신과 직면해야한다. 자신과 직면하는 이 길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나는 나의 이상보다 못난 나이기 때문이다. 그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아이를 보듬어 줄때, 나의 어린아이는 치유될 것이다. 그리고 페르소나에 갖혀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6. 운명을 철학하다.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습관을 바꾸어라! 라는 말이있다. 조그만 습관이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있다. 변화가 지나가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습관의 집요함.-

 

  자기계발서에서 소개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비결 중에 하나는 "성스런 종교적 의식과 같은 습관을 갖아라!!"라는 것이다. 매일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매일 아침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성스러운 종교적 의식 처럼행한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나는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고 있게된다. 매일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면, 자연스럽게 1만시간의 법칙이 작동하게 된다. 방학에는 하루에 한문장씩, 평일에는 일주일에 한문장씩 '논어'를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논어'를 완독했다. 쉽게 읽기 힘든 책을 '습관'을 이용해서 읽었다. 진정 무서운 힘은 꾸준함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꾸준함은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 니체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후회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했을때, 인생은! 역사는 진보해야한다는 믿음이 산산히 부서졌다. 니체는 망치의 철학자였다. 오늘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일만년 후에도 나는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나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오늘을 바꾸어야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변화하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프레임'이라는 책에서 소개한 성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비슷하다.  내가 이미 망쳐버린 인생을 다시 살고 있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다시 망쳐버리지 않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라! 이러한 생각은 나태한 나를 채찍질한다. 오늘을 진실되게 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내일을 진실되게 살겠는가? 내일은 오늘이 되기에 오늘을 진실되게 산다면 나의 인생은 진실한 삶으로 만들어져간다. 정상에선 석학들은 서로 통한다고 한다. 니체의 말이 '프레임'을 쓴 최인철 교수의 말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논리적 사유란 독특한 주장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대는 사유"-논리적 사유의 비밀-라고 한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  재레드 다이야몬드의 '총, 균, 쇄'와 '문명의 붕괴'와 같은 대작들이 타인이 넘볼 수 없는 독특한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탁월한 논리전개가 돋보이는 책이다. 하나의 굵직한 주제를 긴 호흡으로 서술한 것이 이들 책이라면,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철학자들의 짧은 말을 실마리로, 인생을 생각하게하는 짧은 호흡의 글이다. 48명의 철학자들의 독특한 주장을 실마리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알기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짧은 48편의 글들의 모음이지만, 그 짧은 하나하나의 글에는 인생의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 인생을 생각하며, 세계를 끌어 안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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