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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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대전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 온 가족이 나와 촛불을 들었다. '이게 국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더 이상 국가가 망가지도록 방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박근혜 하야'를 외첬다. 과거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적폐세력이 촛불 참여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아내는 용감했다. '당신이 안가면 나혼자라도 나가겠다.'라는 강경한 말을 했다. 계엄을 검토했다는 문건이 발견되고 나서야 나의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다시 5.18 광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엄연히 과거 독재국가의 향수에 빠져 있는 적폐세력이 엄존한 상황에서 우리 시민들을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오도록 인도한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토록 광장에서 '적폐 청산', '박근혜 하야', '재벌 개혁'을 외치면서 우리들이 만들고 싶었던 국가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고 싶어서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펴들었다.

 

1.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유시민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풀어가는 것으로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군주와 사회계약을 맺었다는 홉스의 주장을 첫머리에서 소개하고 있다. 사회계약론 중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확실히 다르다. 홉스가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보았다면, 루소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보았다. 자연상태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만들려고 하는 국가의 형태와 국가를 유지하는 방법은 달라진다. 유시민은 폭력을 독점한 국가라는 점에서 홉스의 주장을 지지한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폭력을 합리화하고 합법화한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의 대상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는 언제나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폭력정권을 통해서 국가 폭력으로 수 많은 시민들이 생명과 자유를 잃는 처절한 모습을 우리는 보아왔다. 시민의 감시와 견제가 없다면, 국가라는 괴물은 언제나 본래의 폭력적 모습을 다시 드러낼 수 있다.

  그랬다. 나보다 세대가 앞선 분들과 대화를 하면, 그분들의 입에서는 "국가가 하는 건데, 설마 국민에게 나쁜 것을 하겠어?"라고 반문한다. 국가를 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유시민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은 '국가주의형 이념보수'이다. 국가를 비판하는 것 자체를 못견뎌하는 '열열한 애국자'이다. 국가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신화는 JTBC의 박근혜-최순실 특종보도를 통해서 산산조각났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하며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 자식이 없기에 절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녀에게 투표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미르재단, K-스포츠 재단을 만들면서 많은 돈을 끌어 모으려했던 모습들을 보면서 국가라는 '리바이던'은 견재의 대상이며 감시를 해야만 국민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운 겨울을 따사로운 촛불로 밝히며 난생 처음으로 대전 탄방동 일대를 행진했다. 같이 나왔던 막내가 걷기 힘들다고 해서 아내가 업고 행진했다. 몸이 약한 아내에게 막내를 넘겨 받아 막내를 업고 외쳤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구호를 외치며 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국가가 '리바이던'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맴돌았다.

 

2. 국가의 속성!! 애국심의 두얼굴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라고 니버가 말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밀그램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은 평범'하다. 누구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를 하지 않는다면, 악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의 불법적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4대강 사업, 연예계 블랙리스트를 수행했다. 남일동 빌딩에 전투경찰이 투입될 때도 전투경찰들은 '아니오, 해서는 안됩니다. 시민과 경찰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시민이 말하듯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이라는 편리한 방법을 사용한다.

  과거 정권의 가장 심각한 폐악은 인간을 그자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이다. 칸트의 두번째 정언명령은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을 그 자체의 고귀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남일동 빌딩에 올라가 절규하는 시민들을 '도시 게릴라'로 묘사하는 세력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인간을 수단화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데도 이를 양심에 따라 '아니오'라고 거부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사회에 존재한다. '아니오', '안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때,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리바이던' 적인 모습들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가에게 '안된다.'라고 말하려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부터 나이든 할아버지까지! 촛불을 든 시민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바랬던 국가는 헌법에 나와있는 국민이 주인이된 국가였다. 국민을 수단이 아닌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 그러한 국가였다.

 

3. 국가를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국가를 바꾸는 방법!!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혁명을 떠올릴 것이다. 혁명을 하려면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아니면 소로가 말했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두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까?

  우선 소로의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시민 불복종'이라는 방법은 소극적 저항이다. '적극적 저항'에 비해서 소극적 저항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혁명을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간디, 마틴 루터 킹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이 전개했던 '시민 불복종'운동은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인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전제가 뒤따른다. 모두가 함께 해야한다!! 사회의 다수를 평화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위력이 약한 방법이라 생각되는 이 방법이 가장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200년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인도가 서로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마하트마 간디의 '시민 불복종'운동이라는 평화적 방법덕분이다. 물론, 3.1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평화적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존재라는 전재가 없는 상태에서 '천황제'라는 '전체주의'에 물든 일제에게는 조선의 평화적 방법은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소요일 뿐이었다.

  포퍼는 '불복종 운동'에서 더 나가서, '점진적 공학'이라는 방법을 제시했다.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한다는 포퍼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 적합한 이론일까?  혁명은 모순이 극에 달하고 시민의 각성과 압제자가 썩어 빠진 상태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 현실에서는 '비타협적 급진주의'보다는 포퍼가 말한 점진적 공학이 더 유용하다. 민주적 방법으로 합리적인 타협안에 도달할 수 있는 포퍼의 '점진적 공학'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포퍼는 '사회혁명'에 반대했다. 왜일까?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며 독재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던진다. 모든 혁명이 '폭력'을 수반하는가? 그렇지 않다. 2006년 11월부터 2017년 초까지 '촛불혁명'을 일으키면서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비폭력을 강요하는 것에 문제있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촛불혁명의 현장은 폭력보다는 온정과 따스함이 자리잡았다. 촛불집회에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와 아내는 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딸들도 모금함에 돈을 넣겠다고 하여 급히 지갑에서 돈을 떠내어 딸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모금함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줄로 넘어가려하자, 막내는 달려가서 자신이 쥐고 있던 돈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스스로 대한민국의 주인이며,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행복함을 딸아이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손난로를 우리 아이에게 쥐어주며 '예쁘다'고 말하는 이웃도 있었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는 보수 정치인의 말에,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으면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께서 다음주에는 나오신답니다.'라고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도 있었다. 먹을 것을 나눠주는 따스한 이웃도 있었다. 촛불혁명의 장소는 포퍼나 하이에크가 우려했던 '폭력'이 난무하는 장소가 아닌, '사랑'과 '나눔'이 있는 민주주의 학습의 장소였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 딸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태극기였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보면서 스스로 대한민국을 바른길로 인도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단다. 

  추운 겨울에 따스한 촛불을 밝히며 새해를 맞이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가장 완벽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가 왜? 이리도 취약할까? 두번씩이나 함량 미달의 정치인을 대통령을 뽑았고, 그 정치인을 끌어내리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목청껏 '박근혜는 하야하라.', '재벌 개혁하라.'를 외쳤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왜이리 불완전할까?

 

4. 민주주의는 최악을 막는 제도이다.

  '핼 조선'이라는 단어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많은 젊은 이들이 이땅을 떠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민을 꿈꿨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민'을 선택하는 방법과 대한민국을 바꾸는 방법이 있다. '두려워서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돈이 아주 많아 투자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낯선 외국에서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나의 마음에 쏙든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새롭게 선택한 국가가 마음에 안들게 된다면, 그때 나는 또다른 나라를 찾아헤멜 것인가?

  죽어서 천국을 찾기 보다는 살아서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파랑새를 찾아 헤매지 말고 이 땅을, 대한민국을 파랑새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피와 민주투사들의 희생이 있었다. 거져 주어지는 것은 없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에 무임승차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것이다.

  민주주의는 너무도 취약했다. 시민들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두번씩이나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대통령들은 지금 감옥에 있다. 유시민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플라톤의 현자가 대통령이 된다할지라도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껏하지는 못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다른 독재국가에 비해서 마음껏 국가를 유린하지 못한 것도, 노무현 정권과 지금의 문재인 정권이 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길을 마음껏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한계이다. 민주주의는 급격한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느리지만 꾸준히 진보가 이뤄진다. 느리지만 꾸준한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그것을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몸으로 깨달았다. 한동안 우리집의 유행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집안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학교에서는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학생이 늘어났다. 야간 자율학습에 빠지고, 학원에 갔다가 귀가 길에 촛불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 학생들이 행진을 하기 전에 반드시 불렀던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잊지 않은 것이다. 집에 와서 다시한번 레미제라블의 '민중의 노래'를 들으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꽃이 물을 먹지 못해 시들듯이, 민주주의도 죽어버린다.

 

5. 한국의 진보정치는 가능한가?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자유발언 중에서 한 여성이, 조국교수의 '법학강의'를 인터넷을 통해 듣고 왔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대한민국호를 살리기 위해서 '법학강의'를 찾아들을 정도로 절실했다. 이러한 절실함이 결실을 맺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호는 어떠한 정치인들에게 키를 넘겨야할까? 유시민은 대한민국의 진보정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진보정치인이 지켜야할 도덕과 진보정치의 방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노동운동이 필요로하는 사람은 자기 모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란 식물도 감싸안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한다고 말했다. 생각이 교조적으로 흐를수록 정통성 논쟁! 이념논쟁에 빠진다. 중국 공산당의 정풍운동, 1930년대 만주의 민생단 사건, 일본의 적군파에서 '다른 모판에서 자란 식물을 감싸 안을 수' 없는 자들이 벌이는 비극을 볼 수 있다.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다. 유시민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을 예로든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결국은 현실을 개혁하지 못하고 히틀러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모두 죽어갔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 윤리사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유시민은 절규한다. 정치인은 일반이들과 다른 윤리적 규범이 적용되어야한다. 자신의 신념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면 최악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보정당들은 연합해야한다. 유시민은 이를 진보정치인들에게 절실히 말하고 있다. 정치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권력을 잡고 수 많은 민주투사들이 희생되어야했다. 김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남한에서 김구가 권력을 잡았어야했다고 주장한다. 그랬다면, 최소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했으며, 어쩌면 더 큰 민족의 비극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신념윤리와 결과에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는 책임윤리 사이의 딜레마에서 진보정치인들은 현명한 판단을 해야한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유시민은'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라고 말한다.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존에 익숙한 생각, 체제를 선호한다. 그러하기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나이들면 보수 정당에 투표하기도 한다. 유시민의 이말 중에서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살아있을 것 같던, 노회찬이 너무도 쉽게 세상을 등진 사건이 떠올랐다. 대기업 삼성을 노회찬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잘못을 '신념윤리'에 위배된다고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민주주의가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쉽게 취약해지듯, 진보 정치도 현실이라는 벽앞에 너무도 취약했다.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하려하는 공자처럼,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보정치인들은 현실을 바꾸려 오늘도 바람을 거슬러 날아간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진보를 위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시민의 한사람으로 사랑과 관심을 주자.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2년여가 지나간다. 촛불혁명 이후, 우리 현실도 많이 달라졌다.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관리자들의 행정에 말없이 묵묵히 따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안된다.'며 당당히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촛불혁명 이후 삶이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 시작된 촛불혁명의 여파는 사회에까지 이어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운동'이 한국에서만 조용하다고 의아해하던 시사평론가는, 촛불혁명이후 거세게 일어나는 한국의 '미투운동'에 놀란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힘과 능력, 이땅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각성한 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꼰대들의 부당한 갑질에 대해서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을 보며, 촛불혁명의 위력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리바이던'이라는 괴물을 깨어있는 시민들이 길들이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민의 관심과 사랑이 없다면, '리바이던'은 시민을 헤칠지도 모른다. 자! 깨어있자! 부당한 지시에 '아니오'라고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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