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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의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연애"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가벼움, 때로 우스꽝스러움, 그 대책없는 열띰과 찬란한 유치행각,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눈물바람과 남들에게는 심심풀이 이야기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흥미성 등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무겁고 어렵고 진지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을 섬세하고 매끈하게 풀어가며 한점의 흐트러짐없이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저자의 文筆力의 막강한 내공이 감탄스러웠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내용을 머릿 속에서 이리저리 다시 주물러 보거나 엉켜진 가닥을 풀어가며 책에 대한 내 생각을 모아들이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들었다. 나의 독서와 사유의 내공이 빈약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작은 이야기(小說)로서의 본분을 잊은 이 이야기의 진지함도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다. 결국 짤막한 내 생각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이렇게 토막내어 정리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내공의 빈약함을 탓할 밖에.
이현現과 이진眞
뒤에 '실'자 하나만 갖다 붙이면 그대로 현실과 진실이 되어버리는 두 주인공의 이름은, "가볍고 깊이가 없는"(p.210) 현실과 아름답고 무심한 듯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겨 그 공간을 채우려 하는 강력한 어떤 힘"(p.20)을 가졌으나 "현실 속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p.13) 진실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
현실과 진실, 육체와 영혼, 표면과 내면 등으로 대조되고 상반되는 두 세계에 각각 몸을 담고 있는 이현과 이진의 연애는 경계는 존재하지만 합쳐지거나 포개어질 수 없는 것들의 결합을 이루어 내려는 무모한 시도였던 것이고,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을 터이다.
기록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에게 기록이란 "기억의 확장'(p.8)이며 "존재를 대신"(p.8)하는 것이다. 이진의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기록에 대한 의미들은 곧 이진이란 인물이 존재하기 위한 목적이며 수단이다. 이진의 기록은 '적는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나서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의 감정과 상황과 사건들을 나의 것들로 경험"(P10)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있다. 이진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소설이 현실에서는 소설가 심윤경 작가의 기록임을 상기할 때, 작중 인물 이진을 통해 작가로서 갖고 있는 생각들을 어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섬뜩하게 느껴지던 영혼들을 "제압하고 파악하고 위로"하는(p.12) 이진의 눈빛이 곧 작가의 집요한 눈빛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책 속에는 '이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네 편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어릴 때부터 가난과 불운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여인의 이야기 '토토로의 집', 방향을 잃은 한량기질의 남자 학원의 예술에 가까운 열정과 그 기저에 흐르는 슬픔을 담은 '라 캄파넬라', 결벽스럽다 할 정도의 맑은 신앙을 지켜내려는 부목사의 고민과 무력한 신의 영원한 침묵에 대한 신앙적 사유를 담은 '창세기', 그리고 부총리의 형의 이야기 '외알 안경을 낀 사나이'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삶의 자리가 곧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내가 있는 자리가 성직의 자리이건 대책이 안서는 한량의 자리이건 높던지 낮던지, 넓던지 좁던지 간에,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고통과 비극의 감정은 내 삶의 저 밑바닥에서 숨어흐르고 있는 진실에 대한 답답증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다 튕겨오른 진실의 물방을 하나가 일으키는 몸서리 나는 전율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라 캄파넬라'에서 학원의 여동생 혜원이 베토벤의 월광 소타나에 눈물을 쏟으며 빗 속을 달리는 차의 탑커버를 열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제발 나의 영혼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심정을 어찌 억누룰 수 있겠는가.
특이한 영혼관
이 이야기 속에서의 영혼은 거룩하다거나 깨끗한 하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로서의 영혼이 아니다. 육체에 깃들어 있는 맑고 순수한 결정체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육신과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과의 인연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는 티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순백의 존재가 아니다. 이 책에서의 영혼은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 세계 양쪽에 온 몸을(영혼에게도 질료로 이루어진 형체가 있다면) 흥건히 적시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아주 작은 의식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육신 보다 더 괴로운 존재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혀 버린 내 진물나게 더러운 치부까지 낱낱이 끌어안고 괴로워 하는 것이 이진이 만나는 우리들의 영혼이며 농후한 밀도를 가진 내밀하고도 독립적인, 결코 가볍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이 바로 이 책에 나타나는 영혼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승리같은 밝고 투명한 기존 이미지의 영혼과 이 소설 속의 영혼, 육체의 동정을 받아야 마땅한 가엽고 무겁고 끈적한 영혼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했다. 특별하고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살구꽃 향기
이진이 풍기는 살구꽃 향기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아득하게 파묻혀 있던, 생의 원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가장 부끄럽지 않고 진실했던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천진하고 순수했던 어느 한 때의 기억"(200쪽) 을 피워올리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잃어버린 살구꽃 향기, 그것은 먼 과거의 어느 날엔 나도 품고 있었을 진실의 향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진의 살구꽃 향기는 우리 인생의 그 아름다웠던 한 때에 대한 기억을 불러옴으로써 현재의 내 "비천하고 남루한 모습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200쪽)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진실이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아픈 상처를 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
환상과 자아도취의 삶
이현이 이진에 대한 사랑이 "사랑을 닮은 환상에 불과했"(p.297)으며 그녀에 대한 헌신이 "얄팍한 자아도취에 불과했"(p297)다고 고백하듯, 이현을 닮은 나 또한 환상과 자아도취를 진실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이진의 영혼을 기록한 노트를 발견하고 그 속에 적힌 내 영혼에 대한 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도 이현이나 이세처럼, "나의 운명을 수긍"(p.299)하고 "당연한 몫인 듯, 고통에 기대어 살아가야"할 것이다. 이현이 이진의 노트의 남은 빈 칸들을 채우듯,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이기고"(p.301)자 하는 용기를 쥐어짜가면서..
"성공의 여부를 모르는대로, 희망에 들떠 일단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요?"(p.301)하던 이현의 물음이 마음 속을 떠돈다. 일단 가서 부딪쳐 멍들고 상처를 입어봐야 알 수 있는 이 길에서 환상과 자아도취가 없이 어떻게 발을 옮길 수 있을까. 환상과 자아도취는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인 셈이다. 누가 감히 환상과 자아도취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진실은 한 마리 고양이?
어쩌면 진실은 이현과 이진의 섹스에 등장하는 한 마리 까탈스런 하얀 고양이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면 곁에 다가와 고분고분 애교를 떨며 가르릉거리지만, 서두르며 함부로 했다간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나를 사납게 할퀼 수도 있는 한 마리 고양이.
현과 진이라는 이름의 상징을 놓고 볼 때, 두 주인공의 섹스의 성공은 얍삽한 현실과 미련스럽다 여겨질 만큼 고집스런 진실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과 진실 사이에 걸린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서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딛지 않고 균형을 이뤄가는 것 말이다. 이리저리 달아나 몸을 감추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끌어안고 타는 줄타기의 묘미는 어떤 것일까.
이 짐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까?
부총리의 형은 이 소설 속의 여느 등장인물과는 다른 이물적인 존재다. 그는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사회적 이목과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총리가 그 짐을 고스란히 떠맡은 사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짐은 실은 그저 네가 떠맡은 거야. 아무도 네게 떠맡긴 일이 없는데 말이야. 네가 떠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짐들은 아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구르고 짐승에 뜯겼겠지. 그렇게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부서지고 사라졌을 거야. 그래서 지금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거거든. 그런데 굳이 네가, 어리고 책임도 없는 네가 그 짐을 다 떠맡겠다고 나선 거야. 그러는 바람에 그 짐은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네 뒤로 누군가가 떠맡아주기를 뻔뻔하게 기다리고 있구나."(p.216)
뒤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느낌이랄까? 내가 떠안고 있는 이 짐 역시 나의 환상이며 자아도취의 산물이었을까? 벗어던져 놓으면 사라져 버릴 이 짐에 대해 약간의 경외감을 갖고 성실히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며 미덕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옭아매어놓고는 무겁다 버겁다 하며 투정부리고 불평했던 것일까. 완전 마조히스트가 되어버린 꼴이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려놓고 가볍게 살라는 그의 말과 행동에 황홀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열에 휩쓸리고 깨지고 박살나서 죽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 거"(p.219)라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형님께는 형님의 삶이 있는 거죠. 제게는 제 삶이 있습니다."(p.218)라는 무뚝뚝한 부총리의 대답을 되풀이 하는 이 이중심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남김없이 보여"(p.78)준다 할지라도 겸허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랄 밖에.
깨어진 금기에 대한 생각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진의 영혼의 기록은 이현에 의해 열리고 파기된다. 영혼의 이야기가 기록된 이진의 노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이자 에덴의 선악과이다. 금기의 파괴는 늘 고통을 수반한 희생제의가 뒤따르며 동시에 그 자체로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진의 아기는 새로운 금기의 시작이자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금기에 약한가보다. 그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고의적 선택이 아닐까. 무엇이 그 유구한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금기에 대한 순종보다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더 진화시키도록 부추켰을까. 금기를 깨뜨려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감수해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식은 더 확장되고 깊어지고 발달했던걸까. 금기를 깨뜨릴 때마다 우리는 신과 가까워지는 걸까, 악마와 가까워지는 걸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금기를 파기하고 벌을 받는 것은 시지푸스의 형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걸까.
<이현의 연애>는 가식적인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이 만나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삶과의 비극적 연애담과 다름아니다. 그 경계는 내가 살아가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이기도 하고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는 목마름의 자리이기도 하다. 잠시 환상과 자아도취가 던져주는 행복감에 젖을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현現과 진眞이 만나는 그 경계에서 "모든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의 견디기 힘든 회한"(p206)과 "대책없는 무력감"(p.68)만을 확인해야 하는 것, 그리고 종국엔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 한다.
고통은 준비되어 있으니, 이제 나는 삶과 어떤 연애를 벌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