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도서관에 가서 비니를 위한 문화강좌를 하나 신청하려고 계획했던 날이었다.  집을 나서기 싫었는데 '선착순 마감'이라는 압박감에 못이겨 비니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이르는 언덕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도서관 가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비니 데리고 한여름에 문화강좌 듣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중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올랐건만 그래도 나선 길인데 끝을 봐야지 싶어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중간 중간 비니가 안아달라고 매달렸다.  그 때마다 "비니야, 엄마가 힘들어서 비니를 못안아줄 것 같아.  비니를 안으면 엄마가 도서관에 못 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걸어가자."했더니 신통하게도 다시 걷곤 했다. 

도서관에 들러 '퍼포먼스 미술'강좌를 신청하고 가족열람실에 들어가 비니에게 그림책 몇 권을 읽어주고, 15일에 도서관에서 열리는 야외음악회 티켓을 배부 받고, 매점에서 과자랑 주스 사서 야외 휴식 공간에 앉아 먹으며 비니랑 잠시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더니 발바닥, 발목, 무릎, 허리가 지릿지릿 저리고 뻐근하고.. 마치 얼음 꼬챙이가 발바닥부터 허리까지 꽂히는 것 같았다.  장농에서 양모이불을 꺼내어 덮고는 뽀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비니랑 한숨 잤다.  자고 일어난 다음에도 여전히 몸이 말이 아니다.  체온계를 꺼내어 열을 재어보니 체온계 눈금이 39도 가까이까지 뻗어 있다. 

몸살인가 싶기도 하고, 한 5,6년 전에 앓았던 불명열 기억도 나고...  5,6년 전에도 거의 보름 이상을 40도가 넘도록 열이 났었다.  한여름이었는데 이가 딱딱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며 떨려서 작은 방에 보일러를 틀고 오리털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타이레놀을 삼키며 지냈었다. (나도 참 미련도 하지) 열이 내리고 나서 병원에 갔더니 원인이 나타나지 않는 불명열이라고 했다.  검사 하느라 피만 서너번 빼고, 해열제 한 알 못 받아 먹었었다.  다시 열이 오르면 응급으로라도 병원에 와야한다고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 열이 오르지 않았다. 

요즘 며칠, 기운이 없긴 했다.  오죽하면 기운 좀 챙겨야겠다 싶어 전날 마트에서 삼계탕 재료를 사다놓았었으니까...  저녁 때가 가까이 되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삼계탕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어디 중국집에라도 전화해서 시켜 먹고 싶은 생각이 났으나 기운을 차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삼계탕을 끓였던 거다.  그리곤 다시 잠...  지니가 비니를 봐줬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게 12일 화요일 하루를 푹 쉬고 나자 다음 날 아침 산뜻하게 일어났다.  하루만에 다 나은 걸 보면 몸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할머님 장례 치르고나서 계속 제대로 쉴 기회가 없었던 탓에 피곤이 좀
앃였다가 폭발을 했나보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 건지... 겨우 그정도 일했다고 그렇게 나가 뻗을 게 뭐람.. 아무튼, 몸살도 불명열도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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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6-14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시네요. 하루만에 나으셨다니. 초기에 대처를 잘 하면 금방 나아지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에도. 아이 돌보는 일들을 매일 기본으로 하고 계시니, 그보다 추가되는 일이 생기면 몸에서는 알아차리는 모양이어요 힘들다고.

섬사이 2007-06-1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하루만에 개운해지니까 신기하더라구요. 제가 스트레스며 피곤을 잠으로 푸는 체질이라 그런가봐요.

무스탕 2007-06-14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얼른 나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제때 제때 쉬어줘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서 심하게 앓으셨나보네요. 지금은 괜찮으신거죠?

섬사이 2007-06-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럼요, 거뜬해요~^^

하늘바람 2007-06-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에요. 몸살 조심해야해요

섬사이 2007-06-14 21:36   좋아요 0 | URL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바람님. 님도 늘 건강 조심하세요. 아이 챙기랴 글 쓰랴 과로하시기 쉽잖아요. ^^

알맹이 2007-06-1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몸이 안 좋으셨군요.. 그래도 걱정하신 병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건강하세요~

섬사이 2007-06-19 14:0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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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 책을 읽고 완전히 소화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거야 이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주인공 와타나베와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와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책, 그래서 늘 '나도 읽어봐야지'하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에 소개된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다. 

어느날 내(와타나베)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면서 <그레이트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나가사와가)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레이트 개츠비>라고 나는 말했다.  재미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번 째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레이트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제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시월의 일이었다.   (<상실의 시대> 문예사상사,1989,69쪽)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왜 <위대한 게츠비>를 언급해야 했을까.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건 뭘까.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p.11)"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p.11), "낭만적인 민감성"(p.11)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는 밀주와 도박으로 부를 축적하고 폭력계의 거물인 울심프와 손잡고 불법을 일삼는 범법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데이지라는 여인은 그의 모든 불법과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쥐어주는 낭만적인 꿈이자 환상이었다.  개츠비가 살아가는 행위의 모든 목적은 오직 데이지를 위해서였고,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차가웠다는 게 문제였다.

개츠비가 벌이는 성대하고도 화려한 파티는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p.11)을 불러들였고, 아쉽고 비참하게도 개츠비가 사랑한 여인 데이지도 그 먼지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와 실제의 데이지는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만의 환상과 낭만으로 재탄생시킨 또하나의 데이지였다.  그녀는 "그가 품어온 환상의 거대한 힘"으로 창조되었고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모든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p.138)"

개츠비는 그 환상을 위해 삶을 바쳤고, 동시에 그 환상이 개츠비의 삶을 지탱시켰다.  삶은 낭만적인 환상없이는 지속하기 힘든 것일까.. 삶은 그 자체로 욕심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애써 그 삶에 꿈의 장식을 달고 환상의 레이스를 덮고 낭만과 자아도취의 조명을 밝혀놓고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 그 쓰라린 절망의 화살을 삶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욕심없이 소박하게 흐르고 있는 삶에다 이것 저것 끌어다 갖다 붙인 건 바로 나 자신이면서 말이다. 

개츠비가 벌였던 파티의 성대하고 화려한 불빛들을 보고 찾아들었던 먼지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그는 단연 반짝이는 존재다.  그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했고, 그 꿈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꿈 앞에 정직했다.  그게 무슨 소용있냐구?  결국 꿈이 그를 배반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꿈을 지켜내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모진 일인지 알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탓하며 자기의 꿈과 낭만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이고, 그래서 개츠비더러 "참 대단한 사람이네."라는 한 마디의 말을 아까워하지 않고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이 끝났음과 동시에 그의 꿈이 깨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p.227)"는 느낌과 함께 찾아왔으며 "장미꽃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또 가꾸지 않은 잡초 위에 쏟아지는 햇볕이 얼마나 냉랭한 것인지 알았을 때(p.228)" 그를 덮쳤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데이지라는 장미꽃이 자신의 환상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지 않으며 기괴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잡초같은 자신의 인생에는 햇볕조차도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중화자인 닉 케러웨이는 소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라고.

그러니 어찌 삶의 욕심없고 소박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흘러가기를 바라겠는가.  개츠비가 데이지가 사는 집의 초록 불빛에 시선을 두었듯이 나 또한 내 시선을 묶어둘 불빛을 찾아야 한다.  그리곤 온갖 환상과 낭만과 꿈의 장식을 달면서라도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간힘을 써야 하리라. 삶의 조류를 거스르는 배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고보니 <상실의 시대>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와타나베를 비롯해서 현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답답증과 상처들 때문에 방황하는 <상실의 시대> 속의 인물들이 어쩐지 개츠비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물론 나오코는 데이지와 전혀 다르지만.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첫 부분에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분위기와 방향을 암시하려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쉬운 점 한 가지,  책에 언급되는 음악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 음악을 듣는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맛을 좀 더 새롭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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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1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 해 전에 읽었던 책이네요. 롱아일랜드의 화려한 불빛 그 너머의 허망한 꿈들...
섬사이님, 새 서재에서 뵙는 첫발자국이네요. 새로운 기분, 화사하고 밝은 서재..
좋으네요.^^ 그저 늘 고맙습니다.

섬사이 2007-06-1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해 전에 벌써 읽으셨군요. <상실의 시대>를 읽은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이제서야 겨우 읽었어요. 제 게으름을 탓해야겠지요. ^^
 

어제 지니가 학교에서 돌아와 해 준 이야기.

"엄마, 백**라고 알어?"
"글쎄..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 니 친구 아냐?"
"맞어, 예전에 성당에서 성탄연극할 때 요셉 맡았던 애."
"아, 걔~~ 걔가 왜?"
"걔가 나랑 같이 학교에서 원어민회화 듣거든.  근데 자기네 집이 이사를 해서 지하철을 타고 통학한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어디로 이사했는데? 했더니, 스떼이끄로 이사했다는 거야."
"뭐?  스떼이꾸?"
"어,, 그래서 다들 스테이크면 스테이크지, 스떼이끄가 뭐냐 하면서 난리를 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숙대입구'로 이사했다는 걸 발음을 이상하게 해서 애들이 다 못 알아들었지 뭐야..ㅋㅋ"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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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1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런 경우 있지요. 스떼이꾸!
섬사이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화창하네요^^

무스탕 2007-06-1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아침부터 즐겁게 웃었습니다 ^___^

섬사이님. 좋은 하루 보내시와요~~☆

65555


치유 2007-06-1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하하하....*^^*

알맹이 2007-06-1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

네꼬 2007-06-1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너무 웃겨요!

비로그인 2007-06-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애들세계란 정말
어른들의 쥐어짜낸 유머와는 뭔가 다른 환타스틱한 면이 있다니까요!

홍수맘 2007-06-1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하
정말 재미있어요. "스테이끄" (씨익)

향기로운 2007-06-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너무 웃겨요^^ㅋㅋㅋ

섬사이 2007-06-1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모두들 즐거우셨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요셉의 작고 낡은 오버코트가...?  (심스 태백 / 김정희 옮김 / 베틀북)

비니가 만난 세번째 심스태백 그림책.  지니와 뽀가 어렸을 때 읽어주었던 그림책이기도 하다.  지니가 반가운 마음에 펼쳐 읽어보더니 낄낄 거린다.  너무 어려서 세심하게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부분들, 신문기사라든가, 콜라주기법이 선사하는 재미들이라든가, 액자에 담긴 글귀들; 편지, 벽에 붙은 포스터 속에 작은 글씨로 쓰여진 동요들(어린 송아지가 부뚜막에 앉아.)등등을 눈여겨 보며 어릴 적엔 느끼지 못했던 자잘한 재미들을 만끽했다.  비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자켓모양, 조끼모양, 목도리나 넥타이, 손수건, 조그만 단추 모양으로 뚫린 구멍들이 비니의 흥미를 끈다.  심스태백 특유의 익살맞고 화려하고 아지자기한 그림들이 비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그림보는 재미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비니가 좋아하든 말든 내가 즐거워 읽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쏘피가 화나면-정말,정말 화나면...(몰리 뱅 글,그림 / 이은화 옮김 / 케이유니버스(주))

그림책과 관련되 책들에서 자주 소개받곤 하던 책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림의 색감이 화려하고 특이하다. 전에 책에서 이 그림의 윤곽선을 눈여겨보라는 충고를 들었었는데, 과연 아이의 심리에 따라 제법 굵은 그림의 윤곽선의 색깔이 바뀐다.  화가 난 아이가 집을 뛰쳐나가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글이 그리 길지도 않고, 형제가 있는 집이라면 아니면 친구들끼리라도 늘상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비교적 어린 유아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다.  거기다 화려하게 펼쳐지는 색들은 아이의 눈을 정신 못차리게 할 것이다.  심스태백의 그림책이 보여주는 색의 화려함이 비교적 아기자기한 맛을 띠고 있다면 이 책의 색은 보다 원색적인데다가 화가 난 쏘피의 감정 탓인지 과격함이 느껴질 정도.

 

 벌레가 좋아 (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 조은희 그림/ 최재숙 옮김/ 보림)

책표지의 제목 글씨체가 '궁서체'인데다가 어쩐지 우리나라 그림책 냄새가 진해서 우리작가의 그림책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고전이 된 그림책  <잘자요, 달님>의 작가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의 글에 우리나라의 동화그림작가인 조은희님이 그림을 그린 것.  왜 그랬을까?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이 그림을 남기지 않았던가 아니면 작가의 그림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나라 아이들의 정서와 맞지 않다는 판단에서인지는 모르겠다.  책 앞뒤를 살펴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각종 벌레들이 나와서 비니는 흥미로워했다.  그런데 벌레의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검정벌레, 초록벌레, 얌체벌레, 심술벌레, 덩치벌레, 멋쟁이 벌레 등등으로 벌레의 특징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아이들이 벌레를 친근하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원작의 그림은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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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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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의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연애"라는 낱말이 갖고 있는 가벼움, 때로 우스꽝스러움, 그 대책없는 열띰과 찬란한 유치행각,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눈물바람과 남들에게는 심심풀이 이야기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흥미성 등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무겁고 어렵고 진지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을 섬세하고 매끈하게 풀어가며 한점의 흐트러짐없이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저자의 文筆力의 막강한 내공이 감탄스러웠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내용을 머릿 속에서 이리저리 다시 주물러 보거나 엉켜진 가닥을 풀어가며 책에 대한 내 생각을 모아들이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들었다.  나의 독서와 사유의 내공이 빈약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작은 이야기(小說)로서의 본분을 잊은 이 이야기의 진지함도 무시할 수 없을 터이다.  결국 짤막한 내 생각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이렇게 토막내어 정리하는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내공의 빈약함을 탓할 밖에.

이현現과 이진眞
뒤에 '실'자 하나만 갖다 붙이면 그대로 현실과 진실이 되어버리는 두 주인공의 이름은, "가볍고 깊이가 없는"(p.210) 현실과  아름답고 무심한 듯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겨 그 공간을 채우려 하는 강력한 어떤 힘"(p.20)을 가졌으나 "현실 속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p.13) 진실에 대한 상징일 것이다.
현실과 진실,  육체와 영혼,  표면과 내면 등으로 대조되고 상반되는 두 세계에 각각 몸을 담고 있는 이현과 이진의 연애는 경계는 존재하지만  합쳐지거나 포개어질 수 없는 것들의 결합을 이루어 내려는 무모한 시도였던 것이고,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을 터이다. 

기록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에게 기록이란 "기억의 확장'(p.8)이며 "존재를 대신"(p.8)하는 것이다. 이진의 프롤로그에서 언급된 기록에 대한 의미들은 곧 이진이란 인물이 존재하기 위한 목적이며 수단이다.  이진의 기록은 '적는다'는 단순한 의미를 떠나서 "한 인간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의 감정과 상황과 사건들을 나의 것들로 경험"(P10)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어 있다.  이진의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소설이 현실에서는 소설가 심윤경 작가의 기록임을 상기할 때, 작중 인물 이진을 통해 작가로서 갖고 있는 생각들을 어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며 섬뜩하게 느껴지던 영혼들을 "제압하고 파악하고 위로"하는(p.12) 이진의 눈빛이 곧 작가의 집요한 눈빛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책 속에는 '이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네 편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어릴 때부터 가난과 불운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여인의 이야기 '토토로의 집',  방향을 잃은 한량기질의 남자 학원의 예술에 가까운 열정과 그 기저에 흐르는 슬픔을 담은 '라 캄파넬라',  결벽스럽다 할 정도의 맑은 신앙을 지켜내려는 부목사의 고민과 무력한 신의 영원한 침묵에 대한 신앙적 사유를 담은 '창세기', 그리고 부총리의 형의 이야기 '외알 안경을 낀 사나이'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삶의 자리가 곧 벗어날 수 없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내가 있는 자리가 성직의 자리이건 대책이 안서는 한량의 자리이건 높던지 낮던지, 넓던지 좁던지 간에,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고통과 비극의 감정은 내 삶의 저 밑바닥에서 숨어흐르고 있는 진실에 대한 답답증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다 튕겨오른 진실의 물방을 하나가 일으키는 몸서리 나는 전율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라 캄파넬라'에서 학원의 여동생 혜원이 베토벤의 월광 소타나에 눈물을 쏟으며 빗 속을 달리는 차의 탑커버를 열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제발 나의 영혼을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심정을 어찌 억누룰 수 있겠는가. 

특이한 영혼관
이 이야기 속에서의 영혼은 거룩하다거나 깨끗한 하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로서의 영혼이 아니다.  육체에 깃들어 있는 맑고 순수한 결정체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육신과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과의 인연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는 티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순백의 존재가 아니다.  이 책에서의 영혼은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 세계 양쪽에 온 몸을(영혼에게도 질료로 이루어진 형체가 있다면)  흥건히 적시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아주 작은 의식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육신 보다 더 괴로운 존재다. 무의식 속에 가라앉혀 버린 내 진물나게 더러운 치부까지 낱낱이 끌어안고 괴로워 하는 것이 이진이 만나는 우리들의 영혼이며 농후한 밀도를 가진 내밀하고도 독립적인, 결코 가볍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이 바로 이 책에 나타나는 영혼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인간 존재의 마지막 승리같은 밝고 투명한 기존 이미지의 영혼과 이 소설 속의 영혼, 육체의 동정을 받아야 마땅한 가엽고 무겁고 끈적한 영혼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했다.  특별하고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살구꽃 향기
이진이 풍기는 살구꽃 향기는 사람들의 무의식에 아득하게 파묻혀 있던, 생의 원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를 건드림으로써,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 "가장 부끄럽지 않고 진실했던 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천진하고 순수했던 어느 한 때의 기억"(200쪽) 을 피워올리게 만든다.   지금의 나는 잃어버린 살구꽃 향기,  그것은 먼 과거의 어느 날엔  나도 품고 있었을 진실의 향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진의 살구꽃 향기는 우리 인생의 그 아름다웠던 한 때에 대한 기억을 불러옴으로써 현재의 내 "비천하고 남루한 모습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200쪽)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진실이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아픈 상처를 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

환상과 자아도취의 삶
이현이 이진에 대한 사랑이 "사랑을 닮은 환상에 불과했"(p.297)으며 그녀에 대한 헌신이 "얄팍한 자아도취에 불과했"(p297)다고 고백하듯, 이현을 닮은 나 또한 환상과 자아도취를 진실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이진의 영혼을 기록한 노트를 발견하고 그 속에 적힌 내 영혼에 대한 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나도  이현이나  이세처럼, "나의 운명을 수긍"(p.299)하고 "당연한 몫인 듯, 고통에 기대어 살아가야"할 것이다.   이현이 이진의 노트의 남은 빈 칸들을 채우듯,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이기고"(p.301)자 하는 용기를 쥐어짜가면서..
"성공의 여부를 모르는대로, 희망에 들떠 일단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요?"(p.301)하던 이현의 물음이 마음 속을  떠돈다.  일단 가서 부딪쳐 멍들고 상처를 입어봐야 알 수 있는 이 길에서 환상과 자아도취가 없이 어떻게 발을 옮길 수 있을까.  환상과 자아도취는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인 셈이다.  누가 감히 환상과 자아도취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진실은 한 마리 고양이?
어쩌면 진실은 이현과 이진의 섹스에 등장하는 한 마리 까탈스런 하얀 고양이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면 곁에 다가와 고분고분 애교를 떨며 가르릉거리지만, 서두르며 함부로 했다간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나를 사납게 할퀼 수도 있는  한 마리 고양이.
현과 진이라는 이름의 상징을 놓고 볼 때, 두 주인공의 섹스의 성공은 얍삽한 현실과 미련스럽다 여겨질 만큼 고집스런 진실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과 진실 사이에 걸린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서 미끄러지거나 발을 헛딛지 않고 균형을 이뤄가는 것 말이다.  이리저리 달아나 몸을 감추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끌어안고 타는 줄타기의 묘미는 어떤 것일까. 

이 짐을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까?
부총리의 형은 이 소설 속의 여느 등장인물과는 다른 이물적인 존재다. 그는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사회적 이목과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총리가 그 짐을 고스란히 떠맡은 사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짐은 실은 그저 네가 떠맡은 거야.  아무도 네게 떠맡긴 일이 없는데 말이야.  네가 떠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짐들은 아마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다가 바람에 구르고 짐승에 뜯겼겠지.  그렇게 한 조각씩 한 조각씩 부서지고 사라졌을 거야.  그래서 지금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거거든.  그런데 굳이 네가, 어리고 책임도 없는 네가 그 짐을 다 떠맡겠다고 나선 거야.  그러는 바람에 그 짐은 오늘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네 뒤로 누군가가 떠맡아주기를 뻔뻔하게 기다리고 있구나."(p.216)
뒤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느낌이랄까? 내가 떠안고 있는 이 짐 역시 나의 환상이며 자아도취의 산물이었을까?  벗어던져 놓으면 사라져 버릴 이 짐에 대해 약간의 경외감을 갖고 성실히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며 미덕이라고 여기며 스스로를 옭아매어놓고는 무겁다 버겁다 하며 투정부리고 불평했던 것일까. 완전 마조히스트가 되어버린 꼴이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내려놓고 가볍게 살라는 그의 말과 행동에 황홀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정열에 휩쓸리고 깨지고 박살나서 죽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 거"(p.219)라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형님께는 형님의 삶이 있는 거죠. 제게는 제 삶이 있습니다."(p.218)라는 무뚝뚝한 부총리의 대답을 되풀이 하는 이 이중심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남김없이 보여"(p.78)준다 할지라도 겸허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끝까지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랄 밖에.

깨어진 금기에 대한 생각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진의 영혼의 기록은 이현에 의해 열리고 파기된다.  영혼의 이야기가 기록된 이진의 노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의 상자이자 에덴의 선악과이다.  금기의 파괴는 늘 고통을 수반한 희생제의가 뒤따르며 동시에 그 자체로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진의 아기는 새로운 금기의 시작이자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금기에 약한가보다.  그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지우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고의적 선택이  아닐까.  무엇이 그 유구한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금기에 대한 순종보다 반역과 배반의 유전자를 더 진화시키도록 부추켰을까.  금기를 깨뜨려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을 감수해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식은 더 확장되고 깊어지고 발달했던걸까.  금기를 깨뜨릴 때마다 우리는 신과 가까워지는 걸까, 악마와 가까워지는 걸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금기를 파기하고 벌을 받는 것은 시지푸스의 형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걸까. 

 

<이현의 연애>는 가식적인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이 만나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삶과의 비극적 연애담과 다름아니다.  그 경계는 내가 살아가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고통과 비극의 자리이기도 하고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는 목마름의 자리이기도 하다.  잠시 환상과 자아도취가 던져주는 행복감에 젖을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현現과 진眞이 만나는 그 경계에서 "모든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의 견디기 힘든 회한"(p206)"대책없는 무력감"(p.68)만을 확인해야 하는 것,  그리고 종국엔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 한다. 

고통은 준비되어 있으니, 이제 나는 삶과 어떤 연애를 벌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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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9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07-06-10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참 깊은 맛이 나는 책이었어요. 추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