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대한 개츠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1920년대 미국문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 책을 읽고 완전히 소화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거야 이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주인공 와타나베와 기숙사 선배 나가사와와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던 책, 그래서 늘 '나도 읽어봐야지'하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에 소개된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다.
어느날 내(와타나베)가 식당의 양지쪽에서 볕을 쬐면서 <그레이트 개츠비>를 읽고 있자니까, (나가사와가)옆에 와 앉아서 무엇을 읽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레이트 개츠비>라고 나는 말했다. 재미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훑어 읽는 건 세번 째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레이트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하고 그는 제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시월의 일이었다. (<상실의 시대> 문예사상사,1989,69쪽)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왜 <위대한 게츠비>를 언급해야 했을까. 개츠비를 위대하게 만드는 건 뭘까.
개츠비는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p.11)과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p.11), "낭만적인 민감성"(p.11)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는 밀주와 도박으로 부를 축적하고 폭력계의 거물인 울심프와 손잡고 불법을 일삼는 범법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데이지라는 여인은 그의 모든 불법과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쥐어주는 낭만적인 꿈이자 환상이었다. 개츠비가 살아가는 행위의 모든 목적은 오직 데이지를 위해서였고,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름다웠지만 현실은 차가웠다는 게 문제였다.
개츠비가 벌이는 성대하고도 화려한 파티는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p.11)을 불러들였고, 아쉽고 비참하게도 개츠비가 사랑한 여인 데이지도 그 먼지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와 실제의 데이지는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만의 환상과 낭만으로 재탄생시킨 또하나의 데이지였다. 그녀는 "그가 품어온 환상의 거대한 힘"으로 창조되었고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모든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이다.(p.138)"
개츠비는 그 환상을 위해 삶을 바쳤고, 동시에 그 환상이 개츠비의 삶을 지탱시켰다. 삶은 낭만적인 환상없이는 지속하기 힘든 것일까.. 삶은 그 자체로 욕심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애써 그 삶에 꿈의 장식을 달고 환상의 레이스를 덮고 낭만과 자아도취의 조명을 밝혀놓고는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 그 쓰라린 절망의 화살을 삶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욕심없이 소박하게 흐르고 있는 삶에다 이것 저것 끌어다 갖다 붙인 건 바로 나 자신이면서 말이다.
개츠비가 벌였던 파티의 성대하고 화려한 불빛들을 보고 찾아들었던 먼지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그는 단연 반짝이는 존재다. 그는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했고, 그 꿈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고, 그 꿈 앞에 정직했다. 그게 무슨 소용있냐구? 결국 꿈이 그를 배반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꿈을 지켜내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모진 일인지 알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탓하며 자기의 꿈과 낭만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이고, 그래서 개츠비더러 "참 대단한 사람이네."라는 한 마디의 말을 아까워하지 않고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이 끝났음과 동시에 그의 꿈이 깨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p.227)"는 느낌과 함께 찾아왔으며 "장미꽃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또 가꾸지 않은 잡초 위에 쏟아지는 햇볕이 얼마나 냉랭한 것인지 알았을 때(p.228)" 그를 덮쳤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데이지라는 장미꽃이 자신의 환상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지 않으며 기괴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잡초같은 자신의 인생에는 햇볕조차도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중화자인 닉 케러웨이는 소설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라고.
그러니 어찌 삶의 욕심없고 소박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흘러가기를 바라겠는가. 개츠비가 데이지가 사는 집의 초록 불빛에 시선을 두었듯이 나 또한 내 시선을 묶어둘 불빛을 찾아야 한다. 그리곤 온갖 환상과 낭만과 꿈의 장식을 달면서라도 그 불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간힘을 써야 하리라. 삶의 조류를 거스르는 배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고보니 <상실의 시대>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와타나베를 비롯해서 현실의 삶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답답증과 상처들 때문에 방황하는 <상실의 시대> 속의 인물들이 어쩐지 개츠비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물론 나오코는 데이지와 전혀 다르지만.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첫 부분에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분위기와 방향을 암시하려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쉬운 점 한 가지, 책에 언급되는 음악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 음악을 듣는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맛을 좀 더 새롭게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