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의 유산 VivaVivo (비바비보) 1
시오도어 테일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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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독일군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열두 살 소년 필립은  ‘불안해하는 게 주특기인'(p.16) 엄마와 함께 마이애미로 떠나기 위해 배에 오른다.  그러나 항해 도중 어뢰공격을 받게 되고 필립은 눈이 먼 채로 흉측한 생김새의 흑인 티모시와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그러다가 ’악마의 아가리‘라는 외진 무인도에 도착한 필립과 티모시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함께 하면서 인종과 나이,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을 키우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나 <파이 이야기>와 비슷한 느낌이 들고 소년이 고난을 이겨내고 성장한다는 성장 소설 특유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시대배경이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점, 그리고 인종을 초월한 인간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지나친 비약일지는 몰라도 공간적 배경이 되는, 탈출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외딴 무인도 ‘악마의 아가리’가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배경과 겹쳐지기도 했다. 전 인류가 전쟁의 화마 속으로 떨어져 눈이 먼 것처럼 방향을 잃고 표류하던 시기가 ‘악마의 아가리’라는 소설 속 공간으로 상징화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도 그렇지만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온갖 차별과 억압, 폭력과 희생을 강요당했던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차별과 편견에 의한 잔혹한 폭력이 횡행하던 시기이니 저자가 2차 세계대전을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헌정하는 작품의 시간적 배경으로 선택한 것이 무척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티모시의 강인하고 우직한 성품은 작은 일에도 불안해하는 신경질적인 필립 엄마의 성격과 무척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시력을 잃은 필립은 처음엔 티모시에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의존할 뿐 아니라 반항하고 투정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이지만 야자열매를 따고 돗자리를 짜고 낚시를 하고 병든 티모시를 곁에서 지켜주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마치 자신과 아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남편과 섬 안의 다른 주민들을 버리고 떠나는 엄마의 유아기적인 이기심을 따르던 필립이 열악한 삶의 조건을 강인하게 견뎌가며 살아낼 뿐 아니라 타인의 삶까지도 돌볼 줄 아는 티모시의 성숙한 인간적 면모를 닮아가는 것만 같다.

필립은 구출되고 엄마를 만나고 시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미국이 아니라 아빠가 계시는 카리브 해의 빌렘스타트로 돌아간다. 필립이 성장한 것만큼 엄마도 변화한 것에 마음이 놓였다.  필립이 훌쩍 성장했는데 엄마가 계속 유아기적 심성에 머무른 채 필립을 대한다면 무척 난감할 터..  (아이의 성장을 못 알아차리는 둔감한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어린 소년의 성장이야기라고만 볼 수 없는 숨은 뒷맛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흑인 인권 운동에 헌신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사건도,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도 이제 거의 반 백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악마의 아가리’ 속에서 구출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우리가 편견과 차별을 뛰어넘어 필립과 티모시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 배려와 존중이 가능해져야만 ‘악마의 아가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어쩌면 이 이야기는 한 소년의 성장이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의 성장과 변화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립의 엄마가 보여주는 변화된 모습은 그래서 더욱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만드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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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 '이해의 선물' 완전판 수록
폴 빌리어드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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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빌리어드라는 작가가 이 책 속에 기록해놓은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에 비하면 내 어린시절은 정말 따분하고 너무 평범하게 느껴진다. 그가 어린시절에 저질렀던 사건과 사고들, 그가 만났던 따스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 은근히 질투가 나기도 한다.  나도 좀 더 말썽도 부리고 좀 더 과감하게 도전해보기도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도 했다. 

지난 시절의 추억은 흘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기본 골조가 되어 아직도 나와 함께 숨쉬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견딜 수 없게 아팠던 상처들과 온 세상이 내 것만 같았던 기쁨들 모두가 이제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기준과 틀이 되어 나를 제약하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폴 빌리어드라는 이 사람은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완고함과 엄격함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들의 말을 믿고 아들 편에 서는 믿음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도 있고, 팍팍한 경제논리에 앞서 아이의 순수함을 지켜줄 줄 아는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위그든씨와 자전거를 선물해주고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상냥한 작은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어린 아이의 순수한 애정을 믿고 이해해주는 벤슨 선생님과 천진한 질문을 위해 대답을 미리 준비해가며 기다리던 전화교환원 존슨 부인, 개구쟁이의 양배추 서리를 눈감아 주고 품평회에 내보낼 소중한 양배추를 아이에게 선물해 줄줄 아는 아량 넓고 정 많은 존 베커씨 등등..  그가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은, 따스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내 지나간 과거의 시간 어디쯤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만났건만 내가 그들의 따스하고 다정한 마음을 헤아릴 만큼 마음이 깊지 못하여 내 추억이 행복한 기억으로 더 풍부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작가의 추억이 이렇게 따스한 건 작가가 따스한 시선으로 지난 기억들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읽으면서 종종 책을 덮어가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려고 애쓰게 만드는 책이었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내가 그리워할 지난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에 갑자기 모든 것이 소중해진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좋은 추억이라던데, 나에게 이 책 속의 이야기만큼의 좋은 추억이 없다는 걸 불평하기보다, 이제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냉혹살벌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솜털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책들도 있다.  양쪽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근본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나쁜 면도 있지만 좋은 면도 함께 갖고 있다는 것, 양지와 음지, 비극과 희극이 늘 공존한다는 것, 그 양면 모두를 세심하게 살피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점점 추워지는 계절에 맞게, 시기적절하게 출판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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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풀빛 청소년 문학 5
도나 조 나폴리 지음, 김민석 옮김 / 풀빛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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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민족의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주인공 로베르토가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 국적의 소년이며 당시 이탈리아가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고려한다면, 로베르토를 비롯한 그 시대의 아이들에게 일어난 불행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생각하면 전쟁의 참혹함이 아이라고 해서 비껴갈까, 하는 생각에 이야기 속 상황이 납득이 되었다. 

로베르토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독일군에 의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전쟁의 광풍을 온몸으로 겪게 된다. 아무리 군사동맹 관계의 독일과 이탈리아지만 히틀러와 무솔리니라는 두 파시스트의 광적인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전쟁이라는 잔인한 속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군이 이탈리아 국적의 아이들을 강제 동원, 징용하는 일이 가능했단 사실에 놀랐다. 그런 어이없는 상황, 비참한 현실의 와중에도 로베르토는 함께 끌려간 유대소년 사무엘과의 우정과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온 소녀에 대한 동정을 보이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친구 사무엘이 죽자 로베르토는 사무엘의 유언대로 ‘싸우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네 마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수용소를 탈출한다.  죽음과 팔짱을 끼고 가는 듯 위태로운 탈출의 여정은 소설의 반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작가가 수용소 안의 비참한 현실과 맞먹는 분량으로 로베르토의 생명을 건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마도 전쟁을 향한 절망보다는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지금 필요한 건 돌이에요.  돌만 충분하고 물이 깊지 않다면 물 위에 도시를 세울 수 있어요.  베네치아처럼요.”

“아저씨, 나는 돌이 될 거예요.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 말이예요.  아저씨도 그런 돌이 될 수 있어요.” (p.258)

로베르토가 이탈리아군의 탈영병 마우리치오에게 하는 이 말은 이 책의 원제 Stones in Water를 생각나게 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전쟁 속에서의 희망과 평화의 재건이라는 상징을 담은 ‘돌’을 수용소에서 만난 비참한 몰골의 폴란드계 유대인 소녀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로베르토의 돌’을 갖기를 바라면 욕심일까. 총격이  오가고 미사일이 떨어지는 전쟁 중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오늘의 현실은 나름대로 참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십대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진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고 답답한 현실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수도 없을 만큼 무능력한 어른이지만 그들의 손바닥 안에 ‘로베르토의 돌’을 살며시 쥐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포기하지 않는 희망, 절망을 견디고 피워내는 꿈,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빛을 찾아가는 용기,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강한 의지가 ‘로베르토의 돌’의 의미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로베르토가 수용소를 탈출하여 파르티잔으로 살아갈 것을 돌을 손 안에 꼭 쥐고 결심했듯이 우리 아이들도 소중한 자기 삶 속에서 의미 있는 미래를 희망하고 용기 있게 나아가기를 가만히 빌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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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9-1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함께 빌게요.

섬사이 2007-09-19 21:09   좋아요 0 | URL
예, 함께 빌어요. 공부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 잘 사는 집 아이이거나 가난한 집 아이이거나 저마다의 꿈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기를.. ^^
 
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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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무거워 보이기도 하는 제목이다.  요즘 누가 ‘의미’까지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삶이 고요하지 못한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들이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도 못하고 쌓여있는데 누가 내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생각해 보려고 잠시 진지해 본 적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은 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뭐더냐, 하는 약간의 반항과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던 책.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는 부제가 따라 붙어 있는 책이다.

뜻밖에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작가는 책의 첫 부분, ‘들어가는 말’ 안에서 일찌감치 밝혀두고 있다.  작가는 ‘인생이란 자기 안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p.11)이라고 하면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게 된 그 눈으로 다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p.12)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에서 전쟁을 겪으며 조센진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열 서너 살까지의 경험들과 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한 고백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역사의 커다란 소용돌이 안에 묻혀버린 개인의 역사가 이 책의 내용인 셈이다.

작가의 삶에 드리워진 역사의 ‘시대의 그림자’는 너무 진하고 무거웠던 까닭에 작가의 삶 또한 비참하고 어둡고 슬프다.  그 ‘시대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당시 작가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의문들을 풀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무서운 동시에 한없이 상냥’하고 ‘터무니없이 완고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p.234)으며 가난 때문에 아들이 상처받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소원이 너무 강해서 ‘앞뒤가 꽉 막힌 사람’(p.59)이 되어버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조선의 바람과 향기가 배어 있’는(p.202) 아버지, 그래서 작가가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p.233)이라고 고백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자기 삶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건과 만남을 통해 느꼈던 감정과 삶의 변화, 새로운 인식들을 세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자기 삶을 이렇게 맑고 냉철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걸까, 하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에 비하면 나는 참 대충대충 주먹구구식으로 내 삶을 다룬 것 같기만 하다.  내 느낌, 내 생각, 내 삶의 작은 변화들과 이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들에 대해 난 얼마나 적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기억에는 고통스런 일들이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고통과 외로움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나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상냥함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p.115)라고.
그리고 작가는 ‘인간의 상냥함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힘’(p.236)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이웃과 다른 민족을 내 가족, 내 민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p.237)로 다른 이들을 만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상냥함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p.237)고 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해 가라고 한다. 

이 말은 지난 4월에 타계한 하이타니 겐지로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하이타니 겐지로도 상냥함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는 ‘인간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고,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무수한 생명이 그 생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 내 생명 또한 다른 생명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이 인간의 성실함을 낳고 상냥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진정한 거인은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고 아이들을 통해서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했던 것이다.

씁쓸한 건 우리 사회가 상냥한 사람이 바보가 되어버리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경쟁에서의 승리와 물질적 부의 축적이 인생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이 공감을 얻는 사회,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에게 우정보다는 경쟁을 느끼도록 부추기는 사회, 낙오자에게는 냉정하고 가혹한 사회, 그런 사회의 분위기가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에 오싹해진다. 

한편으로는 ‘상냥함’이라는 미덕으로 일본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용서’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지만 그래도 그들로부터 ‘사죄’의 말을 들어야겠다,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는 절대 재고의 여지가 없음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진정한 상냥함’에는 작가에게 인생의 가르침이 되었던 사카이 선생님처럼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용기’를 가르치는 힘이 있어야 한다면, 이제 우리가 사카이 선생님이 되어 일본을 꾸짖어 주는 것도 ‘진정한 상냥함’이리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너무 치졸한 걸까?
그런 면에서 작가가 일본 천황에 대해 언급한 글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천황을 신처럼 다루는 것은 천황에게 인간다운 기쁨과 슬픔을 빼앗는 짓이며, 또 일본인 스스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각자의 고독 속에서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고, 천황을 위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p.231)

난 한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천황을 신처럼 떠받드는 일본인들을 보고 미쳤다면서 흉을 봤을 뿐이다.  그건 일본인에 대한 나의 편견과 감정적인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도, 국제간의 관계에서도 악어의 눈물 같은 가식적인 상냥함이 아닌 ‘진정한 상냥함’이 필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말한 상냥함이 빛나는 ‘눈부신 만남’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만남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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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8-2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를 이해하는 것과 친구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똑같이 어려운 일 같아요. 저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읽지 못했는데, 섬사이님은 역시.

월요일 아침부터 "경청"하는 기분으로 찬찬히 읽었습니다. 섬사이님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고마운 마음으로 추천하고 갑니다. 책은 물론 담아가고요.

섬사이 2007-08-28 09:43   좋아요 0 | URL
아이참~~ 네꼬님이야말로 '마음의 리뷰'를 쓰시는 것 같아 제가 부러워 하고 있는데요. 저는 책의 내용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리뷰 쓸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요.. 꾸준히 읽고 쓰다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무식하게 쓰고 있습니다. ^^ 그래도 이렇게 가끔 네꼬님처럼 칭찬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힘을 얻어요. 매번 고맙습니다.

책향기 2007-08-29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안녕하세요? 님의 리뷰 읽고 저도 이 책 주문했답니다. 큰 애 독서토론 모임에 추천할까 싶어요. "상냥한 사람"을 바보로 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저도 공감합니다...

섬사이 2007-08-31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차이의 존중>이란 책을 읽었는데요, 이 책에서 '상냥함'이라 불린 것이 그 책에서는 '도덕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명명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도덕성이든 상냥함이든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던걸요.

마노아 2007-08-2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아직 주문은 못했어요. 읽을 책이 너무 많이 밀려서 맨날 침만 삼켜요. 아무튼 저도 꼭 읽을 거야요6^^

섬사이 2007-08-31 08:56   좋아요 0 | URL
읽을 책이 쌓여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 저도 쌓인 책이 수북한데 까딱하다간 올해 안으로 해결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어요. ^^;;

프레이야 2007-09-0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냥함, 도덕성 중에서도 상위의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늘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꾸욱^^
 
세상이 끝나기 전 꼭 해야 할 12가지 풀빛 청소년 문학 4
비외른 소르틀란 지음, 김라합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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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경험해 보았는지..  어떤 일 때문에 내 삶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지는 그런 일. 그 일 때문에 내가 여지껏 살아오던 세계가 문을 닫으며 종말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세계가 열리는 그런 일말이다.  사랑이기도 하고 배신이기도 한 그런 일.  이 책의 주인공 테레제가 느꼈던 것처럼 ‘번쩌어어억!’하며 내 삶을 갈라버리는.

 열네 살 소녀 테레제는 엄마가 '이혼'을 통보하는 순간이 그랬다.  그 순간 테레제는 자기가 살았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종말은 지구의 멸망이나 신이 내리는 최후의 심판 같은 게 아니다.  테레제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종말은, 맑고 순진했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이혼을 알게 되는 순간 테레제는 응석받이 소녀에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에 불어올 크고 작은 폭풍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테레제가 작성한 12가지의 목록들은 사라져 가는 세계와의 작별을 위한 목록과 다름 아니다. 

자기 삶의 기둥 하나가 우지끈 부러지는 듯한 (물론 그건 '부모의 이혼'이 주는 충격파이다.) 느낌에 당황하고 있는 테레제에게 작가는 테레제의 언니 이레네의 입을 빌려 "배고픈 물고기만이 건강한 물고기거든."(p.22)하고 말한다.  그 말은 '결핍'과 '욕구'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메세지로 들린다.  작가의 이 충고는 책의 맨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테레제에게 '배고픔'은 '부모의 이혼'으로 드러났지만 혼란과 상처를 준 '부모의 이혼'은 테레제의 삶을 흔들고 망쳐버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강인하고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테레제와 대조적인 인물인 언니 이레네는 나이로 보면 성인이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유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폐 증상을 가졌다.  문제가 생기면 괴성과 공격적 행동으로 해결하고 모카봉봉 한 봉지가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는 이레네의 삶은 그래서 종말이 없다.  비행기 안이든 로마의 해변이든, 먹구름이 밀려오든, 화창하게 개이든 상관이 없는 멈춰버린 세계, 부숴지지 않는 견고한 세계 속에 사는 이레네의 삶을 우리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세계의 종말이 비극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테레제도 이레네, 얀과 함께 한 로마여행에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로마의 해변에서 얀에게 '노아의 방주'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구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한 세계의 멸망 끝에 도달하는 희망의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해변에서 테레제는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가 물고 돌아온 올리브 이파리 같은 희망의 증표로 '번개의 화석'을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함께 할  '얀'이라는 남자친구까지 얻음으로써 테레제는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용기를 갖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고, 얀은 나에게 입을 맞췄으며 나는 하느님한테 받은 번개 화석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얻은 셈이다. 
진실하다는 건 아주 좋은 것이다.  그 반대일 때는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이제 모든 것이 도로 전과 같아졌다.  단지 새로울 뿐.
한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도 좋은 시작."(p.179)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했던 테레제는 그 종말이 새롭고 좋은 시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순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종말을 고한 세계는 얼마나 될까.  세계의 종말은 청소년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세계가 멸망하고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럴 때마다 이미 다 자라버린, 심지어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까지도 불안과 두려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도. 

스칸디나비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목사의 아들 '얀'과 세상의 종말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종교적 냄새가 다소 진하다는 게 책읽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혼자 투덜거리는 듯한 테레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열네 살 사춘기 소녀의 방황과 갈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테레제가 점잖은 소년 얀에게 접근하는 작업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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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4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말을 고하고 새롭게 세우는 크고 작은 세계들... 그 세계들이 우리를 키우는 것이겠죠.
섬사이님, 굿모닝! 추천이에요^^

섬사이 2007-08-04 08:36   좋아요 0 | URL
새벽에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더니 좀 시원해진 것 같아요. 태풍이 가까이 오고 있다죠? 태풍이 오더라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바래요. 추천, 고맙습니다. 용기를 얻어요.

네꼬 2007-08-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부터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어요. 이 책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섬사이님이 섬세하게 짚어내신 감상이 더 좋아요. 아- 좋아요. 추천추천!

섬사이 2007-08-08 01:01   좋아요 0 | URL
네꼬님, 감사합니다. 맛깔나는 글을 쓰고 계시는 네꼬님의 칭찬을 들으니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