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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나기 전 꼭 해야 할 12가지 ㅣ 풀빛 청소년 문학 4
비외른 소르틀란 지음, 김라합 옮김 / 풀빛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그런 일을 경험해 보았는지.. 어떤 일 때문에 내 삶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지는 그런 일. 그 일 때문에 내가 여지껏 살아오던 세계가 문을 닫으며 종말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세계가 열리는 그런 일말이다. 사랑이기도 하고 배신이기도 한 그런 일. 이 책의 주인공 테레제가 느꼈던 것처럼 ‘번쩌어어억!’하며 내 삶을 갈라버리는.
열네 살 소녀 테레제는 엄마가 '이혼'을 통보하는 순간이 그랬다. 그 순간 테레제는 자기가 살았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종말은 지구의 멸망이나 신이 내리는 최후의 심판 같은 게 아니다. 테레제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종말은, 맑고 순진했던 '소녀의 세계'가 종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이혼을 알게 되는 순간 테레제는 응석받이 소녀에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인생에 불어올 크고 작은 폭풍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테레제가 작성한 12가지의 목록들은 사라져 가는 세계와의 작별을 위한 목록과 다름 아니다.
자기 삶의 기둥 하나가 우지끈 부러지는 듯한 (물론 그건 '부모의 이혼'이 주는 충격파이다.) 느낌에 당황하고 있는 테레제에게 작가는 테레제의 언니 이레네의 입을 빌려 "배고픈 물고기만이 건강한 물고기거든."(p.22)하고 말한다. 그 말은 '결핍'과 '욕구'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메세지로 들린다. 작가의 이 충고는 책의 맨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 테레제에게 '배고픔'은 '부모의 이혼'으로 드러났지만 혼란과 상처를 준 '부모의 이혼'은 테레제의 삶을 흔들고 망쳐버릴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강인하고 현명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테레제와 대조적인 인물인 언니 이레네는 나이로 보면 성인이지만 아직 무너지지 않은 유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폐 증상을 가졌다. 문제가 생기면 괴성과 공격적 행동으로 해결하고 모카봉봉 한 봉지가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는 이레네의 삶은 그래서 종말이 없다. 비행기 안이든 로마의 해변이든, 먹구름이 밀려오든, 화창하게 개이든 상관이 없는 멈춰버린 세계, 부숴지지 않는 견고한 세계 속에 사는 이레네의 삶을 우리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세계의 종말이 비극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테레제도 이레네, 얀과 함께 한 로마여행에서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로마의 해변에서 얀에게 '노아의 방주'이야기를 읽어달라는 대목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구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한 세계의 멸망 끝에 도달하는 희망의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해변에서 테레제는 노아가 날려보낸 비둘기가 물고 돌아온 올리브 이파리 같은 희망의 증표로 '번개의 화석'을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함께 할 '얀'이라는 남자친구까지 얻음으로써 테레제는 세계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용기를 갖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고, 얀은 나에게 입을 맞췄으며 나는 하느님한테 받은 번개 화석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얻은 셈이다.
진실하다는 건 아주 좋은 것이다. 그 반대일 때는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이제 모든 것이 도로 전과 같아졌다. 단지 새로울 뿐.
한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것도 좋은 시작."(p.179)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했던 테레제는 그 종말이 새롭고 좋은 시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순간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종말을 고한 세계는 얼마나 될까. 세계의 종말은 청소년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세계가 멸망하고 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럴 때마다 이미 다 자라버린, 심지어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까지도 불안과 두려움을 맛보게 된다는 것도.
스칸디나비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무척 궁금했다. 목사의 아들 '얀'과 세상의 종말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종교적 냄새가 다소 진하다는 게 책읽기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혼자 투덜거리는 듯한 테레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열네 살 사춘기 소녀의 방황과 갈등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테레제가 점잖은 소년 얀에게 접근하는 작업을 지켜보는 즐거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