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의미 -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 카르페디엠 14
고사명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무거워 보이기도 하는 제목이다.  요즘 누가 ‘의미’까지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삶이 고요하지 못한데,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문제들이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도 못하고 쌓여있는데 누가 내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생각해 보려고 잠시 진지해 본 적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은 늘 끝을 보지 못했다. 

그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도대체 뭐더냐, 하는 약간의 반항과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던 책.  ‘어느 재일 조선인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는 부제가 따라 붙어 있는 책이다.

뜻밖에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작가는 책의 첫 부분, ‘들어가는 말’ 안에서 일찌감치 밝혀두고 있다.  작가는 ‘인생이란 자기 안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발견해 가는 과정’(p.11)이라고 하면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게 된 그 눈으로 다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p.12)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에서 전쟁을 겪으며 조센진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열 서너 살까지의 경험들과 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한 고백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역사의 커다란 소용돌이 안에 묻혀버린 개인의 역사가 이 책의 내용인 셈이다.

작가의 삶에 드리워진 역사의 ‘시대의 그림자’는 너무 진하고 무거웠던 까닭에 작가의 삶 또한 비참하고 어둡고 슬프다.  그 ‘시대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당시 작가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의문들을 풀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무서운 동시에 한없이 상냥’하고 ‘터무니없이 완고했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했’(p.234)으며 가난 때문에 아들이 상처받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소원이 너무 강해서 ‘앞뒤가 꽉 막힌 사람’(p.59)이 되어버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조선의 바람과 향기가 배어 있’는(p.202) 아버지, 그래서 작가가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p.233)이라고 고백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자기 삶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건과 만남을 통해 느꼈던 감정과 삶의 변화, 새로운 인식들을 세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자기 삶을 이렇게 맑고 냉철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걸까, 하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에 비하면 나는 참 대충대충 주먹구구식으로 내 삶을 다룬 것 같기만 하다.  내 느낌, 내 생각, 내 삶의 작은 변화들과 이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들에 대해 난 얼마나 적어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기억에는 고통스런 일들이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고통과 외로움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나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상냥함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건져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p.115)라고.
그리고 작가는 ‘인간의 상냥함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힘’(p.236)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이웃과 다른 민족을 내 가족, 내 민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p.237)로 다른 이들을 만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상냥함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p.237)고 하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해 가라고 한다. 

이 말은 지난 4월에 타계한 하이타니 겐지로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하이타니 겐지로도 상냥함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는 ‘인간의 상냥함이나 낙천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분명 어딘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고,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무수한 생명이 그 생명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 내 생명 또한 다른 생명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사상이 인간의 성실함을 낳고 상냥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진정한 거인은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고 아이들을 통해서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했던 것이다.

씁쓸한 건 우리 사회가 상냥한 사람이 바보가 되어버리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경쟁에서의 승리와 물질적 부의 축적이 인생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이 공감을 얻는 사회,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에게 우정보다는 경쟁을 느끼도록 부추기는 사회, 낙오자에게는 냉정하고 가혹한 사회, 그런 사회의 분위기가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에 오싹해진다. 

한편으로는 ‘상냥함’이라는 미덕으로 일본에게 너그러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발견하고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용서’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지만 그래도 그들로부터 ‘사죄’의 말을 들어야겠다,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에는 절대 재고의 여지가 없음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진정한 상냥함’에는 작가에게 인생의 가르침이 되었던 사카이 선생님처럼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용기’를 가르치는 힘이 있어야 한다면, 이제 우리가 사카이 선생님이 되어 일본을 꾸짖어 주는 것도 ‘진정한 상냥함’이리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너무 치졸한 걸까?
그런 면에서 작가가 일본 천황에 대해 언급한 글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했다. 
‘천황을 신처럼 다루는 것은 천황에게 인간다운 기쁨과 슬픔을 빼앗는 짓이며, 또 일본인 스스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은 각자의 고독 속에서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고, 천황을 위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p.231)

난 한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천황을 신처럼 떠받드는 일본인들을 보고 미쳤다면서 흉을 봤을 뿐이다.  그건 일본인에 대한 나의 편견과 감정적인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도, 국제간의 관계에서도 악어의 눈물 같은 가식적인 상냥함이 아닌 ‘진정한 상냥함’이 필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작가가 말한 상냥함이 빛나는 ‘눈부신 만남’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런 만남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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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8-2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를 이해하는 것과 친구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똑같이 어려운 일 같아요. 저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읽지 못했는데, 섬사이님은 역시.

월요일 아침부터 "경청"하는 기분으로 찬찬히 읽었습니다. 섬사이님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것 같아요. 고마운 마음으로 추천하고 갑니다. 책은 물론 담아가고요.

섬사이 2007-08-28 09:43   좋아요 0 | URL
아이참~~ 네꼬님이야말로 '마음의 리뷰'를 쓰시는 것 같아 제가 부러워 하고 있는데요. 저는 책의 내용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리뷰 쓸 때마다 마음이 좀 그래요.. 꾸준히 읽고 쓰다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무식하게 쓰고 있습니다. ^^ 그래도 이렇게 가끔 네꼬님처럼 칭찬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힘을 얻어요. 매번 고맙습니다.

책향기 2007-08-29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안녕하세요? 님의 리뷰 읽고 저도 이 책 주문했답니다. 큰 애 독서토론 모임에 추천할까 싶어요. "상냥한 사람"을 바보로 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저도 공감합니다...

섬사이 2007-08-31 08:54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차이의 존중>이란 책을 읽었는데요, 이 책에서 '상냥함'이라 불린 것이 그 책에서는 '도덕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명명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도덕성이든 상냥함이든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던걸요.

마노아 2007-08-2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아직 주문은 못했어요. 읽을 책이 너무 많이 밀려서 맨날 침만 삼켜요. 아무튼 저도 꼭 읽을 거야요6^^

섬사이 2007-08-31 08:56   좋아요 0 | URL
읽을 책이 쌓여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 저도 쌓인 책이 수북한데 까딱하다간 올해 안으로 해결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어요. ^^;;

프레이야 2007-09-0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냥함, 도덕성 중에서도 상위의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늘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