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안녕하려면] 서평단 알림
우리와 안녕하려면 - 하이타니 겐지로 단편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츠보야 레이코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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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도서입니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내가 만난 아이들>이라는 교육에세이집에서 ‘상냥함의 힘’을 강조했었다.  ‘어린이는 작은 거인이다.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한없는 에너지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어린이, 내가 어린이를 이런 존재로 보게 된 바탕에 오키나와가 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어린이가 어떻게 낙천적일 수 있는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어린이의 내면이 어떻게 상냥함으로 가득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나는 지금껏 나를 길러 준 상냥한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먹으며 살아왔’으며 ‘상냥함은 정서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키는 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었다.

작가의 고백이 얼마나 절절하고 아프게 다가왔었는지, 난 그 책을 읽고 난 후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을 다시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도서관에서 <태양의 아이>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같은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하다가 대출을 몇 번이나 미루곤 했다.

그러던 내가 <내가 만난 아이들>이후로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다.  ‘물 이야기’, ‘손’, ‘눈’, ‘소리’, ‘친구’, 이렇게 짤막한 제목을 가진 다섯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역시나 작고 가난하고 상처 입었지만 따스하고 상냥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이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다. 

그 아이들은 ‘공부할 수 있는 놈한테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지만, 슬픈 일이 하도 많아서 공부 따위 손에 잡히지 않는 놈한테는 슬픈 일을 같이 걱정해 주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잖아.  우리 학교에 그런 선생님이 있나?“(p.14)하고 교육현실을 토로하며 학교의 해산 명령에도 불복한 채 수영부에 매달리는 문제아들이기도 하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전투지였던 오키나와에서 어릴 때 폭탄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손을 잃은 선생님을 기억하며 당시의 아픈 역사를 찾아가는 소녀들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난과 폐허 속에서도 맑은 눈망울을 간직한 채 해맑게 살아가는 아이들, 장애가 있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들, 비열하고 가식적인 사회와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저항하며 순수의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아이들이기도 했다.

책 속의 아이들은 동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된 나에게 아픈 질문을 던지곤 했다. ‘스스로 맞서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들 너무나 순순히 규칙을 따르고 너무나 욕망에 약해요.’(p.66)라며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평행을 이루거나 어긋나지 않고 잠깐씩이라도 만날 수 있는 게 나의 희생이 아니라 ‘자식의 희생’ 덕분일 수도 있다는 사실(p.154)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기도 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비열하고 치졸한 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고 부끄러운 모습들이 슬프다거나 추하다고 느껴지기보다 따스함으로 감싸여져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맑고 진솔한 느낌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소중히 여겼던 ‘상냥함의 힘’이 그의 문학 안에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처와 고통을 녹아내어 따스한 상냥함으로 변화시키는 그의 삶과 문학 속 연금술이 너와 나, 서로에 대한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차별이나 편견 없이 하나로 묶어 놓는다.

오래전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상냥함으로 그를 대할 수 있을까?  닫힌 마음을 열고 그에게 웃어줄 수 있을까? 아직도 남아 있는 상처를 딛고 그와 내가 ‘우리’라는 한 묶음이 될 수 있을까?  책을 향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마음을 향해서는 고개를 가로 젓는 내 모습이 참 씁쓸하다.  (08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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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기러기
폴 갤리코 지음, 김은영 옮김, 허달용 그림 / 풀빛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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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기러기>.  폴 갤리코라는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이 책이 1941년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작가에게 오헨리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긴 책이라는 간단한 소개글 정도의 밑천만 갖고 첫 장을 펼쳤다.

<흰기러기>와 <작은 기적>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두 편이 책의 전부였고 두께도 얇고 행간도 넓어서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조금은 만만한 기분으로 집어든 책이기도 했다.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시키는 우울한 표지그림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흰기러기
그레이트 마시라는 큰 늪지대의 낡은 등대에 살고 있는 필립은 비틀리고 구부러진 흉측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따뜻하고 고운 심성을 가지고 있다.  늪지대를 찾아 날아온 새들을 돌보고 등대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가던 필립은 어느 날 사냥꾼 총에 맞은 흰기러기를 안고 찾아온 소녀 프리다와 고운 인연을 맺게 된다.  흰기러기와 프리다, 필립은 해가 거듭되면서 마음과 영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이어진다.  필립은 프리다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자신의 처지 때문에 속으로만 그 사랑을 간직한다.  2차 세계대전 중인 어느 날,  자신이 필립을 사랑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프리다는 필립의 등대로 향한다.  그러나 필립은 자신의 나룻배를 타고 영국해협을 건너 독일군부대에 포위당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영국군들을 구하기 위해 덩게르트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채 헤어진 두 사람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만다. 

덩게르트에서 독일군의 포위를 뚫고 구출된 영국군에 의해 전해지는 필립의 용감한 행동은 한 마리 흰기러기와 함께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프리다는 필립을 따라 날아갔던 흰기러기가 돌아와 등대를 휘감으며 나는 것을 보고는 필립의 죽음을 알게 된다.  프리다는 필립의 영혼과 함께 날고 있는 흰기러기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한다. 

맑고 차분한 문체로 전해지는 애잔한 사랑이야기가 추운 겨울 웅크렸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놓았다.  이런 사랑이야기를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사랑도 속전속결해야 하고 쿨해야 한다는 요즘의 애정법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정말 고전스타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속으로는 이런 사랑이 날이 갈수록 푸석해져가는 이 메마른 마음 사이로 따스하게 흘러주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게 현대인들 아닐까....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어리석어 보일까봐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저울과 눈금자를 들이미는 이 황량한 ‘현대’라는 늪지대에서 낡은 등대를 지키며 살아가는 따뜻하고 고운 심성을 가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그가 될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작은 기적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성인이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성인인데 청빈한 수도자로 동물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그 성인이 남긴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성당 신자들 사이에 애송되는 기도이기도 하다. ‘작은 기적’은 성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아시시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고아소년 페피노는 부지런하고 유순하며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당나귀 비올레타와 함께 시장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착한 소년이다.  페피토에게 비올레타는 ‘어머니이자 아버지였고, 형제이자 친구, 그리고 동반자이자 위안’(p.84)이였기에 페피노는 비올레타에게 언제나 사랑을 쏟았고 비올레타는 그런 페피노에게 ‘충성과 순종과 애정으로 보답했다.(p.85)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비올레타가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이다. 애가 타던 페피노가 비올레타를 살려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은 비올레타를 동물을 사랑했던 성 프란시스의 납골묘까지 데리고 가서 병이 낫도록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페피노는 기적을 믿었기에 실행에 옮겼지만 성 프란시스는 교회의 평신도 관리인에게 기적의 성인이 아니라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단이 된지 오래였다.  평신도 관리인은 페피노의 부탁을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자상한 다마코 신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낭패를 본 페피노는 평신도 관리인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의 계획을 가능하게 해줄 더 높은 사람을 찾게 되었고 결국 교황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라 신비라는 말이 있다.  과학적으로 따져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경이롭게 펼쳐지는, 그저 순간의 깨달음처럼 번쩍이는 신비로 찾아오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감추고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펼쳐 보이는 신앙의 세계에 대한 말씀이 성서에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굳이 신앙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순수’라는 것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더 가까운가.  페피노인가, 다마코 신부인가, 평신도 관리인인가.  지금의 내가 평신도 관리인의 모습을 너무 많이 닮아 버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순수하지 않다는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 속의 평신도 관리인이 페피토의 순수한 마음을 짓밟았듯이 나도 누군가의 순정한 마음을 짓밟고 상처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두 편의 글이 끈적임 없이 맑게 가슴에 와 닿는다.  어쩌면 요즘 소설들에 비해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괴기와 엽기마저 판치고 있는 소설계에서 이 책의 서정성은 상큼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각박하고 삭막한 요즘의 현실을 비판하는 아름다움을 갖췄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08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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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플라톤 국가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4
손영운 지음, 이규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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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리뷰의 맹점은 내가 정식으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내가 20대였을 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의 <향연>과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등을 장만하여 읽어보려 했다가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때 덮어버린 후로 섣불리 다시 펴보지 못하고 있는 책들이다.  그러니 내가 600쪽이 넘는 책 열권이 한 세트인 플라톤의 <국가>를 감히 펼쳐보기나 했을까..  이제 겨우 만화로 된 이 책을 읽었을 뿐이니 원작과 꼼꼼하게 비교해 보고 원작에 대한 충실성을 가늠한다거나 오류를 찾아내는 일은 애초 불가능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플라톤의 철학에 대해서 ‘동굴의 비유’나 ‘이데아론’에 대한 수박 겉핥기식의 상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주워들은 단편적인 풍월만이 전부인 이 무식한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고 플라톤과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청소년들도 내가 느끼는 정도의 재미와 이해 정도는 무난히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본지식을 얻기엔 딱 좋은 책이다.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플라톤이 살던 당시 아테네의 사회상과 정치상황, 플라톤이 민주정치체제를 반대했던 이유,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와 각각의 철학적 사유의 차이점,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개념에 대한 설명까지 조목조목 짚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만화라고 쉽고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좀 곤란하다.  물론 철학에 조예가 있는 분들이라면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을 테지만(그런 분들, 정말 부럽다.), 나처럼 철학이라면 지레 신경이 곤두서는 타입이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펼치면서 나는 대학시절에도 난해하게 여겨졌던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지금에 와서 찰떡같이 착착 감겨올 거란 기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철학개론 시간에 교수님의 설명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아픈 기억과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인 플라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졌을 때 느꼈던 통쾌함에 대한 기억이 살짝 되살아났던 게 전부였다. (기본지식이 거의 전무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난 지금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대학시절 철학개론시간에 플라톤 철학에 대해 배웠던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지식을 이 만화책을 통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적인 국가 형태인 ‘철인정치체제’에 대해 어줍게라도 주절대며 플라톤의 주장에 반기를 들 수 있었다는 것에 내 나름의 커다란 발전이라고 여기며 큰 의의를 두고 싶다. 

플라톤은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국가를 꿈꾸었다.(그가 민주정치체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도 민주정치체제는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수호계급에게 교육과 훈련, 엄격하게 통제된 공동생활, 게다가 배우자와 자녀의 공유까지 요구했으며 아이들의 완벽한 교육을 위해서는 아이들이 열 살이 되면 부모로부터 격리, 모두 시골로 보내어 교육시키는 제도를 주장하고 있다.  마치 로봇에게 프로그램을 입력하듯 인간을 교육을 통해 통제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게 질렸다고 해도 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열풍과 플라톤이 주장한 철저한 공교육 시스템은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지만 양쪽 모두 너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이다.  플라톤이야 지혜와 용기, 절제가 어우러져서  ‘올바름’과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야만 마침내 철인이 통치하는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나름의 철저한 목표 아래에서 주장한 것이겠지만, 어쩐지 플라톤이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로 이성과 격정, 욕구를 이야기했지만 나라면 거기에 정서와 감정을 덧붙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이 인간의 정서와 감정까지 고려했다면 아이들을 열 살에 부모와 격리시키겠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 같고, 또 철인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한 경쟁과 시험에서도 인간의 ‘야망’이라는 내면의 그림자를 무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시를 무용지물로 여기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기게아의 반지’를 낀 목동처럼 인간에겐 교육으로는 통제될 수 없는 본능적인 악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이상적이긴 하지만 (‘이데아’라는 개념자체가 이상적이니 플라톤의 사상이 현실에서 실현불가능한 이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민주정치체제의 단점을 꼬집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예리함이 번뜩인다.  특히 얼마 전 대선을 치루고 난 뒤라서 그런지 ‘민주제에서는 지도자가 결정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부분에서 특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대선에서 통치자로서의 자질검증보다는 특정집단의 이익이라든가 매스미디어의 인기몰이에 편승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 후보가 떠올라 무척 씁쓸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플라톤이 다시 살아난다면 “거봐, 민주정체는 역시 좋은 정치체제가 못되잖아.”하며 혀를 끌끌 차지나 않을는지 걱정스럽다.

어떤 정치체제이든 “선과 올바름의 이데아를 실현할 수 있는 국가가 제대로 된 국가이며, 국가의 목표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것”이라는 플라톤의 철학적 신념은 따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또한 그가 말했던 ‘통치자의 자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플라톤이 요구한 ‘통치자로서의 자질’에 자신이 어느 정도나 적합한지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도 선거후보의 자질 검증을 보다 철저하게 요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시대에 쓰인 플라톤의 <국가>가 2000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 인류의 찬란한 고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의 대화체 질문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착하고 올바른 국가’라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여전히 우리도 함께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생 딸아이는 내가 보던 책을 슬그머니 빼앗아 읽곤 했다.  학교 도덕교과서에 플라톤이 등장하는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해 배웠다며 관심을 보였다.  중간에 재미있냐고 물어봤더니, 재미있단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점점 복잡해지니 어디까지 재미있다며 봐줄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 평생에 절대로 펴보지 않았을 플라톤의 <국가>를 맛볼 수 있게 해준(제대로 맛을 본 건지 그것조차도 알 수 없는 처지이지만) 이 책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딸이 끝까지 읽어낸다면 몇 곱으로 고마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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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사토 다다오 지음, 설배환 옮김, 한홍구 해제 / 검둥소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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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토 다다오는 열네 살의 나이로 “충성심과 애국심을 증명하고 싶어서, 울면서 중학교 진학을 권유하던 어머니를 뿌리치면서까지 소년병으로 참전”(p.252)했던 사람이다. 스스로를 ‘영락한 군국주의 소년’(p.252)이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하는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겪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그 원인을 찾아 반성하고 비판하며 평화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청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베트남전쟁, 알제리전쟁,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걸프전, 이스라엘과 아랍 연맹의 전쟁, 이란과 이라크 전쟁,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등등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전쟁의 내면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글들이 세밀하고 친절하다.  전쟁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글이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당시의 세계정세와 전쟁 당사국의 상황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쉽게 설명하고 있어 청소년들이 전쟁을 통해 현대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전쟁의 원인을 불평등과 차별, 편견 등으로 꼽는다.  국가간의 경제적 불평등, 인종 과 종교적 차별, 자국에게 유리한 논리에 사로잡힌 편견, 냉전체제하에서 인류가 보여줬던 이분법적 사고..   그가 추려낸 전쟁의 원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좀 씁쓸했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다니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장래 좋은 직업을 얻어 편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가난한 나라를 돕기 위해 이 세계에서 전쟁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것이다.”(p.166) 라는 글은 나를 뜨끔하게 만든다. 

얼마 전 한 신문의 칼럼에서 박노자 씨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공부나 사회적 관계 맺기를 ‘투자’로 이해하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식 구조 아래에 있다.”고 분석하며 어릴 때부터 ‘경쟁’에 익숙한 우리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의 전쟁터에서 ‘출세의 전사’가 되고 있다”며 일갈했다.  ‘전쟁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토 다다오의 글이 우리에겐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불가능의 주장이 될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생각에 우울한 기분에 젖기도 했다. 

FTA협상반대나 이라크파병반대 등에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도 나에게 떨어질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히 세뇌된 까닭일 것이고, 재벌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두려움에 재벌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쉬쉬해주는 것도 정의와 이상을 팔아 물질적 이익을 사려는 자본주의적 천박한 이기심의 소산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평화를 위해 가야할 길은 참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  내 아이에게 이 책 한 권을 읽게 하는 것으로 평화에 대한 이 세계의 일원으로서의 나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현대사의 이면을 생각할 수 있게 하리라는 믿음이 간다.  무엇보다 내가 내 아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꿈꾸는 ‘어미’라는 이름의 족속이기에 폭력이 판치는 환경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를 생각하는 부드럽고 고운 마음 한 자락을 흘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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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펭귄은 북극곰과 함께 살 수 없을까? - 북극과 남극의 모든 것 내인생의책 자연을 꿈꾸는 과학 1
일레인 스콧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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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지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아주 단순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도의 상식.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왜 펭귄은 북극곰과 함께 살 수 없을까?’를 보고는 ‘어? 정말 그러네.. 왜 둘이 같은 지역에 살 수 없는 거지?’라는 궁금함이 일어났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1915년 독일의 과학자 알프레드 베개너에 의해 체계화된 대륙 이동 이론부터 꺼내 놓는다.  2억 만 년 전에는 지구상에 판게아 (‘모든 땅’이라는 뜻이란다.)라는 단 하나의 커다란 대륙만이 존재했는데, 이 판게아는 적도와 가까워서 아주 따뜻한 열대기후였다고 한다.  이 대륙이 1억 5천만 년 전에 곤드나와 대륙과 로라시아 대륙으로 나뉘어졌고 다시 로라시아 대륙은 북쪽으로, 곤드나와 대륙은 남쪽으로 떠내려갔는데 지금의 남극대륙은 이 곤드나와 대륙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극대륙에서도 열대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이라고. 

그 뿐만 아니라 저자는 북극과 남극의 백야와 오로라 현상, 극지방에서의 나침반의 변화와 지구의 자기력, 극지방을 탐험했던 사람들, 펭귄과 북극곰의 생태와 습성, 지구 온난화에 따른 환경파괴의 문제점, 오늘날 극지방에서 벌이고 있는 인간들의 탐구와 실험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풀어놓는다. 

평생 7개의 대륙을 모두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극대륙에 발을 딛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극의 존재를 부정했던 제임스 쿡 선장과 그런 제임스 쿡 선장의 주장에도 굽히지 않고 남극대륙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했던 달림플의 이야기나 1909년 4월 6일 피어리 제독보다 45분 먼저 북극점에 도착한 흑인 메튜 헨슨이 당시 흑인이라는 이유로 최초의 기록을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는 극지방의 새로운 땅을 향한 인간들의 치열한 관심과 이기적 논리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또 아문센이 남극점 도달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얼음으로 뒤덮인 땅 그린란드의 이름이 그린란드인 이유, 그리고 남극대륙 동쪽 3.8Km의 얼음장 밑에 존재하는 240Km길이의 신비의 호수 보스톡호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아트지 재질의 책이라서 자료사진들이 비교적 선명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독서능력이 높은 5,6학년 아이들이나 중학생 이상의 아이들에게 적당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극지방에 대한 책이지만 속으로는 그 이상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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