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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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은 지워버릴 수 없는 얼룩처럼 우리의 생각 밑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바르톨로메는 선천적으로 기형을 타고났다.  혹이 튀어나와 굽은 등, 제대로 서는 것조차 불가능한 뭉툭한 발, 걷는 것보다 개처럼 기는 것이 더 빠른 신체구조가 바르톨로메가 안고 있는 장애다.  바르톨로메는 이런 장애들 때문에 가정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아버지 후안은 바르톨로메를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차라리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매정함을 보인다. 

예전에 나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에 가본 적이 있다.  가면서부터 잔뜩 긴장이 되었다.  산밑에 자리잡은 낮은 건물.   건물 앞 마당은 햇볕이 가득 들어  과다노출된 사진처럼  하얬는데,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낮인데도 어두컴컴했었다.  내가 긴장하고 주눅들어 있다는 걸 감추려고 애쓰면서 안내하는 사람을 쫓아 캄캄한 복도를 걸었다.  복도바닥에서 꽤 높이 달린 방문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안내하던 사람이 어느 한 방문을 열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 한 분이 어둠 속에 앉아 있다가 고개만 돌려 우리 쪽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 윤곽이 희미한 그 얼굴.    내 마음 속엔 그들에 대한 두려움과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던 거다.  어두운 건물에서 하얀 마당으로 나왔을 때 내 위선이 부끄러워 어디론가 빨리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아오는 길이 무척 힘들고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한센병에 대한 오해가 사라진 오늘에도 나의 의식 밑바닥에는 '나와 다른 존재'와 맞닥뜨려야 하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말도 안되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바르톨로메는 15세기 사람이다.  장애의 원인을 죄에서 찾던 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그 편견과 두려움은 훨씬 더 가혹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터이다.  바르톨로메네 가족이 고향마을을 떠나 왕궁이 있는 마드리드로 이사를 가면서 바르톨로메의 시련을 더욱 커져간다.  바르톨로메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후안은 이사하는 내내 바르톨로메를 궤짝안에 넣고 마드리드 집에 도착해서도 바르톨로메는 외진 골방에 거의 갇혀 생활하게 된다.  그래도 바르톨로메는 꿈을 꾼다.  언젠가 자기도 돈을 벌만큼의 능력을 갖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노라고. 

어머니 이사벨과 형 호아킨, 누나 후안나의 도움으로 크리스토발 수사에게 글을 배우게 된다.  크리스토발수사는 바르톨로메가 가진 맑은 영혼과 탁월한 재능을 발견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그러나 아버지 몰래 수도원을 오가던 바르톨로메는 어느날 공주의 마차를 몰고 나온 아버지 후안에게 발각되고,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철부지 공주는 바르톨로메를 인간개로 보고 자기가 갖고 놀고 싶다며 왕궁 안으로 불러들인다. 

왕궁안에서 바르톨로메는 개로 훈련받는다.  개처럼 짖고 개처럼 구르고 개처럼 먹는다.  그런 고통스런 나날들 중에서도 바르톨로메는 개처럼 분장하기 위해 찾는 궁정화가들의 작업실에 갈 때만큼은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궁정화가들의 도움으로 바르톨로메는 자기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였던 바르톨로메의 꿈이 다시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어 벨라스케스의 제자가 된 파레하는 바르톨로메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아버지 후안은 바르톨로메를 아들로 받아들이게 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그림을 모티브로 펼쳐지는 작가적 상상력이 놀라운 책이다.  책 속에는 온갖 사회적 편견으로 상처받는 바르톨로메의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함께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려는 사람들과 그 고통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르톨로메의 장애 너머에 있는 영혼과 재능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가 가진 장애마저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바르톨로메가 겪는 편견에 대한 고통과 불평등으로 인한 상처는 비단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평등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빈부의 격차와 성차별, 강자와 약자간의 불평등은 해소될 기미가 없다.

문득 어느 한 여인네가 생각난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아들은 백혈병에 걸리고 그 자신의 폐도 온전치 못한 여인이 있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그 여인의 손톱에 곱게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말했다.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저리 한가롭게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바를 수 있냐고. 사람들은 그녀가 손톱에 천원짜리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조차도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원짜리 매니큐어는 그녀의 숨막히게 답답한 현실 속에서 유일한 낙이었는데, 천원짜리 매니큐어 하나면 몇달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는데 너그럽게 봐줄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편견의 한 단면이다. 

그래도 우리가 벨라스케스가 <시녀들>을 그리던 15세기의 사람들보다 좀 더 고상하고 이성적이며 너그럽다고 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다.  요즘은 바르톨로메처럼 개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자신이 없다.  그들을 궤짝 안으로, 또는 외진 골방으로 몰아넣고 모른 척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정말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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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28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애우가 아직도 숨어 사는 시대에 우린 공동 책임이 있어요. 따가운 시선을 제일 못 견뎌한다고 하죠. 님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불편한 시설도 그렇구요. 이 책, 참 충격적이었어요. 소재도, 기발한 상상력도, 그리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궁중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당시 약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님 리뷰 중의 한 여인네 이야기는 참 안타까운 우리네 속내라고 생각됩니다. 보이는 것만으로 모두를 판단해버리는, 편견이라는 폭력이네요..

섬사이 2006-12-2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그래요.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은 내 눈엔 보이질 않는 것 같으니까 더 걱정이죠. ^^
 
꽃들에게 희망을 (반양장)
트리나 포올러스 지음 / 시공주니어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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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바탕의 표지에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를 바라보는 그림이 그려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삶에 관한, 혁명에 관한,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고 학생들과 그밖의 사람들들 위한 것입니다."라고 적혀있다. 

꼭대기가 구름으로 가리워진 애벌레 기둥 속에서 짓밟히고 짓밟혀가며 높이 올라가려는 애벌레들이 등장한다.  꼭 우리네들 모습이다.  우리도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자극받는다.  평수를 늘려 이사간 친구에게서, 친구의 우수한 성적표에서, 나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승진하는 동료에게서, TV에 나오는 날씬한 몸매의 연예인에게서, 하다 못해 벽걸이형 텔레비젼으로 새로 바꾼 언니에게서까지... 그 경쟁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한없는 욕심의 끈을 따라서 스스로를 재촉하고 조여간다. 

기둥을 오르는 애벌레들처럼 "모두들 저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틀림없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거야. 안녕. 나도 더 이상 시간이 없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나 줄무늬 애벌레가 함께 기둥에 오르자고 했을 때 노랑애벌레는 이런 생각을 한다.  확신할 수 없으면서 행동하는 것 보다는 그냥 기다리는 것,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리하여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줄무늬 애벌레와 함께 가는 것을 거절한다.  하지만 노랑 애벌레도 기약없이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졌고, 무엇이든 아무것이나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가면서.

노랑애벌레는 나비가 된다.  고치를 만들고 있는 애벌레에게서 노랑애벌레는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나비가 될 수 있으며 그 때 "그걸 지켜보고 있는 누구의 눈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미 나비가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고,  "오직 시간이 좀 걸릴 뿐"이며 나비가 됨으로써 우리는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비가 되겠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고치를 만든다.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 꼭대기에 오른다.  기둥 꼭대기로 오르는 동안 그는 무자비해져 간다.  기둥 꼭대기로 오르려는 애벌레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줄무늬애벌레가 그렇게 오른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말한다. "이 바보야, 조용히 해! 저 밑에서 듣잖아.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하는 곳에 우리는 와 있는 거야.  여기가 바로 거기야."라고.. 꼭대기는 그 뿐이었다.  거기에 어떤 꿈도 희망도 자리 하고 있질 않았다.  그저 모두가 오르고 싶어하는 단순한 장소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더구나 위에서 바라보니 그런 기둥은 사방에 무수히 많았다.  그 때 줄무늬 애벌레는 자기 주변을 맴돌며 날으는 노란 나비 한마리를 보게 된다.  노랑 애벌레의 눈빛을 닮은 나비. 그리고 마침내....

이 책의 내용은 노래로도 만들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노래의 많은 부분들을 잊어버렸지만 "너 비록 추한 몰골의 자그마한 애벌레이나 너 죽어 사라질 때  그 위에서 떠날으는 한 마리 나비되어 들판에서 피어있는 이 꽃들에게 희망을..."하던 부분은 기억이 난다.  기타 반주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였는데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쉽다. 

얇고 글도 짧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그들도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를 꿈꾸는 작은 애벌레같은 존재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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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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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를 처음 읽은 건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이차가 많은 오빠들을 둔 덕에 만날 수 있었던 책이다.  그 때는 모모의 이야기가 그저 환타지 동화의 재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린 내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더랬는지, 그 후로 몇 번을 더 꺼내 읽기도 하고 주변에 선물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며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모모의 이야기에는 참 독특한 개성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일단 모모, 원형극장에서 혼자 살아가는 여자 아이다.  자기가 몇살인지도 모르는 아이다.  그러나 주변의 따뜻한 이웃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다.  모모의 가장 탁월한 재능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그래서 모모에게 뭔가 두서없이 말을 늘어 놓던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모를 알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여기며 혹시라도 모모가 자기들을 떠날까봐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 사람 모모의 친구 베포할아버지. 직업은 거리의 청소부다.  신중한 성격의 그는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자기 일을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해 나가는 사람이다. 베포는 말한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라고.. 어린 나이에 들은 베포의 말은 내가 어떤 일에 조급해질 때나 서두르게 될 때 내 마음 속에 메아리처럼 울리고 했다.

다른 한 사람 기기, (어릴 적 읽던 책에는 이름이 '지지'라고 되어 있었다)관광 안내원 일을 하고 있지만 늘 꿈을 꾸는 사람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에 광대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듯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인물, 사람은 아니지만 어릴 적 꼭 만나고 싶었던... 거북이 카시오페이아. 30분 앞을 미리 아는 능력을 가진 거북이다.  우리는 3년 후, 5년 후, 또는 10년 후나 그 보다 더 먼 미래를 알고 싶어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먼 미래를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카시오페이아를 늘 내 곁에 친구로 두고 30분 앞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30분 후의 미래가 쌓여서 먼 미래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도 있을테니까..  어린 나는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에게 푹 빠져있었더랬다.  아니 30분이 아니라 10분 앞을 미리 알 수만 있어도, 아니면 5분 앞이라도 미리 알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사람들은 5분 앞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고, 그리고 5분 후의 미래라면 내 의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5분 후를 바꿀 수 있다면 먼 미래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먼 미래도 지금의 5분이 쌓이고 쌓여서 도달하는 시간의 한 지점일테니까..

미하엘 엔데는 모모를 통해서 늘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마는 현대사회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아 살아가는 회색인간들.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더,더 빨리 일하고 더 바쁘게 살아가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협박하면서 말린 시간의 꽃잎을 말아 담배를 피워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시간의 흐름은 점점 더 빨라졌다.  매년 이맘때 쯤,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그리고는 모모이야기 속에 등장하던 그 회색인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어느새 나도 회색인간들에게 시간을 빼앗긴 건 아닐까.. 하고. 

회색인간들이 빼앗아 간 것은 단순히 시간, 그 자체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사고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도 회색인간 스타일로 어느새 생각이 바뀐 게 아닐까하고 염려스러워지는 것이다.  다시 또 한해가 간다.  내 마음 속의 모모가 호러박사를 찾아가 회색인간들의 시간창고에서 시간들을 해방시킬 그런 날이 새해 안에 있기를 바래본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도 시간이 없다, 바쁘다, 투덜대지 않고 소중한 시간들을  아이들과 여유있게 나누게 되기를 빈다.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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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양장)
로버트 뉴튼 펙 지음, 김옥수 옮김, 고성원 그림 / 사계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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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춘기라는 터널을 통과할 때 내 곁에 두었던 책들을 생각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시절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 키다리 아저씨, 빨강머리 앤 등과 같은 고전이라 불리긴 하지만 기본서에 가까운 책들 뿐이었다.  그나마 내 처지가 조금 나았던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들을 둔 덕분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 쯤부터 <모모>와 <딥스>,<꽃들에게 희망을>과 같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요즘 서점가를 둘러보면 황홀할 정도로 좋은 책들이 많아서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하고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좋은 책들은 많아졌건만 우리 아이들이 책 속에 푹 빠져들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독실한 세이커교도 집안에서 자라나는 로버트라는 이름의 열두살 짜리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이 열두살이지, 내 주변에는 이런 열두살 짜리를 본적이 없다.  성실 그 자체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녔을 뿐 아니라 너무 의젓하고 사려깊어서 무늬만 열 두살 짜리 같은 그런 남자 아이다. 

세이커교가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근면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외부 사람들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나 TV외화 등을 통해서 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로버트의 친구가 등장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새처, 제이콥 헨리, 베키 테이트 등의 같은 또래 아이들의 이름이 잠깐 나올 뿐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질 않는다.  로버트에겐 이웃에 사는 태너 아저씨네 소의 출산을 도운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돼지 핑키를 친구로 삼고 마음을 나눌 뿐이다. 

로버트에겐 가난한 현실이 있다.  세이커 교도가 지켜야할 교본대로 행동해야할 규범에 수긍하지 못하는 면이 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며 나릅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버트를 철부지 아이로 여기질 않는다. 매일 로버트가 책임져야 할 일거리가 있고 로버트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날마다 돼지를 죽여야 먹고 살 수 있고 자기 이름조차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의 아버지지만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임무에 충실한 아버지이기에 로버트는 존경과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친구와 다름없었던 돼지 핑키를 도살할 때도 로버트는 아버지에 대해 미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아직 피가 잔뜩 묻어있는 아버지의 손에 입을 맞춘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얼마쯤 비켜서있는 듯 하다.  오늘날의 도시 아버지들의 삶은 가족들과도 단절되고 소외되어 있다.  아버지들에겐  아내와 자녀들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자신들이 밖깥 사회에서 부딪치고 경쟁해야 하는 일에 비하면 시시하고 하찮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짊어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휴먼 펙과 같은 아버지가 그립다.  자녀들에게 자기만의 철학을 들려주고, 삶의 지혜들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진 그런 아버지가 그립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얄팍한 처세술보다 노동과 성실함의 가치를 먼저 가르쳐 줄줄 아는 그런 아버지가 보고 싶다.  가혹한 현실의 모습도 아들과 함께 나눌 용기가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아니, 나보다 아이들이 우리 기성세대에게 더욱 간절히 바라는 어른의 모습일 것이다. 나로서는 '어른답다'라는 말의 무거움을 느끼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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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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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표지 날개에 있는 작가의 사진.  커다란 곰에게 파묻히듯 안겨서 웃고 있다. 그런데 작가보다도 곰이 더 행복해하는 것 같다.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읽어보니까 작가는 입양한 지 20년이 된 350킬로그램의 검은 곰 버피를 기르며 살고 있다고.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싶었다. 그래서였을 게다.  이 책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에 대한 심각함보다 자연친화적인 마야인들의 정신세계 쪽에 더 무게를 실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제목부터가 '나무소녀'니까.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어서 전통을 지켜가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야인들의 삶이 나무소녀 가브리엘라 가족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두 분 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가브리엘라가 존중해 마지않는 품위와 지혜를 지닌 부모님, 서로서로 돌봐주고 도와주는 다정한 형제들과 함께 문명과 조금 떨어져 살아가는 가브리엘라의 삶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라의 평화는 잔혹한 내전의 바람을 맞으며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책을 읽다가 몇 번을 차마 읽어내리지 못하고 덮곤 했다.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서, 콧날이 시큰해져서, 인간의 잔인한 광기에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아직도 진행 중인 이야기라는 게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끝이 났다고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그 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였더라.  TV뉴스에서 이스라엘 군의 총격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이라는 어린 소년이 총격을 피하기엔 너무 허술해 보이는 드럼통 뒤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총격이 멈춘 후 남자는 죽은 어린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넋이 나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보다 남겨진 아버지의 슬픔과 절망이 더 깊이 전해졌었다.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은 이제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명분도 없는 전쟁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미쳐가는 모습을 보며 끔찍해 한다.  그 어떤 이유,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화되기엔 너무 잔인하고 치뤄야할 희생이 너무 크다.

이 책에선 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해온 전쟁에 대해서도 말한다.  각종 차별과 불평등으로 이름붙여진 전쟁 말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 인종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불평등한 힘의 논리,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불평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들.. 결국 그런 것들이 군인들이 등장하는 전쟁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군인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해온 전쟁 역시 잔혹하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 중에 희생당하지 않고 남아있던 동생 알리시아를 잃어버리고 가브리엘라는 혼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산미겔 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밀쳐내야 하는 또다른 가혹함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알리시아와 다시 만나게 된다.  엄마에게 '다정함이 사랑보다 더 소중하다'고 배운 가브리엘라는 알리시아와 수용소의 다른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공놀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를 만든다.  그렇게 희망을 심기 시작한다.  가브리엘라도 자기의 희망을 찾는다.  '언젠가는 과테말라로 돌아가, 어린 시절 그 곳에 남겨 두고 온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거라고, '학살에 대해 알릴 것이고, 우리 민족의 노래를 찾을' 거라고..  나무소녀 가브리엘라는 동생 알리시아와 함께 나무에 오른다.  '나무에 오르면 ,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엄마의 말을 동생 알리시아의 귀에 속삭이면서.

어디에서나 희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러나 나는 견디기 어려운 잔혹한 현실 속에서 피어나는 위태로워보이는 희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저마다의 희망이 지켜지고 더 커다랗게 자라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희망이 협박당하거나 짓밟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보고 싶다.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약한 이들의 평화도 존중받고 지켜지는 그런 세상.

이 책이 내 마음에 아픈 가시 하나를 남겨둔 것 같다.  다 읽고 덮은 후에도 가시처럼 아프게 마음을 찌른다. 가시가 잘 빠질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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