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청소년을 위한 고려유사 박영수의 생생 우리 역사 시리즈 3
박영수 지음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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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국사나 세계사 같은 역사 과목들은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에 따라 아주 재미있거나 아주 따분해지곤 했다. 중학생 시절의 선생님이 한 분 떠올랐다. 세계사를 맡았던 중년의 아줌마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중간 중간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숨죽이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선생님 덕에 세계사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적어도 그 선생님이 세계사를 가르치셨던 동안은.

이 책이 꼭 그 선생님을 닮았다. 역사는 죽은 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서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야망을 불태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빨리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삼국시대나 신라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의 느낌이 들어서 매력적이고 조선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가까워서 기록이며 유물이 풍성한 편인데다가 자주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려는? 왠지 어정쩡한 느낌이었다. 지은이도 이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머리말에서 ‘....고려시대는 상대적으로 친밀도가 떨어져서 재미없다고 속단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건 오해나 편견에서 나온 판단이며 고려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고려 초기, 고려 중기, 고려 말기의 세 장으로 구분해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무려 37가지다. 고려 건국 전, 왕건이 궁예 밑에서 장군으로 있을 때 주변의 모함으로 위기에 처한 왕건을 기지를 발휘해서 구한 최응의 이야기를 첫 번째로 해서 청렴하고 강직했던 3대정승 서필, 서희, 서눌의 이야기, 8대 현종 때의 강감찬의 탄생부터 거란과의 전쟁에서의 용맹함으로 강감찬이 무속신으로 추앙받게 된 사연이 이어진다. 특히 17대 인종 때의 이자겸과 묘청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된 이자겸이 왕비가 된 넷째 딸을 이용해서 인종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계획이 실패하는 이야기나 서경천도를 꿈꾸었던 묘청이 뜨거운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만들어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에 기름에 새어나와 오색무지개 무늬가 강물위에 둥둥 뜨게 만들고는 ‘용의 침’이라고 너스레를 떨다가 신중한 인종에게 딱 걸리는 이야기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 무신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이야기로 문을 여는데, 이 사건은 19대 명종 제위시절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노비출신이나 힘도 세고 출세욕도 강해서 장군자리에 올라 권력을 쥐었지만 최충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의민, 23대 고종 시절 실권을 쥐었던 최우의 사위로 다음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장인의 여인들과 잘못 어울렸다가 아내의 음모에 걸려들어 죽임을 당한 김약선, 호적조차 없었던 천민중의 천민 양수척 출신의 미인 자운선의 불행, 뛰어난 문장가 이규보, 그리고 몽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충’자 돌림의 왕들의 이야기는 파란만장 우여곡절의 격랑의 시대를 드러낸다.

고려말기는 31대 공민왕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공민왕이 사랑했던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슬퍼하자 승려 신돈이 노국대장공주를 닮은 여종 반야를 공민왕에게 소개해 그 사이에서 32대왕인 우왕이 탄생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같은 여자로서 노국대장공주도 반야도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문익점의 목화씨 밀반입에 대한 진실과 목화재배와 보급을 위해 각고의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던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용맹하고 후덕했던 장수 최운해가 마누라가 무서워 달아난 사연, 황금보기를 돌같이 했던 청렴한 최영 장군 집의 음식의 맛의 비결은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패망을 맞은 고려.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며 만수산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어도 나오지 않았다는 72명의 충신 두문72현,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선죽교 죽음으로 책은 끝을 맺는다.

물론 정치적인 일화 외에도 내기 바둑에는 능했으나 겁이 많아 낭패를 본 홍순의 이야기라든가 ‘벼락 맞은 집의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일어난 끔찍하고 엽기적인 사건 이야기, 형제투금 설화에 얽힌 여러 가지 주장들,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던 손변, 왕비와 후궁들 간의 골치 아픈 질투 싸움에서 받은 상처를 동성애로 위로받았던 왕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씨소녀의 이야기 등도 이어진다.

이야기 끝마다 실려 있는 ‘문화이야기’라는 팁도 읽어볼만 하다. 정자가 모두 팔각정인 이유, 조기를 ‘굴비’라고도 부르게 된 데 얽힌 사연,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행운의 상징인 까닭, 옥새의 유래 등등을 아이들에게 슬쩍 이야기해주자 금방 흥미를 보였다

야사나 일화는 자칫하면 역사의 큰 줄기를 놓치고 말초적인 흥미 중심의 이야기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역사에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중학생 때의 그 세계사 선생님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돌 위에 새겨진 듯했던 역사에 피가 돌고 온기가 퍼지고 사르르 결을 세워 감동의 질감이 드러나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 말이다.  마치 갓 구워 따끈한 페스츄리의 냄새와 그 결을 느끼며 맛을 만끽하는 기분이랄까.

이야기에서 좀 더 힘을 뺐다면 더 재미나고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글이 ‘이야기’ 로서 자족하지 않고 역사가 주는 교훈이나 학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희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외교담판 이야기에서 “서희가 소손녕을 설득한 비결은 뭘까?”하며 갑자기 지은이가 독자에게 ‘가르치기’를 시도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고려사에 대한 흥미에 비하면 이는 사소한 결점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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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 다이어리 2015>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카본 다이어리 2015
새시 로이드 지음, 고정아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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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가스가 어떻고, 탄소배출량 감축이 어떻고, 저탄소 녹색성장은 또 뭐고, 교토의정서는 어찌 돌아가는지.... 들은 말은 많았지만 제대로 정리된 것도 없었고, 문제의 심각성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것들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는 초등학교 1학년 바른생활 수준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카본 다이어리, 제목에서부터 탄소(carbon)을 내건 것이 좀 수상타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2015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우리 모습을 상상한 책이다. 그것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이상기후를 일으키는 온실효과의 주범이 탄소이고,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기후협약을 맺고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온실가스감축이다. 그러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의견대립으로 2005년에 가서야 발효가 되었고 그나마 미국은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한답시고 일찌감치 2001년에 탈퇴 선언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밉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 논의되고 있는 온실가스 감축,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담겨진 이야기다.

런던에 살고 있는 16살 소녀 로라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재앙과 그 재앙을 견뎌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혹하다. 로라는 ‘정치적인 것은 싫고’, ‘모든 게 그냥 정상적이었으면 좋겠다.’(p.52)는 평범한 소녀이고 무겁고 심각한 것보다는 ‘인생의 재미’(p.52)를 맛보고 싶은 발랄한 소녀이지만 그 모든 것이 여의치 않은 시대를 살아간다.

지구온난화로 세계 곳곳에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영국 국민들이 늦게나마(그러나 세계최초로) 재앙을 해결해보려는 시도가 탄소배급제이다. 각 가정에 탄소배출량을 재는 스마트 미터기가 설치되고 개인에게는 한 달에 200포인트를 쓸 수 있는 탄소카드가 발급된다. 그 규정을 위반했을 경우 ‘탄소 범칙자 재활 센터’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휘발유를 많이 잡아먹는 자동차가 무용지물이 되고, 전력이 수시로 끊기고, 변기물이 노란색을 넘어 갈색이 되어야 물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물을 절약해야 하고,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한편에선 약탈이 일어나고, 항공여행은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리고 마는 세상. 그런 모든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는데도 멈추지 않는 폭설, 폭우, 태풍, 가뭄 등의 이상기후는 사람들의 희망마저도 흔들리게 한다.

로라의 엄마가 “강인해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우리 세대 때문에 너무 미안해. 너희 세대의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게 우리잖니.”(p.20)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뜨끔했다. 나는 내가 비교적 좋은 시대를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의 한 부분을 슬쩍 피해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살아오면서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하게 변해갔으니까. 우리 시대만의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아픔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나는 적당히 견디어 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로라의 엄마가 하는 말은 내가 지금 즐기며 누리고 있는 이 행운이 불러올 대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언젠간 나도 내 아이들이나 아니면 내 손자뻘 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해야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앙’에 대한 이 소설 속에서 16살 로라는 사랑을 하고 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친구와 이웃 간의 관계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재앙 속에서 꽃피는 사랑과 인간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 감동과 재미를 더해주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기도 하고, 재앙을 견디고,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U턴이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한 것 같다. 아버지의 재산을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거덜 낸 못된 자식이 뒤늦게 흘리는 참회의 눈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탄소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는 장치들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자주 이용하는 생협매장에서는 영수증에 이런 게 찍힌다.  

 

이른바 로컬푸드의 의미를 이용자들에게 알려서 판매를 촉진하고자 하는 의도이긴 하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영수증 하나를 보면서 오소소 소름이 돋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알게 된 것 또 하나. 우리나라에서도 ‘탄소포인트제’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소개글을 그대로 옮겨보면 탄소포인트제란 ‘국민 개개인이 온실가스 감축활동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제도로 가정, 상업시설, 기업이자발적으로 감축한 온실가스 감축분에 대한 인센티브를 지자체로부터 제공받는 범국민적 기후변화 대응 활동(Climate Change Action Program) ’이란다. ‘탄소포인트는 현금, 탄소캐쉬백, 교통카드, 상품권 종량제 쓰레기봉투, 공공시설 이용 바우처, 기념품등 지자체가 정한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고, 탄소포인트를 탄소캐쉬백으로 전환하는 경우 이마트, 뚜레주르, 11번가 등 5만여 OK캐쉬백 가맹점, 탄소캐쉬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사용가능하다’고 한다.   다행이다. 아직은 『카본다이어리 2015』에서 나오는 탄소카드처럼 ‘채찍’이 아니라 ‘당근’에 더 가까운 포인트제라서. 관심 있으신 분들은 홈페이지(http://www.cpoint.or.kr)를 찾아가 봐도 좋을 듯하다.

우리가 자주 잊고 살아가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무척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걸 너무 자주 잊는 바람에 너무 오만해지기도 한다. 이 책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편리함을 포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도 한 마디 잊지 않는다.

‘오늘 본 런던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웠어. 달이 어마어마하게 컸고 별들은 눈부시게 밝았고..... 그리고 환상적으로 고요했지’(p.38)라고 하거나 ‘나무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p.132)는 간단한 문장으로 “침묵의 봄”이 물러갔음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고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모든 공해와 연기와 비행기와 공장과 불필요한 잡동사니 속에 살다보면, 누구나 어느 날 이렇게 낯선 계단에 서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 있다.’(p.383)고. 2015년, 너무나 가까운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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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0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105쪽까지 읽었는데 밑줄 그은 곳이 똑같네요.
정말 우리 다음 세태에게 미안할 일이죠.ㅜㅜ

섬사이 2009-11-07 10:31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이 책 읽고 나서 온실가스니 탄소감축이니 하는 보도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ㅠ.ㅠ
 
난 가끔 엄마 아빠를 버리고 싶어 미래아이문고 7
발레리 다이르 지음, 김이정 옮김, 이혜진 그림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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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섬뜩하다.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어째 좀 오금이 저리고 가슴이 뜨끔거린다.  혹시, 우리 아이들도 나를 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는지도 몰라, 하는 의심이 꼬물거린다.  서둘러 이 책 속 엄마 아빠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부모기에 애가 엄마아빠를 버리고 싶어지게 만드는 거야!!  이 책 속 엄마 아빠의 ‘못 돼먹음’을 빨리 확인해야 ‘적어도 나는 이 정도는 아니야’하고 빨리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했던 나쁜 부모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 책에 나오는 부모란 작자들은 자기들만의 조용하고 낭만적인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열두 살짜리 딸 릴리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린다.  이 책이 아무리 먼 나라 프랑스에서 날아왔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황당무계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그 나라에선 이런 일이 “있음직한 일”로 통하는 건지, 그 나라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이런 식으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건지, 이 정도로 지나치게 철딱서니 없는 부모들이 그 나라엔 너무 많아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건지,,, 적어도 난 나 편하자고 아이들을 휴게소에 버릴 생각을 하진 않아... 그래도 아이들은 가끔 엄마인 날 버리고 싶어질까? 머리 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끼어들어왔다.

그런데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녀 릴리가 너무 측은해서 마음이 물에 젖은 솜, 그것도 먹물에 젖은 솜처럼 캄캄하고 무거워질 때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릴리가 쓴 소설이었음을 밝혀진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거다.  측은했던 릴리가 갑자기 맹랑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러면 그렇지..”하는 안도감이 스며든다. 

마치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이 책은 독자를 가지고 논다.  릴리의 소설노트와 현실 사이를 오가면서 가슴 조이다 풀다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릴리는 너무나 좋은 부모님을 갖고 있으면서 왜 그런 발칙한 상상들을 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안정된 일상의 따분함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의 보호망을 벗어났을 때의 자신의 생존 능력을 가늠해보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노트에 두 사람에 대해 그런 글을 쓴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진실이 아닌, 아이 완전한 진실은 아닌, 아무래도 상관없는 쓰레기 같은 글들.
순간, 릴리는 언젠가 자기도 엄마와 아빠의 나이가 되면, 아마도 부모의 삶을 살 것이고, 같거나 거의 비슷한 세상을 물려받고 그들을 이해하게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p.151)

이 문장들이 해답일까?
아무리 좋은 부모와 자녀 사이라도 거기엔 서로 이해하고 소통할 수 없는 벽이 몇 개쯤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이가 우리 나이가 되고 나서야 이해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끝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을 ‘완전한 진실’ 몇 가지가.  그러니 릴리의 부모처럼 우리 부모들은 모두, 아이들의 사랑하고 소중한 부모임과 동시에 가끔 버리고 싶어지는 부모일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그리고 이 불안한 십대를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너그럽게 품고 감싸주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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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내일 - 1차세계대전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아이들의 전쟁 일기
즐라타 필리포빅 지음, 멜라니 첼린저 엮음, 정미영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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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행복한 국민들에겐 역사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폭력이 역사의 원동력이며 역사에는 방향이 없다고도 말했다.  어쨌거나 너무 거칠었다.  좀 더 섬세하고 정교하고 부드러웠다면 좋았을 텐데 역사 속엔 상처가 너무 많고 아직도 상처내기가 계속되는 중이다.  요즘 우리 국민 중에도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고,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건 우리가 행복한 국민이 되지 못한다는 뜻인 것 같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지만, 역사가 인간에게 주는 가장 큰 상처는 전쟁이 아닐까. 

전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게 뭘까.  운이 좋아 아직 한 번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덕분에 나에게 전쟁은 역사책에 기록된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보는 전쟁은 그저 하나의 픽션이었고, 다큐멘터리나 신문기사 등을 통해 보는 전쟁도 먼 나라 이야기였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렇게 구체적으로 와 닿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들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거랑 내가 한 대 얻어맞는 거랑은 느낌이 천지차이인 것과 같은 이치다. 게다가 역사 속에 기록된 전쟁은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구경, 아니 강 건너 불구경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게 별로 없다. 

<안네의 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경험담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린이의 눈과 감성을 통해 전달되는 전쟁의 모습은 더욱 참혹하고 비참하게 느껴지고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이 책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소녀 피테 쿠르, 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에 살다가 창이수용소에 수감되는 실라 알란과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피해 지하실에 2년 동안 숨어 살아야 했던 유태인 소녀 클라라 슈왈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에드 블랑코, 보스니아 전쟁을 겪은 즐라타 필리포빅,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소녀 시란 젤리코비치와 팔레스타인 소녀 메리 헤즈보운, 이라크 전쟁과 폭탄테러에 대한 공포로 혼란을 겪는 소년 호다 타키르 제하드, 이렇게 8명의 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기를 쓰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도 어디에선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폭격과 총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기장을 펼치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물과 전기가 끊어진 상황에서 물 두 컵으로 몸을 씻고 그 물에 빨래를 하거나 동상에 걸려 퉁퉁 붓고 가려운 손과 발 때문에 고생하거나, 배고픔에 시달리다 벌레를 잡아 입에 넣거나, 죽은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거나, 그저 학교에 가고 마음껏 뛰어노는 게 소원인 그런 아이들 말이다.  전쟁에게 빼앗긴 이 아이들의 그 시간들을 우리는 다시 돌려줄 방법이 없다.

이런 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게 하고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자칫 싸구려 동정심에 빠져버리거나 감상에 젖어 꿈에나 있을 법한 평화를 꿈꾸게 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책으로 우리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처지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은 너무 뻔뻔한 것 같아 더더구나 못하겠다.  그건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 내 행복을 확인하는,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는 ‘개선의 여지’에 눈감고 적당히 만족하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난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현실을 올바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에서 인용한 말처럼  누군가는 폭력이 역사의 원동력이며 역사에는 방향이 없다고 했지만 또 누군가는 과거를 기억하면 역사를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건을 명철하게 기록할 수 있고, 또한 사람들이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요약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역사는 현실의 무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며 그 안에 여러분의 역할도 있다고. 

그러나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잠시 고민을 한다.  경쟁을 교육의 수단으로 삼는 이 나라에서 지금 우리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돕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을 싸움판에 내보낼 한 마리 투견으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아이들에게 권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위선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스스럼없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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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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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면 옛날에 날 참 아프게 했던 사람도 웃으며 떠올리게 된다.  그 땐 얼음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시리고 아프더니, 지금은 그래도 그 사람이 그 때 내 곁에 있어 참 다행이었다고, 이렇게 추억할 수 있어 내 삶이 조금 덜 쓸쓸하게 되었다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알게 되었다.  한 순간 ‘파파팟!’하고 스파크가 일어나 번개처럼 닥쳐오는 운명 같은 거에는 좀 ‘쳇!’하며 냉소를 한 바가지 퍼부을 줄도 알게 된 대신에 중요한 인연도 아닌 듯이 능청능청 감겨오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따스할 줄도 알게 된 것 같다. 

누군가와 엮였다가 풀어지고, 절대로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꽁꽁 묶였다가도 단칼에 자르듯 끊어지기도 하는 게 인연이었다.  참 희한한 건 풀어지건, 묶이건, 싹둑 잘리건 간에 지나고 나면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 된다는 거다.  어떤 인연이든, 비록 그것이 악연이라고 해도 난 그 인연을 통해 결국엔 나 스스로를 보듬었던 것 같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때론 상처가 약이 되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이 책은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 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엘리아 옐내츠의 슬프고 허무한 사랑이 불러들인 늙은 집시 마담 제로니의 저주는 대대손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게 하고 되는 일 하나 없는 가문을 탄생시켰다.  한편, 110년 전의 초록호수 마을의 아름다운 캐서린 바로우 선생님과 흑인 양파장수 쌤의 비극적인 사랑은 한 마을 전체의 비극으로 번져 나간다. 마치 낡은 흑백 영화를 보는 듯 아련하게 감겨오는 이 서정적인 사랑이야기(비록 그 끝은 어찌되었든) 두 편은 책 속에 걸린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법이 자연스러운 ‘초록호수 캠프’의 살벌함과 모험의 긴장감을 중화시킨다.  마치 어린 시절 학교 음악 시간에 ‘강약약 중강약약’하며 익혔던 리듬처럼 세 가지 이야기로 독자를 죄었다 풀었다 하는 효과가 최고다.

소심하고 유약했던 우리의 주인공 스탠리가 고조할아버지가 불러들인 마담 제로니의 저주를 풀고 초록호수 마을의 비극을 끝내는 과정의 짜임이 참 치밀하고 절묘하고 흥미롭다.  엽기적이면서 낭만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몽환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느낌이 서로 뒤섞이는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팀버튼 감독의 ‘빅 피쉬’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쩐지 이야기가 그 영화랑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스탠리네 집안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얽히고설킨 인연의 연대(?)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인연을 많이 늘려가야 두루두루 평안하고 행복할 터.  갑자기, 사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앞으로 100년 쯤 후에, 내 손자의 손자 쯤 되는 아이가 나 때문에 삽질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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