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덩이 ㅣ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면 옛날에 날 참 아프게 했던 사람도 웃으며 떠올리게 된다. 그 땐 얼음송곳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시리고 아프더니, 지금은 그래도 그 사람이 그 때 내 곁에 있어 참 다행이었다고, 이렇게 추억할 수 있어 내 삶이 조금 덜 쓸쓸하게 되었다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알게 되었다. 한 순간 ‘파파팟!’하고 스파크가 일어나 번개처럼 닥쳐오는 운명 같은 거에는 좀 ‘쳇!’하며 냉소를 한 바가지 퍼부을 줄도 알게 된 대신에 중요한 인연도 아닌 듯이 능청능청 감겨오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따스할 줄도 알게 된 것 같다.
누군가와 엮였다가 풀어지고, 절대로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꽁꽁 묶였다가도 단칼에 자르듯 끊어지기도 하는 게 인연이었다. 참 희한한 건 풀어지건, 묶이건, 싹둑 잘리건 간에 지나고 나면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 된다는 거다. 어떤 인연이든, 비록 그것이 악연이라고 해도 난 그 인연을 통해 결국엔 나 스스로를 보듬었던 것 같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때론 상처가 약이 되기도 했으니까.
이렇게 이 책은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아무짝에도-쓸모없고-지저분하고-냄새 풀풀-나는-돼지도둑-고조할아버지’ 엘리아 옐내츠의 슬프고 허무한 사랑이 불러들인 늙은 집시 마담 제로니의 저주는 대대손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게 하고 되는 일 하나 없는 가문을 탄생시켰다. 한편, 110년 전의 초록호수 마을의 아름다운 캐서린 바로우 선생님과 흑인 양파장수 쌤의 비극적인 사랑은 한 마을 전체의 비극으로 번져 나간다. 마치 낡은 흑백 영화를 보는 듯 아련하게 감겨오는 이 서정적인 사랑이야기(비록 그 끝은 어찌되었든) 두 편은 책 속에 걸린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법이 자연스러운 ‘초록호수 캠프’의 살벌함과 모험의 긴장감을 중화시킨다. 마치 어린 시절 학교 음악 시간에 ‘강약약 중강약약’하며 익혔던 리듬처럼 세 가지 이야기로 독자를 죄었다 풀었다 하는 효과가 최고다.
소심하고 유약했던 우리의 주인공 스탠리가 고조할아버지가 불러들인 마담 제로니의 저주를 풀고 초록호수 마을의 비극을 끝내는 과정의 짜임이 참 치밀하고 절묘하고 흥미롭다. 엽기적이면서 낭만적이고,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몽환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느낌이 서로 뒤섞이는 특이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팀버튼 감독의 ‘빅 피쉬’라는 영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쩐지 이야기가 그 영화랑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스탠리네 집안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얽히고설킨 인연의 연대(?)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좋은 인연을 많이 늘려가야 두루두루 평안하고 행복할 터. 갑자기, 사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앞으로 100년 쯤 후에, 내 손자의 손자 쯤 되는 아이가 나 때문에 삽질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